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순례 5일째, 강줄기를 거슬러 오르다**
양산시내에 속하지만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양산시 명곡동의 다람쥐 수련원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산새소리 따라 아침준비가 시작되었다. 순례의 하루는 보통 새벽 5시 30분에 시작되어 7시까지 밥을 먹고 장비를 챙기고, 7시30분 무렵엔 모두 마당에 모여 가벼운 요가와 체조로 어제의 고단한 피로를 푼다. 그리고 출발이다. 바람과 햇살의 사랑 놀음같은 날씨 속에 출발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동네 주민들은 만날 수 없었다. 모내기를 하고 농사짓는 분들에게 가끔 인사를 드릴 뿐이었다. 농번기라 논이 있고 농지가 있는 곳은 어디나 분주하다. 양산시 일대엔 공단과 일부의 농촌이 공존하는 풍경이다.
<사진 1, 2> 아름다운 농촌 마을을 지난다. 논둑에는 토끼풀이, 논에는 모내기가 한창이다. 논둑 꽃길의 이슬을 털며, 논물 아래 순례단의 모습을 드리우며 아침을 연다.
천성산의 서쪽자락이자 양산시내에서 가까운 신기산성 숲을 한참 따라 걸었다. 사적 제97호로 삼국시대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어진 신기산성. 지금은 성의 구조물은 거의 없어졌으나 꼼꼼히 살펴보니 지형의 윤곽은 어렴풋이 그려졌다.
성 자락 둘레는 모두 산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나무와 활엽수림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숲길은 경사가 급하지 않고 등산로도 넉넉하여 숲의 고마움과 싱그러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을 수 있었다. 순례의 가장 큰 어려움이 현대화되고 산업화된 생활양식에 젖어있는 몸뚱어리의 이런저런 불평이라면, 가장 큰 기쁨 역시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오감을 열고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바쁜 도시생활의 일요일 아침풍경은 대부분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풍경일 것이다. 그 이른 시간에 햇살이 하늘을 가린 수목의 틈을 비집고 숲을 은은히 휘어 감는 푸른 빛깔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온몸이 전율하는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 3> 언제나 전형적인 농촌마을과 대조적으로 만나는 것은, 논길 둑길을 퍼내고 있는 포크레인과 새로 깔린 도로이다. 특히 계곡 상류부를 퍼내고 깎아내는 공사를 만날 때면 그 아래로 계곡은 흙탕물로 뒤덮히고 아름다웠던 계곡은 엄청난 소요를 겪는다.
<사진 4, 5> 어느 채석장을 지난다. 돌을 캐내고 그나마 이렇게 복원을 위한 흔적이라도 남겨놓는 경우는 양반이다. 그러나 그것도 평지형태의 채석장의 경우이지 절개사면이 급경사인 경우 조림을 하기도 어렵고 해도 금세 죽는다. 저 너머로 양수발전댐과 어제 만났던 60번 국도 도로건설 현장도 보인다.
<사진 6, 7> 채석장 절개사면을 넘어간다. 급경사에 낙석지대는 발에 이미 무리가 온 순례단에게 최악의 길이다.
<사진 8> 채석장을 벗어나면서 숲 입구에서 만난 개구리. 저 개구리도 아랫동네에서 쫒겨와 숨어있던 것인지 모른다.
신기산성을 뒤로 하고 양산시내의 공단을 거쳐 양산천으로 접어들었다. 양산천은 언양 근처에서 시작되어 통도사 산자락의 맑은 물과 도롱뇽의 고향, 천성산 내원사 계곡의 차고 시린 물줄기까지 모이고 모여 양산시내로 흘러든다. 시내 근처의 공단에서 나오는 일부 오폐수와 만나면서 힘겨운 어우러짐 끝에 부산 일대에서 낙동강 본류로 접어들게 된다. 양산천으로 접어들고부터는 천성산의 정상지역인 원효산 정상과 화엄늪의 일부가 선명하게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아쉬운 것은 2004년 3월 천성산 일대에서 일어난 산불로 산자락 일부가 아직도 거무튀튀한 빛깔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 때 산불 때문에 화엄늪도 일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고산초지 늪에서는 일 년이 지나자마자 거의 회복되었다.
