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종욱 한빛은행 수석부행장이 이메일 동호회 류영하 회원으로부터 받은 글을 전해온 것이다.
류 회원은 여기서 한때 국내그룹 정상을 노리던 김우중 대우그룹 전회장의 몰락 원인을 징기스칸, 사마중달, 잭 웰치 등 동서고금의 인물들과 비교해 분석하고 있다. 이 글은 절대절명의 위기때 경영자가 어떤 선택을 해야만 기업을 위기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가에 대해 많은 점을 생각케 한다. 편집자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은 징기스칸이 세웠다. 알렉산더 대왕이니, 케사르니, 나폴레옹이니, 서양에서는 이들을 불세출의 영웅으로 치켜세우지만, 징기스칸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들이 구축한 제국은 중국의 반도 안되는 땅이요 인구였으니까...
20세기 후반 세계 최대 기업은 미국의 GE(제너럴 일렉트릭)였다. 에디슨의 백열등 발명을 발판으로 세워진 이 기업이 크기뿐만 아니라 순익에서도, 시가총액에서도 세계1위를 가장 오래 고수하게 된 것은 단연 잭 웰치 회장 덕분이다.
그는 1980년대 이후 CEO가 무엇인지 가르쳐 준 사람이다. 가장 본받고 싶은 CEO가 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반면에 싫어하는 사람은 아주 싫어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경영 전략이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의 전략 전술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한때 김우중 전 대우회장도 징기스칸에 비유되어 '김기스칸'이라고 불렸었다. 그의 기업 전략도 징기스칸을 닮았다는 말이다. 물론 동양인이라는 뜻도 있었고...
어떻게 해서 잭 웰치는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김우중은 그렇게 우습게 몰락했을까? 잭 웰치는 징기스칸을 정확히 이해한 반면에, 김우중은 그렇지 못한 데 있지 않나 싶다.
징기스칸에 관한 경영 연구는 대단히 많은데,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바는 속도이다. 그 다음으로 얘기되는 것이 단순한 조직...
그러나 잘 언급되지 않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중국에서는 무슨 정식 병법서도 아니고, 수백년에 걸쳐서 고사성어처럼 인구에 회자하는 36계란 병법이 있다.
이중 마지막 6계는 패전계라고 해서 패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를 역전시키는 계책 6개이다. 그게 바로 저 유명한 미인계(美人計), 공성계(空城計), 반간계(反間計), 고육계(苦肉計), 연환계(連環計), 주위상(走爲上)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36계 줄행랑은 바로 이 마지막 주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보듯이 중국은 전통적으로 36계를 최후 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징기스칸은 이를 제1계로 삼았다. 이 때문에 아주, 젊은 시절 외에는 그는 패배를 몰랐다. 그 이유는 패배의 기미가 명백하면 그는 정말 바람과 같이 도망갔기 때문이다.
그는 속도의 명수라 이미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도 이용한 것이었지만 병사 한 명에 말을 보통 3마리 이상 데리고 다녔다. 타고 가던 말이 지치면 순식간에 옮겨 탔다. 그가 도망하면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는 용기 없는 자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용기 있는 자만이 도망간다고 했다. 그는 일단 도망간 후에는 전력을 가다듬어 반드시 기습적으로 다시 쳐들어갔다. 기고만장한 적을 처절히 굴복시켜 버렸다. 그가 노린 것은 늘 최후의 승리였던 것이다.
김우중과 잭 웰치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었다. 김우중은 공격 하나는 징기스칸이나 잭 웰치에 못지 않게 잘했다. 누구보다 빨랐고 누구보다 끈질겼다. 그러나 도망갈 줄 몰랐다.
전군이 포위되어도 오로지 성을 사수하기 위해 무기가 고철이 되어 맨손으로 싸워야 했고, 식량이 떨어져 흙을 파먹어야 하고, 물이 말라 오줌을 마셔야 할 때까지 과거의 영광에 매달렸다. 다른 부대까지 모두 여기에 투입했다.
