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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남북관계에선 지원이가 큰일 했지"

안동일의 '태평양을 두번 건넌 사람들' <1> 박지원(4)

이 글을 연재하면서 필자는 적지 않게 당황해야 했다는 것을 꼭 밝혀 두고 싶다. 당초 생각에는 다른 어떤 사람도 쓸 수 없는 글이기에 필자가 써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까지도 있었지만 연재가 시작되면서 쏟아지는 비난과 의혹의 눈초리는 그런 생각을 무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박지원씨에 대한 세상의 원성이 많은지, 필자가 모르는 엄청난 잘못과 부정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혼란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필자의 당초 집필 의도를 꺾을만한 구체적인 반론이나 증거제시
는 접하지 못했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가 달걀 같이 생긴 것도 못마땅한 법이라고 했던가, 웬지 그런 비유가 생각난다.

많은 의미에서 이 글은 박지원씨에 대한 본격적이며 종합적인 평가물은 아니다. 필자 또한 많은 이유에서 앞으로 박씨에 대한 냉철한 평가와 근거 있는 비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조목조목 구체적인 증거나 정황을 들이대면서 잘잘못을 따진다면 누가 이를 부정하고 다른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설혹 필자와는 또 다른 각도에서 그의 잘못, 그의 부정, 그가 끼친 해악과 그 파급이며 개선책을 제시하는 논거가 있다면 귀를 씻고 경청하련다.

박지원씨가 최고 통치자 대통령의 최측근이었기에 국민의 정부 5년의 평가에 있어 그 책임의 일단이 있다고 쓴 바 있다. 국민의 정부 탄생을 불러온 DJP연합도 그의 건의에서 비롯됐다고 쓴 전호의 내용을 놓고도 견해를 달리 하는 지적이 있어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 그 부분까지 포함한다면 더 책임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역사의 평가란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세상인심이란 그리고 여론이란 변화무쌍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이제 막 끝난 DJ정부 5년을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특히 지금처럼 입 가진 사람마다 지난 5년의 평가에 인색한 점수를 주는 상황에서 제대로 평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조차 하다.

IMF 구제금융의 환란 속에서 어렵사리 평화적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국민의 정부는 처음부터 이른바 거대야당의 발목 잡기에 시달리면서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진 모양새로 정국을 운영해야 했다.

야당은 국무총리의 인준을 거부했고 정권 쪽은 세풍과 총풍을 들이대며 야당을 압박했기에 양보 없는 대치국면이 계속 됐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이같은 여야의 대치 국면은 5년 내내 계속 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한때 상생의 정치다 청와대 영수회담이다 해서 유화의 국면이 보이는 듯도 했지만, 99년의 야당 의원 빼오기 등으로 다시 필사의 대치 상황이 재연 됐고 2000년 역사적인 6.15선언도 이후의 서해교전이며 이런저런 상황변화며 돌발사태 등으로 그 의미와 감격이 퇴색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 지뢰밭의 지뢰처럼 터져나온 각종 게이트며 의혹 사건으로 정권은 일찍부터 말기증세를 보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

이런 점에서 대통령이 처음부터 여유 있는 자세로 야당 아우르기를 시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이쉬움이 남는다고 말하는 이들도 꽤 있다. 그런 아우르기 유화 정책으로 나갔다면 국면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조언을 하지 못한 참모들의 책임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박씨에게 곱지않은 시선을 던지고 있는 여권의 인사들은 박씨가 대통령의 지근거리에 있으면서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렸고 이런 조언과 고언의 언로를 막은 장본인이라고 얘기한다. 요즘 신주류 개혁파의 중심인물로 꼽히는 천정배의원 같이 명철하고 조신하다 알려진 이도 지난 2001년 5월에 이런 말은 한 기록이 있다.

"박 전 수석은 현 정권 내내 요직에 앉아서 실세 역할을 해왔다. 이 부분은 본인도 인정할 것이다. 당 대표와 청와대 비서실장의 명운을 쥐락펴락하는 사람이 깃털이라는 말은 못할 것이다. 나는 당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런 사실을 느끼고 실감했다. 한마디로 대통령의 심복이 아닌가. 우리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그 판단을 신뢰하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쇄신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정국을 운영하는 데 정보에 의존하기보다 믿을 만한 세력을 신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2001. 5.31 민주당 워크샾에서)

그 무렵 김근태 의원도 박지원씨를 직접 거명 하지는 않았지만 동교동계 해체를 주장하면서 '권력의 사유화' 현상을 지적했었다. 김 의원은 동교동계가 정권교체에는 기여했지만 그 후 인사에 영향을 미치고 문제를 일으키면서 현 정부를 최악의 상태로 만든 최악의 원인을 제공했다면서, 당, 정부, 청와대의 핵심세력에 의한 '권력의 사유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들은 인사쇄신과 미래지향적인 대안 제시를 외면함으로써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의 화살을 날렸었다.