양산천은 양산의 젖줄이자 천성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중요한 수원인 하천이다. 수달도 서식하고 다양한 물고기도 헤엄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들어 수질이 2급수로 떨어지고 각종 개발로 탁도가 높아져서 민물고기들의 생활터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점이다. 순례단이 양산천을 따라 가면서도 이런 모습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천관리를 위한다고 쌓아올린 둑으로 인해 거슬러 올라가던 물고기들이 둑에서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사진 9, 10, 11> 산막공단을 지난다. 마침 일요일이라 조용하다.
<사진 12, 13> 숲길을 지나 마을로 접어들면서 뚜렷해지는 건, 눈앞의 풍경만이 아니다. 도시 속에서는 잘 느낄 수 없었던 자동차 달리는 소리는 숲을 벗어나며 점점 더 큰 소음으로 들려온다. 경부고속도로 위를 지나며 근현대사를 연 속도의 역사에 대해 다시금 가늠해본다. 산길 잘라 고속도로 내고, 산을 뚫어 고속철 터널을 만들고, 또 속도의 역사는 얼마나 더 가속도를 향해 달려갈 것인가. '고속도'의 끝은 과연 있기는 한걸까.
건교부가 진행하는 치수 중심의 낡은 하천관리가 정작 하천의 주인인 물고기를 살아가기 힘들게 만드는 역설의 상황을 빚은 것이다. 정부에서 하고 있는 하천관리나 산지관리나 다 마찬가지다. 가장 생태적인 것이 인간에게도 가장 이로운 자연관리라는 점을 좀더 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천에서 물고기들이 살기 힘들다는 것은 인간에게도 결코 좋지 않으며 물고기들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드는 하천 유지관리가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함부로 댐을 건설하고 둑을 만들고, 수해정비라 하여 하천을 직선으로 만드는 '직강화', 제방을 무턱대고 설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사진 14, 15> 배후습지가 남아있는 하천을 지나는 순례단.
<사진 16, 17> 하천을 거슬러오자 강변정리가 되어 강변과 강둑은 시멘트 칠이다. 대형 아파트와 농장들이 들어서 있는 마을로부터 흘러나온 폐수에 오염되어 있다. 상류지역에서 정화 의지만 있다면 하류의 배후습지가 있는 한 얼마든지 깨끗한 하천으로 거듭날 여지가 있다.
자연의 흐름과 이치를 깨닫지 못한 채 직선으로 선을 긋고 무조건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발라버리는 하천관리는 언젠가 큰 화로 되돌아올 것이다. 지금도 정부는 홍수관리라는 이름으로 낙동강을 비롯하여 영산강, 금강 같은 강에 수백억에서 수천억 원을 들여 콘크리트를 쏟아 붓고 포크레인으로 하천을 갈아엎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 우리 냇가와 강은 무엇보다 수질개선을 하고, 생태 건강성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물고기들도 자유롭게 살아가고 좀더 맑은 물로 회복되어 후세들도 편안하게 하천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순례단이 하류에서부터 거슬러 오른 양산천 역시 자연의 하천이냐, 아니면 오염된 인공의 하천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듯 했다. 물론 아직도 낚시를 하고 우렁이를 줍는 주민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놓고 냇가에 손과 발을 담그고 편안히 잠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물 색깔도 탁하고 물에서 떠내려 오는 부유물질의 모습 역시 양산천의 상태가 서서히 마지막으로 가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양산천은 지금의 상태보다 훨씬 맑고 깨끗했다고 한다. 그런데 양산 일대에 밀어닥친 난개발로 인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둔치의 갈대를 비롯한 수생식물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하천의 자연원형이 일부나마 남아 있는 것은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 수생식물들은 오염원을 거르고 정화시켜주는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양산천을 따라 걸으면서 강과 산의 관계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삶도 함께 생각했다. 녹색순례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큰 의미는 글로 읽고 말로 들었던 천성산이 아니라 살아 꿈틀대는 천성산, 산에서 내려온 물이 굽이굽이 물결쳐 양산천을 이루는 모습을 직접 온몸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에 대해서 직접 답을 제시하지 못할 지라도 천성산을 온전하게 느끼고 알기 위해서는 두발로 걸으며 땀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천성산을 깊이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지율스님의 천성산 사랑도 수백 번 화엄늪을 오르고 무제치늪을 오가면서 생긴 것이니 말이다.
