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김단야, 김산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47명이 광복 60돌 만에 유공자로 추서됐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과 이념 대립 속에서 이들은 철저하게 잊혀진 존재였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동녘) 등으로 비교적 잘 알려진 김산이나 해방 후 좌익 활동과 거리를 둔 뒤 1986년 타계할 때까지 생생한 증언을 남긴 김철수와 달리 김단야는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활동의 실체가 베일에 가려져 왔다.
김단야는 또 다른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던 박헌영과 함께 1919년 3·1운동 후 사회주의에서 탈출구와 대안을 찾은 청년 지식인의 전형이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악조건을 무릅쓰고 국내외를 잇는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그런가 하면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과의 죽음을 앞둔 사랑, '사회주의 조국'에 의한 비참한 최후 등은 김단야의 생애를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하다.
<프레시안>은 김단야 등의 독립유공자 추서가 엄혹했던 시절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정확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는 판단에 따라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교수(사학과)가 <역사비평> 2000년 겨을호(제53호)에 기고했던 '박헌영과 김단야'를 필자와 역사비평사의 허락을 얻어 전문 분재한다.
임 교수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사에 오랫동안 천착해 왔으며 <이정 박헌영 전집>(전9권, 역사비평사) 간행 과정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사회주의 운동사를 총정리하는 방대한 작업에 착수해 2003년 그 첫 번째 결실인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을 내놓았다.
특히 임 교수는 2000년부터 <역사비평>에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연재를 통해 '박헌영과 김단야'를 시작으로 강달영, 고광수, 김철수 등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사를 생생하게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편집자>
***죽음의 집**
***② 조선공산당 사건**
유감스럽게도 나는 다시 한번 이 글의 주인공들이 경찰에게 쫒기고 체포당하는 얘기를 전할 수밖에 없다. 이 불운은 세 청년이 출감한 지 1년 10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때에 일어났다. 이번에도 사건의 발단은 공교롭게 국경 도시 신의주에서 터졌다. 주인공들에게는 신의주가 질긴 악연의 도시인 셈이다.
1925년 11월 22일 저녁 늦게 신의주 시내 한 음식점에서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경성식당이라는 옥호(屋號)를 가진 이 음식점은 2층 건물에 여러 개의 내실을 가진 고급 요릿집이었다. 회식을 하던 두 그룹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한 그룹은 신의주의 가장 영향력있는 합법 청년단체인 신만(新灣)청년회 회원들이었다. 회원 누군가의 결혼식 피로연 자리였다. 집행위원장 김득린(金得麟)을 포함한 20여 명의 청년들이 음식과 술을 나누고 있었다. 다른 한 내실에는 옷을 잘 차려입은 다섯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 중 세 사람은 변호사·의사·냉면업자로서 신의주 유지라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두 사람은 신의주경찰서 소속 경찰관이었다.
청년회원들은 '변호사·자산가'들이 일본 경찰과 둘러 앉아 뭔가 숙의하는 모습에 심한 역겨움을 느꼈으리라. 청년들은 음식점에서 노래와 춤은 허용되지 않으니 조용히 하라는 형사들의 강압적인 요청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사소한 꼬투리가 집단 폭행으로 발전했다. 변호사 박유정(朴有禎)은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었고, 금테 안경과 회중시계가 파손됐고 두루마기가 찢겨져 나갔다. 한인 형사 김운섭(金運燮)도 집단 구타를 당했고 고급 오버코트가 훼손됐다. 간신히 요리집 밖으로 도망나온 일본인 형사 스즈키(鈴木友義)는 청년들의 추격을 받다가 결국 붙잡혀 집단 구타를 당했다.
신의주 경찰들은 격로했다. 감히 대일본제국의 관헌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의주 경찰이 총출동하여 보복 수사에 나섰다. 청년회 사무소는 물론이고 청년회원들의 가택을 샅샅이 수색했다. 경찰은 청년회원 김경서(金景瑞)의 집에서 뜻밖에도 기이한 문서들을 발견했다.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 명의의 '회원 자격 사표(査表)'와 통신문 3통이 그것이었다. 서울의 박헌영이 상해로 몰래 보낸 비밀문서 가운데 일부였다.
