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가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지금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한국에 '무역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사실상 '경제 전쟁'을 선언한 셈입니다. 현 상황은 매우 엄중합니다. 한일 관계에서 이른바 '1965년 체제'를 전환해야 할 시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 '1965년 체제'는 비단 한일 관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북아 질서와 한일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965년 체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차분히 되새겨봐야 합니다. 그 시작점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입니다.
김민웅 교수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일협정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을 문답형으로 정리했습니다. <프레시안>은 김 교수의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 글이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11) 거듭되는 이야기지만, 무얼 놓고 한일 양국 간에 재산처리나 배상처리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식민지 지배의 본질에 대한 자세가 결국 핵심일 수밖에 없네요.
그런 거지요. 일본의 입장에서는 불법으로 조성된 재산이라면 권리를 주장할 수 없지만, 적법한 재산이라면 반환청구가 가능한 거니까요. 이를 “역(逆)청구권”이라고 설명 드렸습니다만 이러한 일본의 자세는 1차 회담에서 3차 회담에 이르는 1952년 2월에서 1953년 10월의 기간 동안 일관해서 강조됩니다.
말하자면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라는 건 적법한 한일합병이고 그에 따른 적법한 재산취득이므로 “미군정의 재산몰수는 국제법 위반이다”, 이런 논리를 제기합니다. 3차 회담 때 문제가 되었던 구보타의 망언은 이런 논의의 연장선에서 나온 겁니다. 큰 틀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청구권 포기 조항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온 겁니다.
(11-1)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틀을 짠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이러한 주장이 불쾌하지 않았을까요?
그랬어야 마땅하겠지요. 그러나 이미 일본의 배상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정책이 서 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자체가 이 문제에 대해 읽기에 따라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한일 간에 “미국해석” 논쟁이 이렇게 벌어지는데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은 결국 입본의 편에 선 셈이 됩니다. “미국해석”이란 샌프란시스코 2조와 4조에 대해 미국은 어떤 유권해석을 내리는가의 논쟁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2조에서는 일본이 일체의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을 못 박고 있는데, 4조에서는 채무나 부동산 처리 등 일본과 관련 당국 사이에서 서로 재산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청구권 문제는 “별도로 합의”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별도 협의를 통해 우리는 일본에 대한 청구권 해결을 생각했던 것이지 우리에 대한 일본의 청구권 요구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자기들에게도 청구권이 있다고 나오는 바람에 회담은 꼬여가기 시작했습니다.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해놓고 재산문제분쟁은 별도로 협의하라?
(11-2)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바로 그 조항을 근거로 한일회담이 시작된 것 아닌가요? “일본은 청구권 포기가 명시되어 있다, 청구권 논의는 그러니까 한국의 권리가 중심이 된다, 일본이 청구할 건 없다”, 그렇게 이해하고 회담이 이루어진 거잖아요.
네, 그런 거지요. 헌데 일본의 논리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우선 미군정의 조선에서의 일본재산 처분 조처와 관련해서는 샌프란시스코 4조 b 항, “일본과 일본 국민 자산에 대해, 미군정의 지침이나 이에 준해서 제정된 처분권의 적법성을 인정한다.”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미군정의 처분권을 인정한 것이지 그 자산이 이양된 한국의 처분권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청구가 포기되기 어려운, 청구해야 할 항목이 생겼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모순이 됩니다. 미군정의 처분권을 승인했다면 그 처분의 결과가 그 자산, 흔히 적산(敵産)이라고 부른 재산의 귀속이 이미 한국에게 있게 되었는데 이걸 문제 삼을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러나 이걸 문제로 삼아 제기합니다. 일본이 말한 별도의 합의란 바로 이 자산의 처분에 대한 협의를 한국과 따로 해야 한다는 논지입니다. 청구권 포기의 영역 밖에 있는 자산처리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에 별도로 논의, 협의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청구권 포기의 틀에서 벗어나 자기들의 권리인 청구권, 즉 역청구권 논의의 틀을 짜는 논리입니다. 이미 받을 걸 받았으니 일본으로서는 줄 게 별로 없다는 전략으로 가는 길을 열고자 한 겁니다.
(11-3) 미국은 어떻게 대응했나요?
미국은 이런 일본의 논리를 일정하게 거들어 줍니다. 미군정이 일본 자산을 한국에 넘겨주었으니 한국의 대일청구권은 “어느 정도” 소멸 내지 충족되었다는 점에서 서로 주고받을 걸 계산해서 청구작업에 고려하라는 이른바 “상쇄론(相殺論)”이 나오게 된 겁니다. 한국과 일본의 “상호포기”를 종용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공평한 논법인 듯 하지만 누가 손해인지는 너무나 분명한 논리입니다.