천성산을 알면 알수록 쉽게 산을 잘라내고 파내는 일에 동의하기 어려워진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 세세한 느낌과 감정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바로 천성산의 소리요, 자연의 소리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지율스님을 때로는 외고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율스님은 자신의 사랑을 가장 순수한 방법으로 지켜가는 분이다. 순례단도 인간만의 속도가 아닌 자연의 속도, 생명의 속도로 천성산을 밟으면서 점점 더 천성산의 소리에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 그 발걸음이 이제 내원사 입구로 향하고 있다. 생명의 속도로 가자, 천성산으로!
<사진 18> 무엇이 생명의 속도, 사람과 자연을 살리는 속도인가. 같은 길을 지나고 있지만, 걷는 두발의 속도와 포크레인의 속도는 여전히 화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사진 19, 20> 순례 내내 만나는 도로 위의 죽음. 장지뱀이 도로 위에 그대로 판박이가 되어 버렸다.
<사진 21> 물가에서 만난 물뱀도 자신만의 빠르기로 물 위를 자유롭게 유영한다. 때론 미끄러지듯 때론 조심스럽게. 속도의 노예가 된 건 인간뿐이지 않은가.
<사진 22> 빛만큼 빠르게 발전소로부터 나에게까지 달려오는 전기 아래 '천천히'라는 표지판의 이율배반.
<사진 23> 생명의 속도로 가라, 자연의 속도로 가라
***녹색순례 6일째 : 무제치늪을 지나 천성산의 품안으로**
천성산 녹색순례 6일째 드디어 천성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내원사 입구인 양산시 용연리에서 하루 다리품의 출발을 위한 배낭과 등산화 끈을 동여맸다. 북쪽 천성산의 정점인 정족산 자락을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천성산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정족산은 천성산의 북쪽 정점이자 낙동정맥의 한 봉우리다.
<사진 1, 2> 한손한손 느리게 굽어지는 모내기하는 늙은 농부의 허리 너머로는, 질주하는 도로와 산 절개지가 차갑게 서있다. 농부가 타고 왔을 자전거와 장화도 순롓길처럼 느린 걸음 천천히 생명의 속도로 왔을 것이다.
<사진 3, 4> 도로에서 차량들은 순례단의 발걸음을 위협하는 속도로 질주한다. 생명의 속도를 생각하게 한다.
정족산 자락에는 두 개의 대규모 공원묘지와 골프장이 자리잡고 있다. 솥발산공원묘지와 삼덕공원묘지가 정족산의 북동사면 전체에 들어앉았다. 장묘문화의 개선이 왜 필요한지, 납골이나 화장으로 왜 바뀌어야 하는지 이 곳을 지나가면서 절로 생각하게 된다. 영남의 생태축 한가운데에 대규모 공원묘지가 들어선 것이다. 아래로 언양쪽으로는 18홀짜리 골프장도 낙동정맥 한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다. 통도컨트리클럽이라는 골프장이다. 영남의 생태축을 절단하면서까지 들어선 곳에서 골프를 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사진 5> 공원묘지 입구에는 화려한 화환을 파는 꽃집이 있다. 순례단이 잠시 쉬었던 꽃집 옆 공터 그늘도 산허리를 허물고 공사중이다. 공사중 안전제일이라는 바리케이트 위에 누군가 앞서 다녀간 참배객이 조문을 했던 모양이다.
<사진 6, 7> 정족산 자락에는 두 개의 대규모 공원묘지와 골프장이 자리잡고 있다. 솥발산공원묘지와 삼덕공원묘지가 정족산의 북동사면 전체에 들어앉았다.