사건의 성격이 급각도로 바뀌었다. 단순한 폭행사건에서 대규모 비밀결사 사건으로 전환된 것이다. 신의주경찰서와 서울 종로경찰서가 합동으로 고려공산청년회 관련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에 착수했다. 검거의 회오리바람이 전국으로 불어 닥쳤다. 이른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은 일본 경찰의 손으로 이뤄진 최초의 대규모 사회주의자 탄압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1925년 4월에 서울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주요 간부 및 당원들이 체포됐으며, 당과 공청의 기능이 한때 위축됐다.
박헌영이 아내 주세죽(朱世竹)과 함께 경찰에 체포된 것은 1925년 11월 29일 서울 훈정동(勳井洞) 4번지 자택에서였다. 자택에서 검거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체포될지 모른다는 예측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내 주세죽도 열렬한 혁명적 인텔리겐챠였다. 함흥 출신의 그녀는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함흥경찰서 유치장에 1개월간 구금된 적이 있으며, 1921년 4월 이후 상해로 건너가 그 곳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한편,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체포될 당시 그녀는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상해 망명 시절이었다. 그때 이후로 두 사람은 부부임과 동시에 사상적 동지이기도 했다.
두 사람 외에도 임원근을 포함한 12명의 연루자가 함께 체포됐다. 이들은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됐으며, 그곳에서 심문을 받았다. 체포된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다소 길지만 뒷날 박헌영이 남긴 체험담을 직접 들어보자. 1929년에 모스크바에서 발간된 국제혁명가 후원회 기관지 <모쁘르의 길>에 박헌영은 '죽음의 집, 한국의 감옥에서'라는 글을 투고했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체포되기만 하면 그는 곧 바로 예비 심문이 이루어지는 경찰서의 비밀 장소로 끌려가게 된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혹은 고춧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 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어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 8명의 경찰들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 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쓰기 어려울 만큼 사실적인 기록이다. 심문은 이런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뤄졌다. 박헌영이 경찰 및 검사의 취조에 응하여 진술한 조서 기록들이 남아 있다. 그것들을 통독해 보면 박헌영이 취했던 진술 태도를 알 수 있다. 그는 몹시 불리한 정황 속에서 취조를 받았다. 경찰은 이미 그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가 작성한 비밀 문서들을 확보한 상태였다. 박헌영은 경찰이 이미 파악하고 있는 사실이나 증거가 드러난 문제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았다.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한 사실과 해외로 내보내기 위해 문서를 작성한 사실 등은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피해범위를 최소화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고려공산청년회가 일본의 실정법을 위반한 단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단체의 목적이 "폭력에 의한 국체(國體)의 변혁을 꾀하거나 혁명을 일으키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장차 자연히 찾아올 시기를 기다려 역사적 진보 과정에 따라 자기의 주의를 관철하는 데 있다"고 역설했다. 혁명단체가 아닌 사회주의 사상 연구단체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그 사실을 호락호락 인정할 리는 만무했다. 취조 경찰은 증거 문건 속에 담긴 "고려 혁명 전도의 대방침을 정하고자 목하 재료 수집 중"이라는 구절을 들이밀었다. 궁지에 몰린 박헌영으로서는 논리적 일관성을 견지하는 게 필요했다. 그는 지혜를 짜냈다. 고려 혁명이란 산업혁명을 지칭하며, 그 재료란 경제 상태의 통계표 같은 것을 뜻한다고 반론했다. 결국 폭력을 사용해 혁명을 일으키려는 의도나 일본의 국체를 전복할 뜻은 전혀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는 논리가 박헌영이 선택한 논조였다.
박헌영이 주력한 또 하나의 초점은 연루자를 가능한 한 축소하는 데 있었다. 조직을 보위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며, 나아가 동료들과의 인간적 의리를 지키자면 반드시 고수해야 할 진술 전략이었다. 경찰의 입장에서도 이 문제는 허투로 간과할 수 없는 중대사였다. 그들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과 간부들의 이름을 대라고 집요하게 추궁했다. 입을 열도록 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을 것이다.
