메인화면으로
코끼리가 사라졌다… 파괴자 따로, 견디는 자 따로 '기후 불평등'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코끼리가 사라졌다… 파괴자 따로, 견디는 자 따로 '기후 불평등'

[초록發光] 방콕예술문화센터 전시가 던진 질문… 기후 위기 시대, 적응은 누구 몫인가

코끼리가 사라진 마을

태국 북부 난(Nan Province)에 위치한 퉁창(Thung Chang District)의 한 마을에는 한때 수십 마리의 코끼리가 있었다. '코끼리 평원(퉁창)'이라는 뜻의 지명처럼, 주민들은 코끼리와 함께 숲을 오가며 벌목한 나무를 운반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벌목이 금지되면서 코끼리가 나무를 실어 나를 일도 사라졌다. 코끼리를 활용한 생계가 사라진 상황에서, 관리에 드는 비용까지 감당해야 했던 주민들은 하나둘 코끼리를 팔았고, 결국 이 마을에서 코끼리는 자취를 감췄다. 지금 이 마을에는 코끼리가 사용했던 물품과 코끼리와 함께 살아온 주민들의 기억, 그리고 '코끼리 평원'이라는 이름만이 남아 있다.

방콕예술문화센터(Bangkok Art and Culture Centre·BACC)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지역의 신화 #2: 변화하는 지형>에서 접한 이야기다. 전시는 태국 각지의 예술가들이 땅과 물, 인간의 몸과 공동체의 기억을 통해 변화하는 지역의 현실을 기록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제목만 보면 홍수나 침식, 개발로 달라진 물리적 경관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전시가 말하는 '지형'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땅의 모양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과 자연, 지역과 세계, 과거와 미래 사이의 경계가 끊임없이 이동하고 그 관계가 새롭게 정의되는 불확실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저마다 다른 속도로 변화하는 지형들

전시 속 '지형들'은 저마다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치앙라이의 꼭강(Kok River)에 사는 메기류인 쁠라캐(Pla Khae)를 형상화한 커다란 물고기 인형이었다. 최근 강 상류의 희토류 채굴로 인한 오염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이 작품은 강을 단순한 수자원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삶과 기억,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관계가 얽힌 공간으로 바라보게 했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강 주변에서 얻은 식물로 천연 염색한 작은 천 조각과 실을 골라 물고기 인형에 직접 꿰맬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상처 입은 생명체를 함께 보살피는 듯한 이 행위는 오염된 생태계의 치유와 복원을 상징하는 동시에, 단절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나콘빠톰의 예술가 집단 '팜쫏짬 아트 스페이스 컬렉티브(Farmjodjum Art Space Collective)'의 작업은 도시화와 산업화가 지역의 풍경과 생업을 어떻게 바꾸는지 추적한다. 한때 농업과 축산 공동체의 생명선이었던 물길은 들어선 공장들의 용수원이 됐고, 축산 농장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들은 공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도시 개발을 위해 흙을 파낸 웅덩이가 주민들의 낚시터가 되는 등 사라진 것과 새로 생겨난 것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작품은 지형의 변화가 땅과 물의 모습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동과 관계, 기억까지 함께 바꾼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태국 나콘빠톰의 변화를 기록한 작품(Farmjodjum Art Space Collective, Landscape in Transition, 2026) ⓒ유예지

이 전시를 보면서 떠오른 질문은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에 적응하는가가 아니었다. 그보다 누가 지형을 바꾸고 있으며, 왜 그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몫은 주로 지역 주민과 생태계에 돌아가는가였다.

전시가 보여주는 변화의 원인과 속도는 작품마다 달랐다. 그러나 비슷한 점은 산림보호 정책과 광산 개발, 도시화와 산업화와 같이 지역의 삶을 바꾸는 결정은 마을 밖에서 이루어졌지만, 달라진 환경에 맞춰 생계와 생활 방식을 바꿔야 했던 것은 지역 주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생태계 역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변화의 충격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이 전시는 기후위기 시대에 익숙하게 되풀이되는 문제, 바로, 이 위기와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주체와 그 결과에 적응해야 하는 주체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떠올리게 했다.

적응을 말하기 전에 물어야 할 것

기후위기 시대에 적응과 회복력은 중요한 정책 목표가 됐다. 이미 발생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만큼, 재난에 대비하고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적응이라는 말은 때로 변화의 원인을 만든 주체보다 피해를 겪는 사람들의 능력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시킨다.

기후위기 시대의 적응 담론은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면 농민은 더 적합한 작물과 농법을 찾아야 하고, 해수면이 상승하면 해안가 주민은 이주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염으로 강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주민은 새로운 식수원을 찾아야 하며, 기후위기와 산업 전환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면 노동자는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적응이라는 이름 아래 변화에 대응할 책임까지 피해를 겪는 사람들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그들이 왜 그러한 변화에 적응해야 했는지, 그 과정에서 사라진 것은 무엇인지, 변화의 원인과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

누군가의 적응 노력은 다른 누군가가 책임지지 않은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이 고통을 견디고 새로운 생존 방식을 찾아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그러한 변화를 강요한 정책과 기업의 책임을 지워주지는 않는다. 적응만을 강조하면 누가 문제를 만들었는지, 누가 이익을 얻었는지,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지는 오히려 잘 보이지 않게 될 수 있다.

▲2014년 촬영된 태국 북부 퉁창. ⓒJames Antrobu(위키미디어커먼즈), CC BY 2.0

위기 속에서 가능성을 만드는 일

전시 소개에서 밝히고 있듯, 변화하는 지형은 위기의 공간인 동시에 가능성의 공간이다. 전시는 기존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공동체가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부당한 변화에 저항하며,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 가는 역량도 보여주었다. 적응이 불평등을 견디는 일이 되지 않으려면, 지역 주민에게 변화에 대응할 자원뿐 아니라 그 방향을 결정할 권한도 함께 보장돼야 할 것이다.

※ <지역의 신화 #2: 변화하는 지형(Local Myths #2: Shifting Terrains)> 전시는 태국 방콕문화예술센터에서 9월 13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