정족산에는 천성산을 대표하는 2개의 고층습원 중 하나인 무제치늪이 자리잡고 있다. 다른 하나는 원효산 정상의 화엄늪이다. 천성산에는 22개의 크고 작은 산지늪이 존재한다. 대부분이 희귀식물들이 즐비한 곳이다. 천성산의 가치가 남다르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요소인 산지늪은 산정이나 산중턱의 너른 터에 물이 고이고 여기에 수생식물들이 죽어 분해되지 않고 켜켜이 쌓여있게 된다. 이것을 이탄층이라 한다. 이탄층은 그 자체로 자연사의 이정표이자 박물관이 된다. 형성된 두께에 따라 저층부터 중층을 거쳐 고층까지다.
<사진 8> 무제치늪으로 올라가는 임도와 나란히 난 배수로. 허술한 설계와 관리로 나무가 뿌리와 이탄층까지 다 드러나 무너지고 있다.
천성산 고속철도 논란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무제치늪에 있느냐 없느냐다. 이탄층으로 형성된 습원이 지하에서 터널공사로 인해 지하수가 유출될 경우 과연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물이 빠져나가서 토양화 되느냐가 쟁점이다. 정부는 영향이 없다는 입장이고 천성산대책위는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이를 입증할 실제적인 조사는 단 한번도 이루어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만간에 착수될 '천성산환경평가 공동조사'에서는 이런 논란에 답을 줄 조사를 할 예정이다.
무제치늪은 터널공사로 인한 영향 이전에 부실한 산림관리로 늪 주변의 곳곳이 무너지고 있다. 지난 1998년 말 환경부의 자연환경보전법 자연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한 이후 주변의 훼손에 대한 종합적인 복원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가끔씩 근처를 지나가는 탐방객에 대한 교육이나 홍보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단순히 안내판만 세 개소 정도 세워져 있을 뿐 무제치늪의 기본적인 생성원리와 자연사적 가치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국가의 생태보고인 생태계보전지역에 대한 관리가 이 정도인지 안타까움을 넘어 서글품마저 든다. 정부의 천성산에 대한 관심이 지율스님의 반에 반만 되어도 무제치늪을 이런 식으로 관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율스님이 외고집이다 어떻다 비판할 것이 아니라 과연 스스로는 천성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보전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천성산의 품에 들어와 찬찬히 살펴보면 곳곳에 이런 점들이 확인된다.
<사진 9, 10, 11> 무제치늪은 1998년 말 환경부의 자연환경보전법 자연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한 이후 주변의 훼손에 대한 종합적인 복원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가끔씩 근처를 지나가는 탐방객에 대한 교육이나 홍보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단순히 안내판만 세 개소 정도 세워져 있을 뿐 무제치늪의 기본적인 생성원리와 자연사적 가치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훼손하지 않기 위해 들어가지 않고 울타리밖에서 늪을 바라보는 순례단.
무제치 1늪과 2늪을 지나서 약 30분 정도만 비탈길을 오르면 정족산 바로 턱밑이다. 남쪽으로 조금 더 나가면 바위지대가 형성된 이름 없는 봉우리가 있다. 정상 바로 옆의 이 무명봉에 서니 사방천지의 조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원효산까지 이어진 천성산의 주능선이자 낙동정맥의 산줄기가 용이 승천하듯 휘어감아 뻗어가고 있다. 그 맨 끝의 작은 삼각점을 형성하는 봉우리가 천성산 정상봉인 원효산 정상이다. 그 옆으로 화엄늪이 활처럼 길게 이어 펼쳐진다. 정상이자 남동쪽으로는 울산 시가지와 온산 공단을 비롯하여 경주-울산-부산기장까지 이어지는 해안선도 희미하게 들어온다. 그 바로 앞에는 양산과 기장의 경계인 대관산도 딱하니 버티고 서 있다. 서쪽으로는 영남알프스의 일부 산줄기가 들어난다.