현존하는 관헌 측 조서 기록을 검토해 보면, 박헌영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경찰과 기나긴 가시밭길의 대치선을 형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체포된 직후인 1925년 12월 1일부터 이듬해 7월 12일까지 박헌영을 상대로 한 피의자 심문 조서(경찰·검사), 청취서, 예심청구서, 피고인 심문조서 등이 남아 있다. 이 문서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점검하면서,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과 회원들의 명단을 대라는 경찰의 추궁에 대해 박헌영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회원 숫자를 27명이라고 주장했다. 허위로 댄 중앙위원 6명에다가 이미 국외로 떠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파견 유학생 21명을 합산한 숫자였다. 그가 말한 명단은 이미 체포된 사람과 국외에 체류 중인 사람만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이 답변은 다른 물증 및 다른 피의자의 진술 내용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박헌영은 피동적으로 진술을 번복했다. 부인할 수 없는 정황이 나타날 때마다 마지못해 그것을 시인하는 방법을 택했다. 말을 바꿀 때마다 그는 심한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박헌영은 8개월 동안에 무려 7번이나 진술을 번복하고 있다. 이미 드러난 사람 외에는 결코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게 역력하다. 다른 물증이 나오지 않는 한, 붙잡힌 다른 동료들의 입에서 뭔가 새로운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 한, 박헌영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박헌영이 자기 입으로 먼저 연루자 이름을 댄 경우는 찾기 어려웠다.
그 결과 박헌영은 많은 것을 보호할 수 있었다. 특히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7명을 끝까지 보호했다. 후보위원이란 '제2선 간부'라고도 불렸는데, 중앙위원들이 탄압을 받거나 여러 사유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때 그것을 보임할 목적으로 선임된 후보 간부들이었다. 그의 아내인 주세죽도 후보 위원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미체포 중앙위원들과 함께 공산청년회 조직을 수습할 터였다. 박헌영은 끝내 그 중 한 사람의 이름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수의 지방조직을 하나도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즈음 각 지방에는 야체이까(세포)가 왕성하게 설립되고 있었고, 그 숫자가 많은 곳에는 도(道)간부가 설치됐었다. 박헌영이 체포될 당시만 해도 경기, 경북, 경남, 전남, 함남으로 도합 5개도에 이미 도간부가 조직되어 있었다. 도간부가 설치되지 않은 지방의 야체이카는 중앙위원회가 직접 관장했다. 중앙위원회 책임비서 박헌영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드러내지 않았다.
신의주경찰서의 취조관이 미숙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박헌영의 진술 전략이 주효해서였을까? 경찰 취조는 10여 일 만에 종결됐다. 경찰 취조가 끝난 12월 12일에 박헌영을 포함한 44명의 피의자들은 신의주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박헌영의 혐의는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 선전에 한정되었다. 범죄 사실이 모두 고려공산청년회 관계로만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검사의 심문도 오래가지 않았다. 담당 검사는 10일간의 조사 기간을 거친 뒤 12월 22일에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신의주 지방법원 예심계로 송치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1월부터 7월까지 신의주 지방법원 예심판사의 주관 하에 지리한 예심이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다른 변수만 없으면 사건은 이 정도 수준에서 종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예기치 않은 돌발사고가 생겨나면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됐다. 1926년 6·10만세운동 조사 과정에서 다시 한번 대규모 검거 선풍이 불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은 이것을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이라고 불렀다. 새로 붙잡힌 동지들과 새로운 물증들에 의해 종래 심문 과정에서 은폐했던 사실들이 속속 드러났다. 통치 당국은 결국 제1차, 제2차 검거 사건을 병합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1926년 7월 12일자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명령이 떨어졌다. 박헌영을 포함한 제1차 검거 사건의 피의자들은 경성지방법원 예심계로 이첩됐다. 두 차례 검거 사건을 함께 취조할 목적으로 관할을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경성 지방법원으로 바꾼 것이었다. 경성지법 예심판사의 주관 하에 박헌영은 다시 고난에 찬 취조를 받아야 했다.
***② 김단야의 활약과 모스크바 유학**
박헌영이 고난을 겪는 동안 김단야의 운명은 어찌 됐는가? 물론 그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으로서 조사부 책임자였다. 제1차 검거 사건이 발발하자 김단야는 체포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감지하고 즉시 지하로 잠입했다. 그는 체포망이 시시각각 조여 옴에 따라 망명을 결심했다. 망명에 앞서 김단야는 미체포 중앙위원 및 후보중앙위원들과 사후 대책을 협의했다. 고려공청 중앙위원이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후보위원인 권오설(權五卨)이 파괴된 공산청년회 조직의 수습을 책임지고 서울에 잔류하기로 결정됐다. 그는 고려공청 후계 중앙위원회 구성에 주도적 역할을 맡은 것이다.