시간상으로는 몇 개월이 흐른 뒤이기는 했지만 같은 맥락에서 이른바 쇄신파동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정동영의원은 "당과 청와대 운영의 중심질서는 '권-박'(권노갑-박지원)이었다"며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론, "이들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고 비판, 결국 박지원씨의 두 번째 낙마를 가져오게 했다.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회의 석상에서 터져 나왔던 정 의원의 직격탄은 박 수석이 아닌 권노갑 고문을 더 겨냥하고 있었지만 박씨에게도 적용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 였기에 그 논지를 옮겨본다.

"권 전 고문이 정말 자연인이었다면 욕 얻어먹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민심은 당이 잘못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 이유가 당 대표나 사무총장에게 있나. 그들은 당의 실세가 아니다. 들러리에 불과하다. 국민이 권 전 고문은 싫다는데 어떡할 것인가. 법적 책임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표 안 찍어주는 사람을 앞세우고 어떻게 표를 달라고 얘기할 수 있나. 불량식품을 판매하다가 들켰다고 치자. 그런데 그게 특별히 몸에 해롭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계속 팔도록 내버려둬야 하나. 누가 대통령을 만드는가. '권-박'이 아니라 유권자인 것이다."

이런 당시의 민주당의 쇄신파동은 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와 박지원 전 수석의 사퇴로 일단락 되기는 했었다. 하지만 쇄신대상의 1순위로 지목된 권 전 고문은 외유 등을 비롯한 2선 퇴진 요구를 사실상 거부했기에 겉으로만 보면 쇄신파로서는 '절반의 성공'은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던 상황이 전개됐었다.

'권-박' 이라해서 같은 묶음으로 평가받고 비판받는다는 것이 박씨로 보면 억울한 측면도 있었겟지만 엉뚱한 예단만은 아닌 듯 싶다.

박지원씨는 늦게 입문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동교동계로 분류됐고 자신 스스로도 동교동계의 일원이라고 자처했었는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좌장인 권노갑 전 고문과는 각별하게 지냈던 모양이다.

잘 나가던(?) 권노갑씨가 뉴저지의 페얼리 딕킨슨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때 이를 주선했고 권씨의 미국내 일정을 안내했던 인물이 공교롭게도 필자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 친구의 말로도 권씨는 당시 자주 한국과 통화를 했는데 박씨와의 통화가 가장 많았는데 통화시 이쪽의 얘기만 간헐적으로 듣는 그로서도 두 사람이 '실세'라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정국과 관련된 사안이며 개인 잡사에 이르기까지 아주 절친한 대화가 오갔는데 한번은 "박수석 당신, 요즘 너무 술 많이 먹는다고 그러던데 몸 좀 아껴, 그리고 술자리에서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말고" 하는 소리를 들었단다. 이 말을 전하면서 친구는 필자에게 우리끼리 쓰는 표현으로 박씨가 권고문에게 한참 '깨지는' 것 같더라는 말을 했었다.

그때가 쇄신파동 직전인데 이를 보면 당시에도 박씨가 동교동계 내에서조차 월권전횡을 했다는 표현은 그리 맞지 않은 것 같다.

하긴 아무리 주군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신진기예라 하더라도 주군과 신산을 같이 하면서 온같 고초를 겪어오면서 계파를 이끌고 있는 좌장을 배척하고 무시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자신이 속한 그 계파가 바람직한 역할을 맡고 잘 나갈 수 있도록 융화며 바람직한 적재적소의 참여에도 신경을 썼어야 했을 텐데, 그런 측면에서 박씨의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랬기에 동교동계 계파 내에서도 박씨를 경원하는 소리가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당시 대다수 쇄신파 의원들이 공감하고 있는 당내 민주화 과제는 결국 '1인 지배 정당구조의 혁신'으로 요약된다. 특히 '그동안 보스 1인이 전권을 행사해온 공천권을 당원에게 돌려주자'는 주장이 폭넓은 공감대를 얻었다고 운위되면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한국정치의 문제점으로 지적해온 '1인 보스정치'와 '계보정치'를 청산하지는 것이 그 요체였다.

