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8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김황태(31) 씨를 만났다. 봄치고는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오전 11시경, 취재진이 약속장소인 문학경기장의 보조경기장에 도착했을 때는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중에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드리워지더니 콩알만 한 우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진 촬영을 많이 해야 하는데 걱정스러웠다. 그는 왜 오지 않는 것일까.
"약속시간인 11시에 맞춰 집에서 나왔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은 거예요. 죄송합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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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의 굵은 목소리는 씩씩하고 밝았다.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않는 성격 같았다. 듣는 사람의 기분을 환하게 만들고, 어설픈 동정을 거부하는 쾌활함과 솔직함이 그의 목소리에는 담겨 있었다. 사실, 그를 만나기 전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장밋빛 꿈에 부풀었을 20대 중반에 양팔을 잃었으니 운명과 세상을 원망하면서 성격이 꼬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러나 그의 힘찬 목소리는 그런 선입견을 가볍게 부숴 버렸다.
잠시 뒤 트렁크 부분에 '해병 전우회' 마크가 붙은 구형 그랜저 승용차가 주차장에 빠른 속도로 들어왔다. 운전 솜씨가 '터프'했다. 운전은 당연히 그의 '아바타'(Avatar, 분신)인 아내(김진희·30)가 할 걸로 생각했는데, 웬걸, 환하게 웃으며 운전석에서 내리는 사람은 김황태 씨였다.
"제 차는 핸들 조작을 왼발로 할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됐습니다. 우리나라에 몇 대 없는 차죠. 오토매틱 레버는 의수로 작동시키면 되기 때문에 운전에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는 행운을 몰고 다니는 사나이인지도 모르겠다. 우박은 비로 바뀌어 있었는데, 그가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그쳤다. 비가 언제 또 쏟아질지 몰라 사진 촬영부터 서둘렀다(촬영을 끝마치자 천둥번개가 치고 돌풍이 불면서 한여름 장마처럼 폭우가 쏟아졌다). 촬영하는 틈틈이 얘기를 나누었는데, 아무래도 화제는 지난 3월 18일 열린 동아 마라톤에서 작성한 서브3에 모아졌다.
서브3 달성 도와준 감독·선배들
"벼르던 목표를 달성했으니까 기분이 홀가분하죠. 이번 기록(2시간57분40초)을 조금 더 단축할 자신은 있습니다. 하지만 2시간40분대에 진입하는 건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1년에 한 번 이상은 꼭 서브3를 달성하고, 그 외에는 즐겁게 달리고 싶습니다."
그가 서브3를 달성한 뒤 마라톤 관련 사이트에는 감동적인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동아 마라톤에 참가한 그에게 어떤 러너가 물을 먹여주는 사진이었다. 그보다 키가 한참 작은 주자가 물병을 통째로 들고 팔을 힘겹게 뻗어 올려 물을 먹여주는 사진은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분은 우리 동호회의 김진섭(48) 훈련감독님이에요. 2시간48분대 주자인데, 동아 마라톤에서 제 페이스를 조절해 주고,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챙겨 주셨죠. 제가 잘 뛸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들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는 런너스클럽의 인천지역 모임인 인천런클 회원이다. 2002년 11월 인천런클에 가입한 그는 동호회 선배들로부터 체계적인 달리기 지도를 받았다. 김진섭 감독은 그에게 스피드 훈련을 가르쳐 주었고, 2시간50분대 주자인 연일희(48) 훈련감독은 근력훈련 방법을 익히게 했다. 천재연(42)·최성철(41)·윤병서(40) 선배는 그의 단골 '페메'('페이스메이커'의 약칭)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양팔이 없는 그는 시계를 차지 못한다. 시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그는 영 궁금하면 옆에서 달리는 참가자에게 시간을 물어본다. 그러나 옆 사람이 그보다 먼저 출발했는지, 또는 나중에 스타트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시간을 들어도 정확한 페이스를 알 수 없다.
혼자선 급수대에서 물 마시기도 불가능하다. 천상 자원봉사자에게 물을 먹여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달리면서 급수대 위에 놓인 종이컵을 멋지게 잡아채는 참가자들에 비하면 1분 가까이 시간을 손해볼 수밖에 없다. 동호회 선배들이 그의 페메로 자주 나서는 건 이런 불편함을 해소해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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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동아 마라톤에선 김진섭 감독이 그의 페메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가 이미 작년 3월의 동아 마라톤에서 3시간5분, 금년 1월의 고성 마라톤에선 3시간6분에 골인했기 때문에 옆에서 조금만 챙겨주면 서브3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김 감독의 판단이었다.
