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디세이>에는 단 한 가지 법이 흐른다. 낯선 이들을 환대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제우스의 법. 낯선 이들이 나의 재산을 빼앗고 약탈한다 할지라도 이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나그네의 모습으로 제우스가 나타났을 때 그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면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된다는 두려움이 작용한 결과다. 여기서 신의 심판은 공동체 규범을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힘으로 기능한다. 열 번의 환대 중 여덟 번의 약탈이 발생하더라도 신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 줄 거라는 강한 믿음. 신앙의 힘을 통해 체제를 유지하려던 고대 사회의 빈약함이 <오디세이>에선 시험의 도마 위에 오른다. 정말 신이 당신을 지켜주는가? 만약 신이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당신과 가족, 재산을 지킬 것인가?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와 구별되는 결정적 이유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우스는 포세이돈의 분노, 칼립소의 유혹, 키르케와 세이렌의 초인적 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심판당한다. 여기까진 <오디세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정적인 차이는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를 오뒷세우스가 아닌 아테나가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원작에서 칼립소에게 붙잡힌 오뒷세우스를 해방하기 위해 가장 노력하는 자는 아테나다. 그녀가 제우스를 설득했기에 오뒷세우스는 귀향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귀향에 성공해 아들 텔레마코스를 만나는 데도 아테나의 역할이 컸다. 스파르타에서 이타케로 돌아가라 귀띔한 것도 아테나였고, 오뒷세우스의 변장을 풀어 주며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게 한 것도 아테나였다. 결정적 계기는 엔딩에서 발생한다. 오뒷세우스는 청혼자들을 모두 학살한다. 오뒷세우스가 유가족으로부터 복수를 당할 위기에 처한 순간 아테나와 제우스가 개입해 싸움을 멈추게 하고 평화를 이뤄낸다.
호메로스의 서사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결정적 계기는 모두 신의 역할로 마련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은 대체로 오만하고 고집스러우며 인간 위에 군림하는 군주적 존재로 등장한다. 초월적 힘을 과시하며 인간을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그리스의 신들에게서 일반 종교의 자애로운 신적 모습을 기대하긴 어렵다. 정신분석학은 그리스 신들을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된 존재로 해석하며 집단무의식의 보고로 파악한다. 신화적 상상력은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고, 신화적 상징들은 한 사회가 경험하는 욕망과 공포, 금기, 갈등이 알레고리로 표현된 결과라고 이해하며 신화적 세계를 현실에 대한 은유로 분석한다. <오디세이>는 이러한 시선을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원작이 품고 있는 신의 역할을 최소한으로 축소하며 오뒷세우스의 귀향에 대한 의지를 전면에 앞세운다.
<오디세이>에서 신은 귀향을 돕는 자가 아닌 방해하는 자들에 가깝다. 원작에서 그를 돕던 아테나(젠데이아)는 트로이에서 학살당한 시민의 얼굴로 오뒷세우스(맷 데이먼) 앞에 나타난다. 정답을 알려주고, 길을 밝혀주며, 다른 신들을 설득했던 아테나는 <오디세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도움을 요청하는 낯선 타자의 얼굴로 나타나 오뒷세우스의 내면에 질문을 던진다. 제우스의 법을 어긴 자는 누구인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으며 당신에게는 그 책임이 없는가. 아테나의 윤리적 질문들은 오뒷세우스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이다. <오디세이>의 아테나는 실재 세계에 현존하는 신으로서 현실에 개입하는 존재가 아니다. 환영으로 나타나 오뒷세우스의 내면에 파고를 일으키고 그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은유적 존재다.
<오디세이>에서 아테나가 희생자로서 환영의 모습이었다면, 키르케(사만다 모튼)는 남성 폭력과 약탈성을 응징하고자 마법을 쓰는 존재로 등장한다. 호메로스의 키르케는 환대의 형식을 이용해 위협을 가하는 유혹자에 가깝다. <오디세이>의 키르케는 호메로스의 태도를 전복해 제우스 법의 피해자로 묘사한다. 키르케의 섬을 뒤덮고 있던 수많은 동물과 병사들의 갑옷 속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녀가 어떤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 떠올릴 수 있다. 오뒷세우스의 군사들은 그녀에게 평화의 언어로 다가가지만, 그들이 귀향길에 들렸던 다른 마을들을 약탈하고 파괴했던 장면들을 떠올린다면 병사들을 "굶주리고 욕망에 들뜬 병사들"로 규정하고 돼지로 만드는 키르케를 비판하는 것 또한 망설여진다. <오디세이>의 키르케는 제우스 법의 피해자다. 피해자로서 가해자들에게 복수하고 자신을 지키려 타인을 해치려는 선택을 우리는 손쉽게 비판하기 어렵다. 야만이 전쟁에선 능력이지만 일상에선 폭력이라는 키르케의 주장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폭력의 주체가 신인가, 인간인가.