승산이 없는 싸움에 총동원령을 내려 전부대를 집결한 것이다. 마침내 멀쩡하던 부대의 군사도 전원 생포되거나 학살되었던 것이다.
그가 패전을 눈앞에 두고 쓴 정책은 연환책이다. 이것은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애지중지하다가 주유와 제갈량이 쓴 화공책에 의해 처참하게 패한 작전이다.
삼국지에서 연환책을 가장 잘 쓴 장군은 바로 제갈공명을 패퇴시킨 사마중달이다. 천하의 제갈공명도 험산준령을 이용하여 굳게 성만 지키는 사마중달을 이길 수 없었다. 맞붙어서는 도저히 제갈공명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사마의는 철저히 제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마침내 제갈공명의 힘이 다한 것을 알고 들판에서 마지막으로 한 판을 붙게 되었지만 대승 직전에 제갈량의 마차가 나타나자 그냥 도망갔다.
쓸데없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결국 사마의의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 것이다. 처절하게 패한 것이다. 사마의는 후에 삼국의 호랑이들이 서로 싸우다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침내 자기 자손이 통일제국을 세우게 했다.
김우중 장군이 연환책에 성공하려면 최소한 버틸 튼튼한 성과 장비와 군량이 있어야 했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진 국내 대기업은 삼성 외에는 없었다. 그런 삼성도 제일 잘나가는 삼성전자에서 고육책으로 종업원을 3분의 1이나 잘랐다.
잭 웰치는 달랐다. 그의 별명은 중성자탄이다. 사정없는 정리 해고는 그의 특기다. 사정없이 기업을 도산시키거나 팔아 넘기는 것도 그의 비장의 무기이다.
1위 아닌 기업은 그의 회사에서 살아 남을 수 없었다. 회사에 필요하지 않은 자, 가차없이 목을 잘랐다. 살아남은 자 그에게 감격하고, 쫓겨난 자 그를 원망하기 마련이다.
1위 기업이나 1위 가능성이 있는 기업은 언제든지 사들였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기업이 나날이 커져갔다. 고용도 당연히 늘어났다. 대우의 문어발 확장은 GE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잭 웰치 보고 문어발 확장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업 다각화라고 할 뿐이다. 왜? 버릴 기업, 수익이 안 나는 기업이 없기 때문이다.
잭 웰치는 유목민인 징기스칸의 제1전략인 36계를 철저히 이해하고 이를 과감히 응용한 반면, 농경민의 후손 김우중은 이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고 전혀 응용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개인의 성향만으로 이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첫째, 문화가 달랐다. 한국은 농경문화의 전통이 강한 나라이다. 정착문화이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문화이다. 집안에 누가 크게 사업에 성공하면 모두가 잘된다. 반면에 집안에서 누가 크게 부도나면 전집안이 보증 때문에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다.
둘째, 시장이 달랐다. 미국에는 80년대 이후 인수합병이 자연스러운 시장이 조성되었다. 우린 이게 모두 불법이었다. 새로 사는 것은 부도 기업을 떠넘겨 받아 울며 겨자 먹기로, 또는 웬 떡이냐는 맘에서 떠안을 수 있었지만 어디에도 팔아 넘길 수는 없었다. 또한 정리 해고도 사실상 불법이었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아닌 한 마음대로 종업원을 내쫓을 수가 없었다.
잭 웰치도 한국에 오면 김우중 이상 될 수 없었다고 본다. 아마 분통이 터져 폭탄주나 마셨을 것이다. 김우중이 GE를 맡았더라면 잭 웰치 이상으로 잘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잭 웰치를 부러워한다면, 또는 빌 게이츠를 부러워한다면, 손정의를 부러워한다면, 스콧 맥닐리를 부러워한다면, 시스코나 인텔을 부러워한다면, 무엇보다 그런 사람이나 기업이 나올 수 있는 광장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들 문화를 창조적으로 모방하여 새로운 기업 문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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