“일본은 이미 대한 청구권을 포기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일본 자산을 미군정을 통해 취득했다, 그러니 대일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해도 그 액수는 삭감하라”는 이야기가 되는 거지요. 여기에 힘입은 일본은 배상요구조서에서 한국이 요구한 “일본에 있는 조선에 귀속되어야 할 자산”은 미군정 지침이 일본에 효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로 자의로 그 자산을 처분해버리고 맙니다.
1956년에 내린 조선은행 일본재산의 폐쇄처분이라고 하는 이 조처는 대일청구권의 핵심부분을 허공에 날려버리는 처사였습니다. 조선은행 일본의 도쿄지점의 잔여자산 60억엔 가운데 47억엔 정도를 일본정부의 국고에 귀속시켜버린 것입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에게 돌아가야 할 재산을 일본이 마음대로 처분한 셈입니다.
게다가 일본은 1945년 8월 25일 조선은행 본점 소유의 등록국채 약 45억엔을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넘겼는데, 이건 조선은행으로서는 보증준비금의 역할을 하는 건데 그걸 빼돌린 거니 조선은행은 발행담보 능력에 심각한 훼손을 입은 것이었습니다.
▲ 195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식.
(11-4) 오, 그런 일까지 있었군요. 한일회담의 내용은 알면 알수록 상상하지도 못한 내용과 논리, 그리고 논쟁이 있었군요. 결국 일본의 주장이라는 건 “자세히 따지고 보면 일본이 도리어 재산 반환에 대한 문제를 협의하고 청구할 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청구를 포기한 마당에, 한국도 그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하라”는 거군요. 그러나 그 재산의 본질이 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36년간 식민지 지배의 착취와 강탈의 결과로 조성된 재산에 대해 어떻게 일본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그에 더하여 이 문제를 협의할 자격이나 권리가 있는가, 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일본인들의 “사유재산몰수” 문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국가재산의 경우 공유와 국유라는 점에서 점령군인 미군정의 처분에 이의가 없으나, 사유재산의 경우에는 해당 개인에게 청구의 권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주장입니다.
(11-5) 네? 이건 또 뭔가요? 뭐가 이리도 복잡하지요?
서로 적대적이었던 관계를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법 논리는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은 일종의 전시(戰時) 국제법이라고 할 수 있는 “헤이그 육전법규(陸戰法規/Hague Regulation Land Warfare)” 제46조에 의거해서 “사유재산은 몰수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폅니다. 미군정의 일본자산 몰수 내용 가운데 사유재산 부문을 분리시키려고 했습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제2항이 규정한 사유재산탈취금지도 그 근거로 들어서 그건 내놓으라고 한 겁니다.
일본이 이런 주장을 한 이면에는 패전 이후 일본으로 귀환한 일본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걸 다 감당한다는 것은 재정적으로 엄청난 일이 되는 것이기도 했구요.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국내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최전선에서 타민족을 착취하고 수탈한 자들에게 무슨 보상이냐, 라는 반제(反帝)진영의 반론도 나왔습니다.
(11-6) 하지만 “일본인들의 사유재산몰수 또는 박탈은 문제가 있다”라는 논리는 반박이 쉽지 않았던 건 아닌가요?
아니죠. 그 사유재산의 형성과정에 대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입장은 확고했습니다. 일본에 의한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는 그 자체가 불법이고 원천적으로 무효이기 때문에, 이런 불법적 토대에 기초한 한국 내 일본인 재산의 법적 효력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미군정의 몰수도 그 효력을 인정한 이상, 그 어떤 재산에 대한 권리도 이미 소멸했다고 반박했습니다.
결국 배상문제처리는 일본이라는 국가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의 문제 처리가 아니라,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절차 안에 들어 있는 사안이라는 인식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조성하고 가진 재산은 모두 조선 사람들의 피로 만들어진 이른바 “응혈체(凝血体)”라는 생각이 있었던 거지요. 그러니 해방된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일본인의 사유재산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던 것입니다.
1956년 12월, 일본은 마침내 대한(對韓) 청구권 포기를 밝힙니다. 이로써 제4차 한일회담(1958년 4월 15일~1960년 4월 15일)이 가능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청구권을 중심으로 한 협상에서 경제협력과 지원이라는 개념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ーお互いに敵対的であった関係を変えるために必要な法の論理は熾烈になるしかないのです。日本は一種の戦時国際法という「ヘイク陸戦法規(Hague Regulation Land Warfare )」第46条に依拠して「私有財産は没収できない」と主張を広げます。米軍政の日本資産没収内容の中に私有財産部分を分離させようとしました。1948年世界人権宣言第2項が規定した私有財産奪取禁止もそれを根拠に掲げ、それを出すように言ったのです。
미국 진보사학의 메카인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동화독법>, <잡설>, <보이지 않는 식민지> 등 다수의 책을 쓰고 번역
했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국제·사회 이슈에 대한 연재를 꾸준히 진행해 온 프레시안 대표 필자 중 하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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