이 질문에 대한 <오디세이>의 답은 칼립소(샤를리즈 테론)를 통해 구체화된다. 오뒷세우스를 7년간 감금했던 칼립소는 귀향을 가로막는 신적 포획자가 아닌 심리적 트라우마를 돌보고 치유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소를 잡아먹고 신의 노여움을 산 덕분에 모든 동료를 잃게 된 오뒷세우스를 살려내고 회복시킨 자가 칼립소였다. 트라우마를 지우고 현실을 망각하는 것만이 오직 오뒷세우스를 살릴 수 있는 길이었다는 그녀의 판단을 우리는 쉽게 비판할 수 없다. 오뒷세우스를 집으로 보내겠다는 결심도 누군가의 설득이 아닌 본인의 판단이었고, 끝내 로토스를 주지 않으며 서서히 그의 기억을 회복시킨 것도 칼립소 본인이었다. 영생을 약속하면서까지 끝내 오뒷세우스를 보내지 않으려 했던 칼립소의 탐욕적인 욕망이 <오디세이>에선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제우스의 법을 실현하며 오뒷세우스를 살려내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곁에 두려 했던 지극히 인간적으로 갈등하는 신적 태도만 묘사된다.
적어도 <오디세이>에서 신들은 지배자, 폭력의 주체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인간의 폭력과 잔인성, 탐욕과 배반을 드러내는 서사적 장치다. 오뒷세우스가 트로이 전쟁 이후 20년간 표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죄 없는 트로이 시민들을 학살하고 짓밟은 인과응보의 결과다. 오뒷세우스는 처음부터 사냥과 싸움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던 자였다. 사냥이 일방적인 공격으로 인한 학살이라면 싸움은 정정당당하게 서로의 힘을 겨루며 다투는 일이다. 공정함의 기준에서 폭력의 대상과 방식을 성찰하던 그가 트로이 목마로 시민들을 속이고 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은 자신의 기준과 논리를 배반한 결과다. 아테나의 얼굴로 등장한 희생자의 모습 속에서 그는 죄책감을 품는다. 이 감정은 작품 전체를 휘감는다. <오디세이>의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판단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받고, 그로 인해 병사들이 희생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귀향에 대한 강렬한 욕망조차도 나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다. 죽은 자들의 유언,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내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귀향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목표다.
오뒷세우스의 귀향에 대한 열망은 <오디세이>를 관통하는 중심 에너지다. 그 힘 속에서 서사는 앞으로 전진하고 끝내 목표에 도달하며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부여한다. 오뒷세우스의 귀향에 대한 의지는 전적으로 인간적인 자유의지다. 그리스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매 순간 신탁 앞에 가로막혀야 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부모를 능욕하고 왕이 될 운명이라는 신탁 앞에 온 인생을 바쳐 저항했음에도 결국 신들의 뜻이 이뤄졌듯이, 인간은 신이 정해 놓은 운명 앞에 매 순간 굴복해야 했다. 오뒷세우스는 이를 신의 관용 없이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이뤄낸다. 어쩌면 <오디세이>가 보고 싶었던 장면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구혼자들의 수많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들을 굴복시키고 정의를 회복하는 오뒷세우스의 의지. 온몸에 화살이 꽂혀 있음에도 끝까지 페넬로페 앞으로 다가가 그녀와 아테나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그의 후회. 지극히 인간적인 의지를 통해 어쩌면 무너져가는 문명을 우리는 다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희망해 보려는 태도.
<오디세이>는 그 가능성을 애써 부인하거나 비관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면서도 한 가지만큼은 인정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 칼립소가 오뒷세우스에게 알려준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은 여기서 힘을 얻는다. 운명과 싸우려 하지 말고, 통제하지 말고, 믿음을 갖고 자신을 맡겨라. 칼립소의 조언 속에서 끝까지 고향에 도달하려 했던 오뒷세우스의 생에 대한 의지를 느낀다. 그리고 그 의지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오디세이>를 보고 극장을 나서며 가슴이 웅장해졌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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