박씨의 문제도 바로 1인 보스 정치의 문제와도 직결된다는 것이 필자 논지의 중심이다. 박씨가 욕을 먹는 근원적인 이유가 개인의 잘못 보다는 보스정치의 수혜자라는 구조상의 문제에서 기인하는게 아니냐는 것이다. 어찌보면 당시 한국 정치사의 가장 '오래된 보스'인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직을 사퇴한 그때의 상황이 이런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음에도 결과는 그리 흡족하지 못했고 그 불씨는 그대로 온존해 있는 채 지금도 막 연기만을 무럭무럭 피우고 있는 그런 형국이다.

전권을 휘두르는 1인 보스는 결코 자신의 지위를 넘보거나 위협하는 존재를 용인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씨는 결코 보스인 DJ를 위협하고 거슬르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위협과 거슬림을 온몸을 던져 막아내고 분쇄하려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충신이었다. 그러니 DJ도 그를 7번이나 불렀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사람들은 5년 집권의 치적으로 6.15공동 선언을 가져왔던 대북 관계 개선과 IMF의 극복, 이례적인 경제성장을 꼽고 있지만 야당에서는 이마저도 많은 문제가 있다고 파악하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고 기회 있을 때마다 딴죽을 걸었으며 급기야는 특별검사 까지도 임명하게 만든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어차피 박씨에 대한 특검의 소환 조사는 정해진 수순 아닌가. 일단 지금의 상황에서 그에게 쏠리는 의혹은 6.15선언과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성사시킨 최초의 접촉이었다는 2000년 4월의 북한 송호경씨와의 말레지아 접촉에서 뒷거래가 없었는지와 그후 현대를 통한 북한 송금에서의 역할, 산업은행등 금융기관에 대한 외압의 여부 등으로 요약된다. 지금으로선 특검이 다소 맥이 빠져 있는 듯 보이지만 박씨 소환이 전면으로 부상하면 관심과 긴장이 고조될 것이다.

박씨는 자신에게서 새로 나올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자신있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데 앞으로 그의 입을 통해 어떤 얘기들이 다시 나오게 될지 그리고 어떤 태도를 보일지 궁금한 상황이다. 필자로서는 그가 다는 못하겠지만 당당하게 할말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지니고 있다.

뉴욕 동포사회에서도 박지원씨에 대한 평판이나 평가가 엇갈리는 게 사실이다. 프레시안에 글이 연재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표시해 왔는데 그를 잘 몰랐던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면서 비교적 좋은 반응을 보인 데 반해, 그와 절친했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대부분 상당히 흥분하면서 필자가 너무 호의적으로 묘사를 한다고 볼멘 소리를 던졌다.

얼마 전에 필자도 잘 아는 뉴욕의 한 후배 언론인이 뉴욕 동포 주간지에 그에 대한 기사를 쓴 바 있다. 뉴욕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에 대한 기사였는데, 몇 군데 거친 주관적 예단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이곳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는 기사다.

그 역시 일부에서는 박지원씨를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한 사람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박씨와 비교적 잘 아는 사이라 알려진 뉴욕한인사회 여론주도층들은 서울서 출세했다는 뉴욕출신 박지원에게 넉넉한 점수를 주지 않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개구리가 올챙이 쩍 시절 모른다고 잘 만나 주지도 않을뿐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박씨 정도쯤 되면 쉽게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뉴욕한인사회 단체 중에 가장 큰 규모의 한 직능단체의 한사람은 모 방송국의 대형음악 공개방송 프로그램을 유치하려 당시 문화관광부장관이었던 박씨를 직접 만나 얘기를 했더니 한 마디로 도움 요청을 거절했던 것에 마음이 단단히 상해 있었다. 다른 한 인사는 박씨가 청와대 대변인 할 때 서울 가서 호텔에서 1주일 머물면서 매일 전화를 했는데 연락을 안 해줬으며 나중에는 비서가 "뉴욕에서 오셨으면 전화를 안 하는 것이 박대변인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해서 그 다음부터는 기분이 나빠 전화도 안 했다는 술회를 적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뉴욕서는 박 전실장과 호형호제했던 막역한 사이로 박씨가 한인회장에 나섰을 때 발벗고 뛰었던 과거의 연을 생각할 때 그럴 수 없다는 얘기였다. 또다른 박씨의 지인 한사람은 박씨 때문에 화가 나서 지난번 대선 때 이회창 지지자로 돌아섰다는 얘기까지 적고 있다.

