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자니 아깝고 두자니 귀찮고**
어제 박람회장에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뒷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이 보이질 않는다.
정말 잊어 버렸나 하는 생각에 잠깐 놀라며
그 지갑 안에 무엇이 들어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카드 한 장과 운전 면허증을 제외 하곤 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집에 전화를 하니 바지를 갈아입으면서 두고 왔다는
아내의 말에 안심을 하면서도 느닷없이
도대체 그 지갑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데
그렇게 항상 뒷주머니가 두툼했을까 궁금해졌다.
저녁에 돌아와 내 오른쪽 엉덩이에 손바닥 두장 두께로
혹처럼 붙어 다니던 지갑을 열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책상 앞에 펼쳐 놓았다.
크레딧 카드가 두장과 몇 가지 회원권이 들어 있다.
그 중에 카드 하나를 제외 하곤 지난 일년간 써 본 일이 없다.
왜 그동안 가지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아마 출장 중에 특정 카드를 받지 않는 호텔이나
랜트카 회사 때문에 넣어 두었으리라.
그리고 누군지 기억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명함이 십여 장이다.
무슨 일로 그런 명함들을 버리지 못하고 몇 달씩 지니고 다녔을까?
혹시 연락 할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남에 명함을 버린다는 것이 어쩐지 예의 없는 행동 같아서 이었을까?
이곳저곳의 식당 영수증은 세금 환급을 위해
필요해서 넣어 두었다가 잊어 버렸을 것이고
시한이 만료된 자동차 보험증서 한 장과
6개월이 지나도 맞혀 보지 않은 복권 한 장은
나의 게으름 외엔 변명이 없다.
그렇지만 플라스틱 이쑤시개와
버거킹 상표가 찍혀 있는 휴지 한 장과
작년엔 산 TV의 품질 보증서는 왜 아직 그 안에 있었을까?
결국 운전 면허증과 크레딧 카드 한 장,
그리고 내 명함 몇 장을 제외 하고는 전부 서랍 속에 넣어 버렸다.
이제 내 지갑은 여성잡지 두께에서
3.5인치 플로피 디스켓 정도의 두께 정도로 줄어 버렸다.
뒷주머니에 그렇게 비어버린 지갑을 넣어 보니
있는 듯 없는 듯 구분이 가지 않는다.
속 썩이던 사랑니를 빼어 낸 것이 시원하기도 하고
어쩐지 내가 무욕을 실현한 근사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도 든다.
비단 지갑 하나에서만도 그렇게 불필요한 것이 많은데
집안을 뒤져 보면 어떨까?
아침에 신문을 가지러 가다 차고를 들여다보았다.
무엇을 만들다 만 목제 조각이나
품질 보증 기간이 지나버린 고장 난 스쿠터와
이미 아이들에겐 맞지도 않는 어린이 헬멧과
유아용 카시트, 카펫 조각, 구멍 난 축구공 등등,
버리자니 아깝고 두자니 귀찮은 물건으로 가득이다.
이런 모든 물건들은 사실 지난번 이사 할 때,
대부분의 짐을 버리고 왔을 때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함께 따라 온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버리거나 줄이는 버릇을 배우지 못하면
물건이 사람의 주인이 되고 만다.
어제 아내는 둘째아들놈 친구인 롸스라는 아이의 생일 파티에 다녀왔다.
외아들인 롸스는 자기 집이 무섭다는 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와 단 세 명이 사는 롸스 집은 3층엔 테니스 코드가 있고
층층마다 서재와 놀이방, 휴게실, 게임룸이 따로 있는 대 저택이다.
말 그대로 집안에서 잊어 버려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혹시 집안에 볼링장이나 야구장은 없었나 궁금했다.
세 명의 가족이 살기엔 터무니없는 욕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렇게 많은 소유가 정말 필요한가 생각해 본다.
테레사 수녀는 평생에 가방 하나가 전 재산 이였다는 말이 있다.
삼일 동안 휴가를 가는데도 트렁크가 가득 차야 하는 우리 모습이
조금씩 부끄러워진다.
버리자니 아깝고 두자니 귀찮은 것은 지갑 속이나
차고 속에만 들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도 마찬가지다.
첫사랑에 대한 지나친 동경,
옛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착,
출신지역이나 학맥에 따른 부당한 의리,
변화와 지조를 구분 못하는 어리석음,
다른 사람들의 취향에 대한 몰상식적인 거부감,
배우자에 대한 공개적인 혹평,
균형 감각이 없는 배타적 종교관 등등
우리는 한번쯤 정리 하거나 버려야 할 문제들을
해마다 가슴 속에 넣어가며 늙어가는 것이다.
새해가 벌써 2월로 접어들어 중순이 되어 간다.
뒷주머니에 지갑을 가볍게 하고 보니,
무엇보다도 뒷주머니가 쳐지지 않아 엉덩이도 맵시가 나는 듯 하다.
혼자 거울로 뒷모습을 보면서
박진영처럼 두 손으로 엉덩이를 훑어 올려 보았다.
훨씬 괜찮은 것 같다.
아마 차고 속에 있는 물건들을 다 같다 버리면
훨씬 차고가 단정하고 차가 들락거리는데도 편할 것이다.
그렇듯, 마음속에 불필요한 감정이나 편견들도 같다 버리면
훨씬 마음이 단정하고 천국을 들락거리는데도 편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최소한 엉덩이처럼 마음도 예뻐지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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