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빛바랜 메모지 한 장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빛바랜 메모지 한 장

<김승호의 휴스턴 통신 12> '참스승'을 위하여

***빛바랜 메모지 한 장**

돌이켜보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나라는 아이는 항상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듯한 아이었다.
유난스럽게 말썽을 피워 본 적도 없고
공부를 잘 한다거나 특별한 재주가 있어 칭찬을 받아 본 적도 없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내 이름도 기억 못하던 담임선생들의 이름을
나도 잊어버리며 시간은 흘러갔다.

사실 학교 선생님이란 내겐 어렵기만 하고 괴팍한 어른이었다.
내가 뭘 잘못하기만을 기다렸다가 머리통을 쥐어박거나
몽둥이를 휘둘러 대는 사람들이라서
멀리 할수록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굳어 갔다.
당연히 공부는 관심 밖의 일이였다

가끔씩 이모님이 한번씩 놀러 오시면,
맛있는 과자를 사들고 오시는 것이 반가웠지만
되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공부를 잘하던 이종사촌들 자랑에
공연히 화가 나신 어머니에게 등짝을 얻어맞아
입에 물고 있던 과자를 뱉어내야 할뿐이었다.

굳이 잘하는 것이라고는
미루나무에 참매미가 어디 붙어있나 찾아내는 것과
외발로 껑충껑충 뛰어 다니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 일로 내게 칭찬하는 어른은 없었고
외발로 뛰어 다니며 매미 잡는 일이
밥을 벌어먹는 데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알고 계신 부모님은 항상 걱정이 많으셨다

서울로 전학 오면서는 잡을 매미도 없어졌고
친구들 중에 외발로 뛰어 다니는 걸 좋아 하는 녀석들도 없었다.
결국 고등학교에 들어 와서는 교실 커튼 뒤에 숨어서
한쪽 볼떼기를 책상에 대고 햇살에 떨어지는
분필 가루를 쳐다보는 일이 내 일의 전부였다.

어느 날 책상위로 뛰어 다니며 도시락 반찬을 빼앗아 먹어가며
극성스런 점심시간을 보내는 학우들을 피해
어디서 굴러다니던 문고판 소설책을 펼쳐 놓고 있었다.

"무슨 책이가?"
어쩐지 갑자기 조용해진다 싶었는데,
언제 왔는지 담임선생의 얼굴이
내 어깨 너머로 얼굴을 나타내시며
경상도 사투리로 물으시는 것이었다.

"예? 이광수의 사랑인데요."
부리나케 표지를 들쳐 제목을 대답했다.

"니, 책 좋아하나?"
"예?"
"이따 내 좀 보제이."
"예? 예!"

그것은 그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처음으로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내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져준 첫 번째 사건이었다.
학교 교과 공부 이외에도 나를 가르쳐주고 격려하려 했던
정진호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날 이후,
단 한번도 누구 앞에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보지 못했던 나는,
내 인생에도 희망이 있을 수 있고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스스로의 꿈을 지니기 시작 했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내가 읽을 만하고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메모지에 적어 주셨다.
'무기여 잘 있거라'
'인형의 집'
'이방인'
'금강경'
'사회계약론'
'우파니샤드'등등의
1백21권이나 되는 책 목록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읽기엔
부담스러운 책들도 포함되었지만 난 밑줄까지 그어가며
이해하거나 말거나 하나하나 읽어 갔고
적어주신 책들을 반쯤 읽었을 무렵엔
나 나름대로 보고 싶은 책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다독의 버릇이 남아
자동차 월부금 내듯이 매달 책값에 돈을 쓴다.

책 제목이 적힌 메모지는 오랫 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녀서,
접힌 자리에 구멍이 뚫리고 색은 바래 버렸지만
오늘까지도 곱게 간직하고 있다.

나는 그때 그 분이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묻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달려갔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책 몇 권 더 읽은 사람이 더 고결한 품성을 지녔다거나
더 행복한 삶을 산다거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준다는 근거는 없다.