필자도 최근에 박씨에 대해 남다른 감회가 있다는 원로급 인사 두 사람에게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태권도 사범, 체육인들이었는데 한사람은 이곳 뉴욕서는 박지원씨 때문에 고국에서 잠시이기는 했지만 옥고까지 치뤘다고 알려진 인물이었고, 한 사람은 누구보다 박씨에 대해 좋지 않은 소리를 하고 다닌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앞의 옥고까지 치뤘다는 사범은 필자와의 통화에서 의외로 박씨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좋은 얘기를 해줬다.
"지원이 그 친구 똑똑한 친굽니다. 나라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했지만 명문대학을 못나오고 너무 빨리 출세하다보니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듣는데 부지런하게 자신을 가꾼 사람입니다. 안기자, 이왕 쓰려면 잘 써줘요. 뉴욕이 낳은 인물입니다. 앞으로도 뉴욕 동포 중에 그만한 일 할 사람 흔치 않을 겁니다. 특히 남북관계에 있어 지원이가 큰 일 한 겁니다."

감옥 얘기를 넌즈시 꺼냈을 때 그는 그 사건은 박씨와는 전혀 상관없고 자신이 실수한 일일 뿐 이라고 전혀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필자가 듣기에는 사건은 변호사법 위반이었다는데 박씨가 청와대 공보수석이던 시절 워낙 절친하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박씨의 이름을 업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이권에 개입하려 했다 큰 코를 다쳤고 박씨가 충분히 무마해 줄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더 앞장서 그가 구속되기까지 했기에 그는 박씨에 대해 '이를 갈고 있다'는 풍설이 퍼져 있었던 터였다.

다른 한 사범은 반대로 박씨 이름을 거론하자 흥분을 하면서 "그 친구 아주 싸가지 없는 친구"라고 대뜸 욕을 하는 것이었다. 그 사범은 김대중씨가 미국에 있을 때 특히 뉴욕에 오면 언제라도 자신의 대형 세단을 몰고 나가 김대중씨의 운전기사, 호위역을 자랑스럽게 자청해서 맡았던 인물이다.

30년 가까운 태권도장 운영으로 두 사람 다 경제적으로는 꽤 윤택한 편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들로 그들이 DJ를 지지하고 따르는 데 있어 무슨 대가나 이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필자도 여기고 있는 바다. 뒤의 사범님은 무척이나 흥분해서 박지원씨에 대한 섭섭함을 장황하게 얘기하는 통에 꽤 통화가 길어졌지만 특별한 사건이나 박씨의 부정에 대한 공분은 없었고 그토록 따랐던 DJ가 집권을 했고 또 친구인 박씨가 출세를 했다기에 반갑고 흥분된 마음에 서울에 나갔는데 과거의 정리로 보아 따뜻하게 대해 주었어야 마땅했는데도 '왜 나왔느냐'는 투로 힐난을 하면서 "너 언제 미국에 들어갈래" 하기 일쑤였던 것이 큰 마음에 상처를 받았던 모양이다.

다시 뉴욕 정기자의 글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뉴욕에는 박지원의 고향 사람들이 많다. 박지원의 고향은 전남 진도다. 박지원이 뉴욕에서 비즈니스 할 때 고향 사람들에게 참 잘했다고 소문이 나 있다. 박지원 회사에서는 고향사람이 찾아오면 그들에게 직장도 알선해주고 어렵게 산다면 생활비도 주곤 했다고 알려져 있다.맨하탄 브로드웨이에서 잡화상을 하는 진도사람의 말이다.
'우리 진도 사람들은 절대 서울가서 박실장에게 연락 안합니다. 우리가 연락을 안하는 것이 그 분을 돕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뉴욕서 한인회장하고 비즈니스 할 때와는 현재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뉴욕에서 함께 살았다고 이 사람 저 사람 서울 가서 연락하면 복잡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진도 사람만이라도 그 분을 힘들게 하지 말자고 약속했습니다. 이사람 저 사람 다 연락하면 어떻게 다 만나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해를 좀 해야지요.' ”

박씨의 처신은 공직자로서 공사를 구분하는 그런 처신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흥분하는 사람들은 원래 '박지원이가 그렇게 똑 부러지고 냉정한 사람이었으면 덜 섭섭했을 텐데 누구보다도 호탕하게 놀 줄 아는 의리의 사나이라고 생각했는데 태도가 돌변한 것에 참을 수 없었다'는 얘기로 종합된다. 뉴욕에서는 아직도 그가 뉴욕에 있을 때 모임이며 술자리에서 보였던 호방한 모습들을 전설처럼 회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와 잘 아는 한국 정치권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박지원이가 기자들한테는 참 잘합니다. 한마디로 언론 플레이에 선수입니다. 자신이 부지런하다는 이미지를 크게 각인시키고 트레이드 마크로 만든 것도 그런 언론 플레이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겠지만 지위가 높아지고 대통령의 신임이 더해진다고 여겨지면서 그의 태도가 교만해지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특히 과거의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경원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커졌던 것이 사실이죠."

