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디자인과 인문학의 중요성**
무선 전화가 맨 처음 시연된 때가 언제였을까? 놀랍게도 70년 전에 미국의 통신회사인 벨 사가 세계 최초의 무선 전화를 시연해 보였다. 그렇다면 왜 지금에서야 휴대폰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기술적 어려움이 아니라, 그 기술을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이나 필요가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휴대폰만이 아니라 나일론, 알루미늄, 전기 자동차 등 모든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다. 첫째 하나의 기술 패러다임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과학 지식만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소비 능력 발전이 동반돼야 한다. 둘째 지배적인 기술 패러다임의 등장은 현재의 과학적 지식으로 실현 가능한 욕망이나 가치의 형식, 즉 '수요 디자인'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기술 혁신은 이렇게 디자인된 수요를 가장 낮은 비용에 가장 높은 성능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생산 방식을 설계하는 것이다. 이 자명한 사실을 굳이 거론하는 까닭은 기술을 소비하고, 그 방향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힘은 인문학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수요 디자인의 중요성은 기술 패러다임의 지배적인 설계(dominant architecture)를 결정짓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배적 설계란 기술적 지식과 잠재적 수요가 만나는 특정한 방식이며, 이에 따라 필요한 과학 지식, 장비, 산업 연관 구조가 결정된다.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한 기업의 기술이 해당 산업 내에서 지배적 설계로 받아들여지면 해당 기업은 선발주자로서의 이익을 장기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고, 지배적 설계는 한 나라의 산업 구조를 좌우할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성이 핸드폰을 팔아서 버는 돈의 절반이 지배적 설계에 성공한 기업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퀄컴사에 지불하는 특허료만이 아니라 생산 및 검사 장비 구축 비용까지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우리나라가 모방을 통한 성장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고 선도하고자 한다면 과학기술적 지식 기반만이 아니라 수요 디자인의 중요성, 그것을 뒷받침하는 인문학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기술의 시스템적 특성과 기초과학의 중요성**
노벨상 수상자를 세 차례 이상 배출했던 벨 사의 기업 연구소가 보여주듯이 기업 연구소의 지식 시스템은 기초과학에서 엔지니어링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통합 시스템으로 구성되며, 얼핏 보면 무관할 듯싶은 다양한 학제적 지식들을 필요로 한다. 특히 기업의 지식 경쟁력은 관련된 지식을 조합, 구성하는 해당 기업의 고유한 방식, 그리고 상황의 변화에 따른 지식 설계의 유연성, 창조성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전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기초과학은 강한 학문내적 자기 완결성을 가지며 하나의 이론이 지배적인 이론으로 형성되고, 교육, 확산되기 위해서는 최소 15년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중간에 외부적인 개입이나 학문 연구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행이 어려워진다면 성장도 하기 전에 고사할 위험이 크다는 얘기다. 그래서 시장으로부터 독립된 기초과학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연성, 창조성이 곧 일관성, 자기충족성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깊으면 깊을수록 창조적이고 유연한 적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지식 특성으로 인해 시장으로부터 독립된 대학의 기초과학이야말로 기업의 기술 경쟁력을 위한 가장 확실하고, 풍부한 자원으로 역할하게 된다.
***개방을 통한 대학 혁신과 기초연구를 선도하는 대기업**
현재 우리나라의 기초과학, 더 나아가 대학 교육은 투입된 노력과 자원에 비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근원에는 학연과 인맥으로 얽혀진 폐쇄적인 학문 공동체가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자면, 정부가 야심 차게 계획한 BK21이 대학 간 연구자금 나눠먹기 방식으로 전락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 자금이 세계 10위권 내에 들어가는데도 지식 경쟁력 지수가 30위권을 맴도는 이유는 바로 경쟁 무풍지대인 폐쇄적 학문공동체의 존재 때문이다. 이 구조를 혁파하지 않고는 제 아무리 정부의 연구지원이 확충된다 해도 성과를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교수 임용 과정을 투명하게 만들고 교수 임용 시장을 세계 각국의 인재들에게 전면 개방하며,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 전 영역에서 세계적 학술지를 기준으로 삼는 피어리뷰를 임용 및 승급의 기준으로 제도화해야 한다. 특히 교육 시장이 개방되기 이전에 교수 시장을 개방해서 자체 경쟁력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장기적인 지식 기반을 육성하는 건 고사하고 개방의 거친 파고에 맞서 살아남을 학교가 몇몇 되지 않을 것이다. 외국인 교수 영입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의지만 있다면 쉽게 실행 가능한 방안이다.