<사진 13, 14> 무제치늪과 정족산 남쪽으로 조금 더 나가면 바위지대가 형성된 이름 없는 봉우리가 있다. 정상 바로 옆의 이 무명봉에 서니 사방천지의 조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15, 16, 17> 남쪽으로 원효산까지 이어진 천성산의 주능선이자 낙동정맥의 산줄기가 용이 승천하듯 휘어감아 뻗어가고 있다. 가운데 삼각점을 형성하는 봉우리가 천성산 정상봉인 원효산 정상이다. 오른쪽으로 화엄늪이 활처럼 길게 이어 펼쳐진다. 가운데 깊은 골짜기가 순례단이 꼬리치레도롱뇽 탐사를 하게 될 노전계곡.
천성산 자락인 양산과 울산의 시가지와 농촌을 5일 동안 지나치면서 막연히 그렸던 실체가 비로소 발아래 웅장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산은 푸름의 바다로 물결치고 있다. 활엽수림이 풍부한 곳은 바람만 불면 하얗게 물든 참나무 잎이 흔들리며 산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이렇게 천성산의 주능선이 관찰되는 봉우리에서 1시간가량 쉬며 충분히 산을 바라본다. 햇살은 강렬하여 뺨과 팔뚝을 바싹바싹 태우지만 바람도 이에 뒤지기 싫다는 듯 일렁이고 있어 봉우리에서 1시간 이상 쉬어도 더위로 인한 짜증은 없다. 조망을 보면서 지친 다리를 충분히 쉬게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진 18, 19, 20> 순례길은 철조망을 넘기도 하고 토끼풀이 흔들리는 길이나 떼죽나무가 한창인 꽃길도 지난다.
<사진 20> 순례 첫날부터 내내 가장 많이 보이는 떼죽나무. 하얀꽃 매달고 순례단과 함께 걷고 있는 듯 하다.
순례단은 주능선으로 접어들어 곧바로 안적암 계곡의 깊은 골짜기로 내려갔다. 하룻밤을 산정에서 머무르기로 한 것이다. 안적암 주지스님의 배려로 순례단은 크나큰 호사를 누렸다. 평소 신도관리를 하지 않고 오직 참선도량으로만 존재하던 곳인데 특별히 하룻밤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사진 21> 안적암으로 들어서는 순례단
<사진 22, 24> 순례단을 기다리고 있던 지율스님.
<사진 25> 안적암은 내원사 소속 암자이다. 도훈스님과 지율스님이 나란히 순례단을 맞아주셨다.
<사진 23> 인자한 얼굴로 맞아주시는 안적암 주지 도훈스님. 주지스님의 배려로 순례단은 크나큰 호사를 누렸다. 평소 신도관리를 하지 않고 오직 참선도량으로만 존재하던 곳인데 특별히 하룻밤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밥과 시금치된장국, 오이무침, 상추. 식단은 간소했지만 산 아래서 맞이하는 그 어떤 성찬도 부럽지 않을 그윽함이 베어 있다. 안적함의 공양간은 창문이 여러 개 나있다. 공양시간에 창문을 열어놓고 밥수저를 들 때마다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천성산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속하는 안적계곡의 울창한 활엽수림이 져가는 석양노을에 엷게 빛났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눈과 가슴으로 새겨진다. 그 어떤 레스토랑이 이만할까 싶을 정도다. 천상의 근처에 식당에 있다면 바로 이런 풍광이 아닐까 생각과 함께, 먹고 사는 문제의 근원에 대해 다시금 되짚어 보며 천천히 공양을 한다.
<사진 26, 27, 28> 절에서 내어준 밭상추에 밥과 시금치된장국, 오이무침. 식단은 간소했지만 산 아래서 맞이하는 그 어떤 성찬도 부럽지 않을 그윽함이 베어 있다.
붉은 기운이 하늘을 스쳐가니 마침내 천성산에 밤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 밤은 다시금 순례단의 영혼을 뒤흔든다. 보름달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안적암에서 맞이하는 보름달은 세치 혀끝이 한없이 모자람을 느낄 정도로 비유하기 힘든 감흥이 서려있다. 달이라는 근원적 존재에 대한 무한한 성찰로 안적암의 밤은 깊어만 갔다. 새벽이 기다려지지 않는 그런 밤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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