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과 결혼 하겠다고?**
저 여자애와 결혼하지 못하면 평생 시인이 되어
살 수는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시인보다는 남편이 되기로 용기를 냈다.
그래서 몸에 익지도 않은 양복을 입고
앞으로 장인어른이 될 분의 집으로 찾아가
넷째 딸과 결혼 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그것이 벌써 20년 전 일이다.
딸 다섯의 딸부자 집에
큰딸도 아직 시집을 안 갔는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넷째 딸에게
청혼이 들어 왔다면 보통 일은 아니다.
딸 다섯을 키우는 동안 별별 요상한 질문이나
어이없는 요구를 이미 많이 들어 보셨을 장인어른도
이보다 더 맹랑한 경우를 보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사실 그 자리에서 장인어른이 하실 수 있는 일이란,
방 빗자루를 휘두르거나
허탈하게 웃어넘기며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외에는 없으셨을 것이다.
다행히 내가 있는 동안에는 방 빗자루를 휘두르지는 않으셨다.
나라는 녀석이 어떤 놈인지,
언니들을 제치고 시집을 보내야 될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첫째 딸의 생각을 들어 보셨을 것이다.
그러나 큰 처형은 뭘 잘못 먹었는지 전부터 알고 있던 나를
제부 자리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나같은 사람은 마음에도 없는 넷째 동생에게
괜찮은 남편감이니,
너 좋다고 하면 빨리 붙잡으라고 성화를 부려
언니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던 당시 내 아내는
엉겁결에 나와 애인 흉내를 내고 있던 참이었다.
결국, 장인어른은 내가 우량주가 될 거라는
큰 딸의 꼬드김에 넘어가셔서 빈털터리 청년에게
완곡한 표현을 쓴 허가 편지를 보내 주셨다.
내가 장인어른 입장에 있다면
결코 쉽지 않을 결정이었을 것이다.
대학에 다니고 있던 말라깽이 청년에게
가장 살갑게 굴던 넷째 딸을 내 주신다는 것은
아무리 딸 다섯이면 문 열어 놓고 잔다는
속담이 있더라도 모험일 수밖에 없으셨으리라.
결국 어린 딸들을 믿으셨고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 왔다.
결혼 후에 미국으로 넘어와 지내면서도
처갓집 식구들과는 전혀 거리감 없이 살아 왔다.
사업일로 서울에 가서 처가에 묵을 일이 있으면
장인어른께서 새로 동서가 될 사람들의 인상을 물으시곤 하셨다.
먼저 결혼한 이유로 그새 시험 보던 사람이
면접관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사람은 좋아 보이는데요."
처형들이나 처제의 인생을 좌우하는 일에
별로 도움될 만한 발언은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란 당연히 외교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사실 자기들이 좋아 하면
가부의 결정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건 그래. 막아서 되는 일은 아니지"
장인어른은 혼잣말처럼 말씀 하신다.
내가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갔을 때도
지금처럼 생각하셨을 것이다.
딸에 운명 앞에서 자식을
믿을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독백이다.
일전, 사업차 서울에 들렸다가
처갓집에 며칠을 묶었다 오던 아침이었다.
장인어른은 부리나케 안방으로 들어가시더니
갱지 위에 달필로 才勝薄德(재승박덕)이라는
한자를 적어 주시는 것이다.
사위가 행여 당신의 사랑과 염려를 잊지 말고
이 충고를 새겨들으라는 듯,
미국 신학자 윌리엄 스패로우의
"많은 사람들이 충고를 받지만
오직 현명한 사람만이 충고의 덕을 본다!"
라는 경구을 밑에다 따로 적어 놓으셨다.
재산이 많은 처갓집이나 권력을 가진 처갓집을
부러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좋은 처가를 둔 사람은
행복한 가정을 하나 더 갖고 있음과 같다.
난 처가에 가면 장인어른과 버릇없이
방바닥에 함께 누워 TV를 보거나
으슥한 영양탕 집을 찾아 가기도 한다.
큰 처형과는 승호씨! 옥희씨! 라고 이름을 불러가며
팔짱을 끼고 걸어 다닌다.
둘째 처형은 아이들과 남편을 데리고 와서
하루는 꼭 같이 자고 가고
셋째 처형은 손톱을 잘라주네 귓밥을 파주네 하며 귀찮게 한다.
처제는 제 밑에 일하는 팔등신 모델들의
수영복 사진을 같이 보자며
언니에겐 비밀이라고 낄낄댄다.
아내와 싱거운 일로 한바탕 다투더라도
아내는 바뀌어도 처가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어
가끔 실없는 농담을 한다.
"처가 식구 여러분!
저 넷째 딸 하고 못 살겠습니다.
다른 딸로 바꿔 주십시오.
미영이 대신 저하고 살 딸들은 손들어 보세요."
처제나 처형들이
"저요 저요" 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산다.
*추신*
저의 개인 홈페이지가 주소를 바꾸고 새로 단장했습니다.
새로운 주소는 www.kimseungho.net 입니다.
이메일 주소도 jk959@naver.com으로 바뀌었습니다.
많이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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