둘째 우리가 정말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의 주도적 주체로 나서고자 한다면 대기업 연구소들부터 혁명적 체질 개선을 시작해야 한다. 세계 유수의 기업 연구소들처럼 자체 내 기초과학 역량을 구축하고 근본 기술 혁신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해 과학이론-기술혁신을 잇는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 대학에게 맞춤형 인재를 요구하기 이전에 대기업에서 먼저 훌륭한 과학도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기초과학 역량을 필요로 하는 기술혁신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 정작 첨단 근본 혁신을 앞장서 선도해야 할 기업들이 기초 연구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기술지식에 대한 시장 수요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과연 그 누가 해당 분야의 지식 창조에 전념할 수 있을까? 미국의 경우 근본 기술 혁신이 성공했던 배후에는 기업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세기의 발명들뿐만 아니라, 대기업이 먼저 나서 대학에 연구 지원자금을 제공하고 새로운 분과 학문를 창설했던 선구적 기업가 정신이 존재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학에서의 지식 형성과 지식이전**
공학의 영역은 이론 실험으로부터 얻어진 지식으로 새로운 기능의 제품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비용은 낮추고 성능은 높이는 신공정을 개발하는 것, 그리고 생산 장비를 조작 및 운용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육성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넓고 다양하다. 특히 새로운 대안 패러다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론과학과 실험과학 분야의 장비나 도구의 발전이 갖는 의미는 너무나 크다. 실험과학 분야에서 얻어진 지식, 실험 장비는 새로운 이론에 기반을 둔 생산 장비나 시설의 원형을 이루며, 계측, 통제, 검사, 응용 등 해당 기술 패러다임의 기술적 인프라를 구성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나노기술이나 생명공학 분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장비 한 대당 최소 수 억원에 이르는 첨단 장비 및 기기를 생산하는 기업들은 대안 패러다임이 등장하는 초기에 대학에서 산업으로 지식이 이전되는 길목의 첨병이며 견인차이다. 공학의 또 다른 한 영역인 문제 해결 및 응용 개발의 경우는 이미 성숙된 기술 패러다임의 틀 내에서 이루어진다. 대개 이런 분야의 연구는 벤처창업, 기업수주에 의한 계약형 연구, 혹은 특허 출원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산학 간 지식-기술이전의 성공여부는 상대 기업의 경영전략에 맞게 이전되는 기술을 바꾸는 맞춤형 전환이 얼마나 빠르고 효과적으로 진행되는지, 기술이전에서 제품개발 전 과정에 이르는 밀착지원이 가능한지 여부에 의해 판가름 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지식기반을 형성하는 것과 지식이전을 활성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논리와 차원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장비나 도구를 새롭게 개발하는 것, 혹은 다양한 신기술이 집적된 대규모 프로젝트는 공학지식의 첨단이자 그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지식 형성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개입이 필수적이며, 해당 기술을 산업에 전파, 기술 혁신 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 지원 역시 동반되어야 한다. 이에 반해 생산 공정의 문제해결이나 응용개발, 조작 및 운용의 경우는 지식의 이전 및 확산과 관련된다. 그리고 지식의 이전과 확산은 기술지식 형성의 영역이 아니라 비즈니스의 영역이며, 정부가 아니라 민간 기술시장이 감당해야 할 영역이다.
***지식형성의 배후, 아시아 기술시장 개척**
현재 우리나라에 기술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광범위한 기술시장이 없다는 것은 공학의 발전, 혁신능력을 자극할 유인기제가 정부 지원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가 나서서 '기업 근접지원형 교육연구 기관의 구조전환'을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악화 시킬 가능성이 높다. 근접형 지원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시장구조의 불균형을 해결하고, 그 결과 시장으로부터 기술혁신에 대한 수요가 크게 성장해야 하는데, 현재의 시장구조는 이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시장구조 전환은 대기업에게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과, 중소기업들에게는 새롭게 등장하는 틈새시장을 노리거나 대기업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기술혁신을 통해 신흥강자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국내의 시장구조를 변화시키려면 몇몇 중요한 영역에서 근본 및 중범위 기술혁신 역량이 존재해야 한다. 이런 기술적 기반이 없다면 슘페터적 혁신적 기업가가 나올 수 없다. 하지만 근본기술 혁신을 이뤄내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자금, 유인동기가 산업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면, 기술지식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힘들다. 대안 패러다임을 만들어낼 기술혁신 역량 육성과 시장구조 전환이 마치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서로를 전제한다는 점이 바로 우리의 딜레마다.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기술시장, 특히 아시아 기술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출연연, 대학, 그리고 아시아 해외 기업을 잇는 근본-중범위 기술혁신 공동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그 성과를 국내적으로 확산시키는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게다가 7회 연재에서 볼 수 있겠지만, 아시아 기술시장 개척의 의미는 단지 이것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3T, 5T로 불리는 미래의 기술패러다임은 현재 형성 과정 중에 있다. 이는 곧 누구도 미래의 패러다임에 대해 지배적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시아권 기술시장을 개척해야 할 필요,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아시아 기술 시장 개척의 구체적인 방법론이지만 해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지식이전을 위한 컨설팅 서비스 육성**
실리콘 밸리나 케임브리지 밸리의 신화는 우수한 대학의 존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법률 및 행정적 지원은 물론이고 각종 기술경영 컨설팅 서비스가 있었기에 가능한 신화이다. 특히 근본 및 중범위 기술혁신은 리스크가 아니라 근본적 불확실성이 지배한다. 더구나 시장은 기술적 우위가 아니라 비용 대 효용을 기준으로 기술혁신의 성패를 결정한다. 이는 곧 기술혁신을 촉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분담하고 비용대비 효용의 관점에서 기술을 설계할 수 있는 경영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거의 전적으로 정부가 나서서 기술가치 평가 혹은 기술 수요조사 등을 떠맡고 있는데, 이는 위험분담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연관정보나 지식은 주체의 위치, 상황, 관점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효율적인 것이다. 정부는 전략적 설계기능에 집중하고, 시장에 맡겨야 할 영역들은 과감히 민간으로 이양하는 것이 장기적 경쟁력 확보의 지름길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는 과학기술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부터 기술경영 전문 컨설팅 기관의 연구보고서를 참고할 만큼 컨설팅 서비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들 기관에서 제출하는 보고서들은 기타 여러 국가들의 국책연구기관이 정책입안을 할 때 교본으로 삼을 만큼 그 질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우리 역시 지금부터라도 주요 과학기술 정책입안, 국책투자 프로젝트 입안, 산·학·연 공동연구 프로그램이나 해외 기술시장 개척과정에서부터 민간 기술경영 컨설팅 역량을 육성, 지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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