김단야는 일본 경찰의 수배망을 뚫고 망명길에 나섰다. 망명지는 상해였다. 그가 어떤 방법으로 삼엄한 경계망을 피했는지는 명백히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떻든 상해는 그에게 낯선 곳이 아니었다. 이미 3·1운동 직후에 그곳으로 건너가 2년 남짓 체류했던 터였다.
서울의 후계 간부와 긴밀한 연락선을 맺은 김단야는 망명지 상해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상해 임시특별연락부'를 설치했다. 모스크바에 파견됐다가 돌아온 공청 중앙위원 조봉암(曺奉岩)도 이 기관에 합류했다. 이 기관은 차기 대회에서 새로운 중앙위원회가 구성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존속하는 것으로 간주됐으나, 권한은 컸다. 단지 연락만 담당하는 게 아니라 중요 업무에 관한 한 국내 후계중앙위원회에 대해 지시를 내릴 권한도 갖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해외에 있는 공청 기관에 대한 지휘권도 넘겨받았다. 국내보다 더 강력하다는 평판을 받던 고려공청 만주 비서부를 산하에 두게 된 것이다.
상해에는 조선공산당 간부도 망명해 왔다. 당 중앙위원인 김찬(金燦)이 '조선공산당 상해 특별연락부'를 세워 코민테른 및 국내 당 간부진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당과 공청의 상해 연락부가 긴밀한 협조관계를 갖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고려공청 상해 임시특별연락부 책임자가 된 김단야는 주요 기관과의 교신 루트를 마련했다. 주요 연락선은 세 가지였다. 서울의 공청 후계 중앙간부, 모스크바 국제공산청년회, 공청 만주 비서부가 그것이다. 김단야는 이들과의 교신을 정례화·신속화하기 위해 힘썼다. 1926년 4월에는 상해 임시특별연락부라는 명칭을 '고려공청 중앙간부 해외부'로 변경했다. 국내 및 만주의 공청 조직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김단야의 해외부 활동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1926년의 6·10만세운동을 지원한 사실이다. 그해 4월 26일에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 순종이 사망하자, 경향 각지에서 추모 기운이 팽배했으며 망곡단(望哭團)·봉도단(奉悼團) 등의 명칭을 가진 추모단체가 급속히 설립됐다. 당과 공청의 재상해 망명간부들은 3·1운동 때보다 군중적 집단성이 훨씬 발달했으므로 대규모 군중을 반일운동에 동원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국내 후계간부들과 협의하여 이 기운을 반일운동으로 전화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김단야는 한때 국내로 잠입하기도 했다. 4월 15일 상해를 출발하여 5월 8일에 돌아왔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평양에서 당과 공청의 간부들과 비밀리에 회견했다.
1926년 하반기에 이르러 김단야의 해외부 활동은 중단됐다. 서울에서 권오설을 수반으로 하는 공청 후계 간부들이 6·10만세운동을 지도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해 8월에는 새로운 고려공청 중앙위원회가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해외부를 인정하지 않는 새 중앙간부들의 태도로 인해 김단야의 고려공청 중앙간부로서의 역할은 종결될 수밖에 없었다.
김단야는 모스크바 유학을 희망했다. 국제공청 집행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이 청원을 받아들였다. 그는 모스크바의 레닌국제학교에 입학했다. 이 기관은 코민테른이 운영하던 공산주의 간부 재교육기관이었다. 입학 자격은 매우 엄격했다. 입학을 청원하려면 다음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충족해야 했다. 당의 지도적 지위에 있는 공산주의자, 3년 이상의 당 경력과 1년 이상 당내에서 실제적인 정치 사업 경력이 있는 노동자 출신 공산당원, 5년 이상의 당 경력과 3년 이상의 실제 활동 경험을 갖춘 비노동자 출신 공산당원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정한 이론적 능력과 언어 구사 능력을 갖춰야 했다. 영어, 체코어, 에스파니아어, 중국어, 헝가리어, 독어, 불어, 아랍어, 루마니아어, 핀란드어, 인도어 가운데 하나를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김단야는 영어반을 선택했다. 그는 영어로 말하고 문장을 짓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입학이 허용된 사람들에게는 재학 기간 동안 기숙사, 장학금, 의복, 음식 등이 제공됐다. 1922년 1월에 극동민족대회 참석차 방문했던 곳,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에서 김단야는 높은 수준의 이론적·정치적 훈련을 받게 됐다.