한국 정치사에 있어 박지원씨의 등장과 그를 둘러싼 이런저런 논란은 그간의 한국 정치가 배태하고 있던 많은 문제점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며칠 전 인터넷을 서핑 하다 한국의 한 정치학자의 글을 보게 됐다. 경기대학
교 김재홍 교수의 글이었는데 한국정치, 정당사의 세대론이었다. 특별히 새로운 기발한 시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목요연하게 그간의 논의를 종합했다고 여겨지는 글이었다.

김 교수는 한국정치가 이제 '제4세대'를 맞고 있다고 했다. 해방후 정부수립을 거쳐 4.19혁명 시기까지를 1세대, 5.16 군사 쿠데타에 이어 12-12로 집권한 군부세력의 군사 문화적 권위주의 정당 세대를 2세대, 군사권위주의 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간정부가 들어선 이후를 제3세대 정당 정치로 보고 있는 것이다.

1세대가 독립운동 세대에 의한 좌우 이념을 중심변수로 하는 정당 구조로 출발했다면 2세대 군부 권위주의 시기에는 정당은 뜻이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정치 집단이라기보다는 권력자들의 필요에 따라 인위적으로 조직하면 된다는 비정상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 민주화투쟁 세대로 지칭되는 3세대의 시기에 정치를 위시한 사회 전반이 표면적으로는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루어졌다지만 실제 정당 내부에서는 1인 중심,
또는 당권파에 의한 과두지배 체제가 체질화됐고 이 때문에 3김정치 타파와 정당내부의 실질적 민주화가 정치개혁 과제라는 게 필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그의 결론이었다.

"이런 1, 2, 3세대 정당 리더들과는 질적으로 차별화 되는 신진세대의 무대가 2002 대통령선거였다. 후보 공천도 국민경선으로 이루어졌다. 그 뉴 리더들은 민주화 정착 세대로서 향후 시대적 과제들을 해결해 나갈 비전 제시를 요구받고 있다. 곧 제4세대 정당정치의 역사적 조류가 형성된 것이다. 또 2002 월드컵 당시의 붉은 악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인 팬클럽들 , 그리고 촛불 시위에서 보듯이 성숙한 시민문화가 제4세대 정당을 재촉하고 있다. 이런 정치적 세대 개념은 연령을 10년이나 20년 단위로 끊어서 나눈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사건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였느냐로 세대가 구획된다."

김교수는 제4세대 정당은 앞 세대와 다른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갈파하고 있다.

"첫째, 카리스마적 권력 독과점이 아니라 합리적인 분권과 민주성 확립이다. 1세대는 독립투사, 2세대는 쿠데타 주도자, 그리고 3세대는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졌던 지도자들로서 각기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졌다. 그러나 이제 4세대는 그런 권위를 오로지 국민 지지속에서 구해야 한다. 이것이 잘못될 경우 권위 쇠약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

둘째, 항구적 정책정당으로서 그 수명이 창당 지도자의 정치생명은 물론이려니와 자연적 수명보다 더 오래 가야 한다.

셋째,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시대 과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이 독창적이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이제 일단 글을 마쳐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한국정치사에 있어 박지원씨의 등장과 그의 영욕이 갖는 긍정적인 효과는 무엇이고 반대는 무엇일까?

필자와 박지원씨는 뉴욕 동포사회에 같이 살았던 인연, 한사람은 동포사회 유지로서 또 한사람은 동포 언론계의 기자로서 취재원과 취재자의 관계였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 지속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든지 어떤 활동을 같이 했던 그런 사이는 아니다.

당초의 집필 의도는 이미 밝힌 바대로 그를 통해 한국 정치와 정치사의 문제점을 조망해보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부침을 통해 내세울 것 없고 남다른 배경이 없는 청년들 특히 이곳 이민의 청년들에게 이민의 땅을 다시 박차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태평양을 두 번 건넌 그 일이 바람직하건 아니건 간에 개인의 노력과 흔히 말하는 '운 때'가 맞아떨어질 때 인생이 저렇게도 달라 질 수도 있는가 하는 희망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의도가 게재된 것은 사실이다.

