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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역사를 보면, 한국 정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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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역사를 보면, 한국 정치가 보인다

[프레시안books] 장석준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진보정당의 꿈은 의회에 진입하면 퇴색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개혁과 혁명 혹은 당면 과제와 장기적 목표 사이에서 진보정당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가운데 나오는 위와 같은 질문은 진보정치의 오랜 난제다. 선거제 개혁이 논의되고 있는 요즘 이 난제는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정해진 답은 없다. 정립된 이론도 없다. 정치는 사람의 이해가 부딪치는 일이고, 상대가 있는 일이다. 매뉴얼을 기대하기 어렵다.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앞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참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석준의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서해문집 펴냄)는 요긴한 책이다. 저자는 역사를 네 시기로 나눠 각 시기의 주요 진보정당을 설명한다. 1부는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다. 2부는 전간기를 다룬다. 3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20세기다. 4부에서는 21세기의 실험을 소개한다.

그렇다고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가 타국의 진보정당을 나열하고 소개하는 책만은 아니다. 저자는 16개로 이뤄진 각 장의 앞머리를 왜 이 진보정당을 소개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시작한다. 미국 사회당을 다룰 때는 '왜 미국에 사회주의정당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아옌데 시기 칠레의 진보정당을 다룰 때는 '그들의 창의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꽤 자주 반복되는 문제의식이자 책 전체를 꿰뚫는 문제의식이 하나 있다. 바로 개혁과 혁명의 관계다.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또, 이는 꼭 진보정당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흔히 고민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이 책의 보다 보편적인 효용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진보정당의 역사를 장식한 수많은 논쟁들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는 세계 최초의 진보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 이야기로 시작한다. 개혁과 혁명에 대해 아마도 가장 유명한 논쟁을 벌인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해당 장의 주인공이다.

베른슈타인은 이 논쟁에서 개혁 편에 섰다. 그렇다고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 극복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의 목표 역시 사회주의였다. 다만, 자본주의의 붕괴와 그에 따른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전망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개혁적 조치를 쌓아가는 것뿐이다. 베른슈타인은 진보정당의 입법활동, 노동조합의 단체협상, 협동조합의 집단적 소비 확산 같은 운동이 곧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말했다.

로자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가 개혁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로자는 개혁만이 사회주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과는 방점이 달랐다. 로자에게는 개혁 자체보다 어떤 개혁 투쟁이냐가 중요했다. 노동조합 투쟁이나 개혁 투쟁은 대중에게 경험을 제공해 혁명적 주체를 탄생시킬 때 의미가 있다. 로자가 굳이 혁명을 이야기한 것은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붕괴하는 시기에 혁명적 주체가 없다면 우리는 야만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를 보다 익숙한 이야기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한 해에 2000명이 넘는 사람이 산업재해로 죽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는 개혁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그 과정을 통해 이윤보다 생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늘려나갈 때 의미가 있다.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는 싸움 역시 이를 통해 비정규직 철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늘려갈 때 의미가 있다. 꼭 자본주의 붕괴나 혁명이 아니더라도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전히 귀기울여볼 만한 제언이다.

베른슈타인과 로자의 논쟁은 이후 진보정당의 역사에서 수도 없이 변주된다. 저자가 첫손에 꼽는 진보정치인인 프랑스 사회당의 장 조레스는 '혁명적 개혁주의'라는 명칭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식화하며 로자와 가까운 편에 섰다. 지구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복지국가를 만든 주역 중 한 명인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당면 개혁정책'과 '대안사회 건설' 사이에 만리장성을 긋는 전통적 개혁론에 끊임없이 비판하고 도전"했다. 이외에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서 개혁과 혁명에 대한 진보정당의 고민은 또다시 목격된다. 당장의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개혁과 혁명에 대한 역사적 논변을 소개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결론에서 "한국에서 진보정당운동에 어떤한 모색이나 도전이 필요할지 생각해보거나 토론하려는 분들을 염두에" 뒀다며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민주주의가 발전한 시대에 좌파정당은, 9할은 베른슈타인주의, 즉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혁노선의 틀 안에서만 마냥 머무르면 막상 개혁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좁은 의회정치 문법에 갇히면 일상의 세력균형을 바꾸는 실질적 힘인 대중행동과 유리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혁명만 부르짖는다고 하여 대안이 될 수는 없다. … 21세기 진보정당운동은 이 두 함정, 즉 '작은' 개혁들만 좇는 개혁정당과 '큰' 혁명만을 꿈꾸는 혁명정당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역설적으로, '큰' 개혁들과 '작은' 혁명들에 익숙한 정당이 되어야 한다."

그 자신이 진보신당 부대표, 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하는 등 진보정당 운동에 깊게 관여해 온 저자의 삶과 어울리는 저술 태도다.

"진보정당은 대기업과 관료기구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

이외에도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에는 어떤 정당이 진보정당인가에 대한 저자의 정의, 진보정당의 흥망성쇠와 그에 대한 분석,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의 바람직한 관계, 진보정당의 대중 기반을 확충하는 문제 등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의견이 수놓아져 있다.

역사를 크고 작은 명확한 문제의식에 따라 정리하되 기본적인 정보를 빠뜨리지 않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을 다루면서는 역사적 배경은 물론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진보정치인 베벨의 행보를 빼먹지 않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이론가를 중심으로 역사를 볼 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놓치기 쉬움을 경계한다. 프랑스 사회당을 다루면서는 장 조레스의 정치적 성장 과정은 물론 당시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진보정치인이 보수 정부에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하는 문제'를 둘러싼 이야기를 적었다.

끝으로, 일생을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하고, 이제 세계 진보정당의 역사를 다루는 책까지 쓴 저자의 진보정당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논쟁적인 문장을 소개한다.

"민중이 스스로 결정(자기 통치)하는 삶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대기업과 관료기구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 좌파정당만 한 무기는 아직 없다."

진보정당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꼽는 저자의 의견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이 때문에도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는 꼭 진보정당 활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일독할 만하다.

▲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2019, 장석준 지음, 서해문집 펴냄)

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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