과학의 발달이 수세기 걸친 과학자의 업적이
쌓인 결과가 아니라 과학 혁명의 결과라는 사실을
토마스 쿤의 '과학의 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통해 읽었다 해서
그것이 TV리모콘의 사용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준 일도 없다.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다른 물체를 끌어당긴다는 뉴턴의 중력 법칙을 알았다고 해도
넘어지면 팔꿈치기가 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또한 하이데거가 서구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현상학적으로
접근함으로 실존주위 철학의 물꼬를 낸 일을 알아들었다 해서
그것이 오늘 하루 매출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열 번도 더 읽은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은
막내아들 녀석이 느닷없이 등 뒤로 와서
뽀뽀를 하자고 할 때 느끼는 행복만큼
나를 행복하게 해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적잖은 돈을 책값으로 날리는 이유는
박경리의 '토지'를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여성작가를 도외시했던 옛날을 반성하며 부끄러움을 배웠고
조영남의 책을 읽으며 뻔뻔한 솔직함이 부러웠고,
마틴 헤리스의 작은 인간을 읽으며 편견을 거두는 법에
더욱 진지할 수 있었다는 매력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것은 나이 들어 늙어 가더라도
책 읽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경로당 구석에서 햇볕을 쬐고 앉아 있더라도
무료한 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인지 늙는 일도 두려움 없이 기다려진다.

한 젊은 선생님의 칭찬과 관심은 언제나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것 같은 삶을 살아갔을 것이 뻔한 나에게,
내 스스로 사고할 수 있고 지식을 얻어 가는 과정의 재미를
평생 느낄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그분은 아직도 충암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시다.
다음주에 내 책이 나오면 한 권 보내 드려야겠다.

오랜만에 그 옛날 빛바랜 메모지를 들춰 보니
아직도 읽지 못한 책 몇 권이 눈에 띈다.
이번 달은 아무래도 책값이 더 들어갈 것 같다.

***추신: 지난주에 낸 수수께끼 정답**

지난주에 글이 나가고 난 후,
여태껏 받은 메일 전체보다도 더 많은 메일을 받았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재미있는 일주일을 보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분께 답장을 해드리려 했지만 미쳐 못 받으신 분들께는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답은 독자들께서 보내주신 수백 통의 메일 중에서
두 편을 골라 대신 설명합니다.

<김정순 / 대전 / 두 아이의 엄마>

"화부가 노씨가 아니라고 문제에 나왔으므로 화부는 이씨 혹은 정씨이구요
그러면, 가능성은
1) 화부-이씨, 차장-노씨, 기관사-정씨
2) 화부-이씨, 차장-정씨, 기관사-노씨
3) 화부-정씨, 차장-이씨, 기관사-노씨
4) 화부-정씨, 차장-노씨, 기관사-이씨
이렇게 4가지가 되구요.
그 중에서, 차장과 같은 성을 가진 후보가 서울에 산다는 힌트에 따라
2번 가능성 탈락!
차장과 가까운 곳에 사는 후보의 연봉은 차장의 연봉의'정확히' 3배라는
힌트에 따라 1번, 4번 가능성 탈락!
(차장이 노씨라면 노후보가 서울 살고 노차장 가까이에는 이후보가 살게
되는데 5천만 이란 숫자는 정확히 3등분이 되지않는다)
따라서 남은 것은 3번 뿐이네요.
그래서 정답은 행운의(?) 기관사는 노씨이다!"


<윤정식 / 에이폴스 근무>

"제시된 문구 하나하나에 힌트가 있다는 말에 힌트를 얻어(?) 풀었습니다.
성씨가 아닌 것부터 생각해보면 노씨는 장기를 해서 화부를 이기므로
화부는 절대 노씨가 아니겠죠.
정후보는 천안에 사는데 차장과 성이 같은 후보는 서울에 사니
차장성은 정씨가 아니겠지요.
세 후보 중 차장과 가까이 사는 사람의 수입은 정확히 차장의 세배다.
이 후보는 1년에 5천만원을 번다.
만약 이후보가 차장과 가까이 산다고 생각하고
차장의 수입을 생각하면 1666만 666원 6전 6666..으로
정확히 세배가 나올수가 없져..(떨어지지가 않으니까)
따라서 이 후보는 차장과 가까이 산다고 할 수 없겠져.
따라서 노 후보가 차장과 가까이 살고
이 후보가 차장과 성이 같아서 서울에 사는 후보가 되겠져..
차장은 이씨, 화부는 노씨가 아니므로 그럼 노씨는 기관사과 되겠져."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