그가 고국에 돌아가 활동하던 시절, 필자는 이곳 미국에 있었기에 보도된 기사라든지 주변의 이야기에 의존해 그 활동상이며 평가를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왜 그를 미화하고 영웅시하느냐는 비난을 해왔고 한국 정치권에 있는 한 선배는 "기자가 균형감각이 있어야지"하는 핀잔까지도 던져왔다. 20여년 '저 잘 난 멋'이라고 강한 자부심을 지녀왔던 필자에게는 너무도 혹독한 평가 아닌가.

필자도 정치인 혹은 지도자의 참모로서의 박지원씨의 역할과 부침이 고국의 정치발전이며 공직 분위기 전체를 생각할 때 크게 바람직한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충성과 헌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했던 봉건적 군신관계, 그때의 정치논리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민주적 절차와 기회균등이 강조되는 민주정치의 측면에서 보자면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우리 옆집 아저씨' 였던 박지원씨의 생애에서 나는 어떤 감동을 느낀다. 그러면서 어느 독자도 댓글에서 말했듯이 새 시대에서는 새로운 모습, 새로운 차원에서의 감동이 있어야 하겠다는 바람에 동의하고 있다. 지금은 그에게 큰 멍에로 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역사에서는 큰 발자취로 남겨지기를 필자도 바라는 대목이 바로 대북 밀사로서의 그의 역할이다.

분단시대 집권자들은 모두들 남북문제에 자신의 명운을 걸었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자신의 가장 충직한 막료를 밀사로 보낸다. 박정희-이후락, 전두환-장세동, 노태우-박철언, 그리고 김대중-박지원이었다. 모두들 유서를 써놓고 목숨을 걸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다고 술회하지만 각기 개성이 판이한 이 가운데 어떤 조합이 가장 큰 일을 해 냈는가. 역사가 반드시 평가할 것이다.

스케이프고우트(scapegoat)란 말이 있다. 웬일인지 우린 '속죄의 염소'라는 말보다 '희생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에 버려진 염소라는 뜻으로 남의 죄를 대신 지는 사람, 남의 죄 때문에 희생을 당하는 사람을 일컫고 있다.

실제 희생양(sacrificial lamb)이란 말이 따로 있기는 하다. 스케이프고우트와는 서로 약간 다른 개념으로 둘 다 성경이 기원이라는데, 이 두 말은 서양 사람들도 자주 헷갈려서 혼동해서 쓰는 것 같다. 앞의 희생양은 윤리적 선악의 개념보다는 신에게 정성을 바친다는 미학적 개념이 강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희생양을 얘기할 때는 스케이프고우트쪽이 더 가깝기에 그렇게 쓰이고 있다 여겨진다.

희생양 이야기는 심리학과 정치학에 고루 나오는데 유럽 출신으로 미국의 스탠포드에서 강의했던 지라드 르네가 이 희생양 이론을 정립한 학자로 꼽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치심리학에서 주로 '우파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정치선동' 기법이라며 유태인을 목표로 삼은 히틀러와 유색인종을 목표로 삼았던 미국내 극우파들을 예로 들어 이 이론을 정립했다.

다른 한쪽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는 대립하는 집단이나 세력이 자신들의 세력 판도의 재편이나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들 보다 약한 세력이나 개인을 암묵적인 동의 아래 집중공격해 제거하거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이목을 그쪽에 집중시키고 국면의 전환을 꾀하는 것이 스케이프고우트 기법이다.

지금 박지원씨가 처한 상황이 속죄의 염소와 비슿한 게 아닌가 싶다. 특검을 성사시킨 야당 쪽에서야 진작부터 그에 대한 공격으로 국민의 정부와 햇볕 정책을 싸잡아 공격하고 흠집을 내겠다는 전략을 세웠을 터이겠지만 상대적으로 박씨와 한편에 서야하는 여당 쪽에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박씨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져왔던 마당에 어느 정도의 희생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 또 그렇게 해야 새 정부의 입지가 편해지고 새 시대 새 정치구조를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국정치의 발전을 위해 꼭 희생양이 필요하다면 이번이 마지막 희생양이 됐으면 싶다. 그래서 그 위에 정말 한국정치가 환골탈태할 수 있다면 말이다. <박지원편 끝>

필자 안동일(뉴욕 라디오서울 k-tv 뉴스앵커, 재외동포신문 해외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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