***③ 탈출**
김단야가 레닌국제학교에 유학 중일 때, 박헌영은 불운하게도 여전히 옥중에 있었다. 수감 중인 박헌영에게 관심을 옮겨 보자. 기나긴 예심 기간이 종결되고 마침내 재판이 시작됐다. 조선공산당 재판은 1927년 9월 13일 오전 9시 경성 지방법원 제3호 형사법정에서 개정되었다. 나라 안팎의 커다란 관심 속에서 열린 이 재판은 "1912년에 일어난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 음모의 105인 사건과 기미년 3·1운동 당시의 48인 사건을 아울러 조선의 3대 사건" 가운데 하나로 지칭되었다. 또한 조선공산당 사건은 미국의 자코·반제티 사형 사건과 더불어 1927년 들어 전 세계 노동계급의 격동을 일으킨 두 가지 사건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피고인의 숫자는 101명이었다. 제1차, 2차 검거를 통해 체포된 100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 중에서 유죄 혐의가 입증된 사람들이었다. 공판 관련 문서의 분량도 방대했다. 101명 피고인의 취조 문서는 '4만여 페이지에 달하는 대기록'이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일본인 재판장이 기록을 열람하는 데만도 4개월이 걸릴 정도였다.
재판 첫날부터 박헌영은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과감히 발언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행위는 "한국의 민족 해방과 정의의 실현"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무죄라고. 그뿐만이 아니다. 취조 도중에 사망한 동지들을 살려내라고 울부짖었다. 박순병(朴純秉), 백광흠(白光欽), 박길양(朴吉陽), 권오상(權五尙)이 심문 과정에서 고문을 못이겨 사망했던 것이다. 그의 발언은 큰 파문을 가져왔다.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됐으며, 가혹한 보복이 뒤따랐다. 첫날 공판이 끝난 뒤 박헌영은 교도관들에게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했다. 뒷날 박헌영이 작성한 자필 영문 이력서에 따르면, "나는 법정에서 일본 재판관에 반대하여 투쟁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감옥에 돌아와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 결과 나는 1927년 9월 말까지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이후 계속된 재판 도중에 박헌영은 거듭 정신이상 증세를 드러냈다. 증상은 매우 심각했다.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으며,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애초 병보석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던 일본 재판부에서도 이 증세가 두 달 남짓 계속되자, 그가 심각한 정신이상 증세로 인해 생명이 위독하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박헌영의 병보석 출감이 허용됐다. 1927년 11월 22일이었다. 그때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박군의 얼굴'이란 시를 썼다. 그는 박헌영과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생이었고, 한때 상해에서 같이 망명 생활을 하던 동지이기도 했다.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선" 박헌영을 보고 심훈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박아, 박군아, ××(헌영-인용자)아!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원문-인용자)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길 때까지.
출옥한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의 도움을 받으며 요양했다. 서울의 정신질환 전문병원, 고향인 충남 예산군 신양리, 경치 좋고 건강에 좋다는 안변 석왕사, 주을온천 등을 전전했다. 젊은 부부의 첫 아이는 이때 들어섰다.
첫 아이의 해산 날짜를 앞두고 부부는 국경지대인 함경도로 옮겨 갔다. '요시찰 인물'이 국경 근처로 여행하는 것은 각별히 주목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정신질환자로 취급되고 있었으며, 게다가 처가가 함경남도 함흥에 있던 터였다. 관할 경찰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으며 경계의 눈길을 늦췄다.
박헌영 부부는 위험천만한 일대 모험을 시도했다. 탈출에 나선 것이다. 만삭의 배를 부여 안은 아내를 데리고 박헌영은 몰래 주선한 자그마한 배편을 이용해 동해 바다에 몸을 실었다. 어둠을 틈타 함흥 인근의 바닷가를 출발한 이 부부는 장시간 동안 파도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탓에 더욱 힘들었으리라. 국경을 넘은 것은 1928년 8월 어느 날이었다. 박헌영 부부의 탈출 소식은 조선의 경향 각지에 널리 퍼졌다. 일간 신문들은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탈출 소식을 전하는 신문지면에는 감시 책임을 지고 있던 함흥경찰서의 간부들이 엄중한 징계처분을 받았다는 소식도 함께 실려 있었다.
두 사람은 소련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톡 오께안스까야 거리 공원 벤치에서 만삭의 주세죽과 박헌영이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일 정도로 깡마른 박헌영의 안경 쓴 모습이 이채롭다. 그들의 얼굴빛에는 안도감과 함께 미처 풀리지 못한 긴장감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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