"작년 11월에 열린 중앙 마라톤에서도 서브3를 노렸죠. 하지만 그날은 15km 지점에서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가는 바람에 경기를 포기했어요. 대회 전 날, 절편을 2천원어치 사서 혼자 먹었는데 그게 잘못됐던 것 같아요."
그는 식사를 하루 두 번만 한다. 오전 10시경에 아침 겸 점심을, 오후 3시쯤에 점심 겸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다. '하는 일 없이 놀면서 하루 세 끼 다 찾아 먹는 건 죄악'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런데 작년 중앙 대회 전 날은 뭔가 먹어둬야 다음 날 좋은 기록을 낼 것 같아서 저녁 무렵에 절편을 먹었다가 탈이 난 것이었다.
"화장실에서 5분 이상 시간을 까먹었더니 서브3가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중간에 되돌아왔다가 집사람에게 엄청 혼났습니다. 대회 전에 육회를 만들어 주는 등 그동안 열심히 챙겨줬는데 서브3를 못 했다고요. 사실 제가 서브3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 '1등 공신'은 바로 집사람이거든요. 그 벌로 지난겨울 내내 집안 청소를 담당했습니다(웃음)."
그는 농담을 잘 하고, 항상 긍정적이다. '낙천적인 성격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신앙'이라는 누군가의 말은 그를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았다.
"남편 없으면 살 수 없다"
그의 말대로, 아내가 없었다면 그는 서브3를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동아 마라톤에서도 아내는 전철로 이동하면서 그의 통과 시간에 맞춰 15km와 30km 지점에 마법사처럼 나타났다. 그리곤 먹기 좋게 물에 희석시킨 파워젤을 야쿠르트 병에 담아 어미 새가 새끼에게 하듯 그에게 먹여 주었다.
동아 마라톤이 끝난 뒤에는 인천에서 동호회의 뒤풀이가 열렸는데, 아내는 새벽 1시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술을 마시지 못 한다. 반면 그는 두주불사형이다. 술도 못 하면서 그의 곁에서 술과 안주를 계속 먹여주는 일이 쉬운 일일까. 그녀의 행위는 사랑과 헌신만으로는 쉽게 설명이 안 된다.
"마라톤 하는 사람들은 술을 얼마나 잘 마시는지 몰라요. 또 달리기 얘기만 나오면 대화가 끝이 없잖아요. 하지만 남편의 회식 자리가 제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자리를 떠날 순 없죠. 저는 남편의 분신이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그녀에게 잔인한 질문을 했다. "혹시 남편을 '동정'해서 결혼한 것 아니냐?" 하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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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심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분명한 건, 남편에게 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제게 남편이 필요했어요. 저는 남편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비록 남편의 양팔은 사라졌지만, 평생 저를 지켜줄 든든함은 그대로였거든요. 그러니까 결혼을 반대한 친정아버지에게 죽도록 맞으면서도 남편에게 도망갔죠(웃음)."
두 사람은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다. 그가 고3, 그녀가 고2 때였다. 그녀가 주선한 미팅에 그가 참석한 것이었다. 그 당시 그는 이성 교제에 관심이 없었다. 그날 미팅에 나온 것도 부족한 머릿수를 채워주기 위해서였다. 주선자는 참석자에게 '눈독'을 들이면 안 되는 게 미팅의 불문율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꾸만 그에게 쏠리는 눈길을 거둘 수 없었다. 미팅이 끝난 뒤 그녀는 평소 친분이 있던 남학생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물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학생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전화번호를 건네 받은 그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연락하지 않았고, 그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자 그녀는 애꿎은 '연락책'만 들들 볶았다. 연락책이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횟수가 늘어난 뒤 그들은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
"저는 A형이어서 잘 삐치고, 소극적이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남편에게 왜 그렇게 적극적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이때부터 두 사람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1994년, 인천 운봉공고를 졸업한 그는 전기공사 업체인 남광기업(주)에 입사했다. 이듬해 북인천여상을 졸업한 그녀가 직장생활을 시작하자 두 사람은 성인으로서의 만남을 이어갔다. 1996∼1998년, 그가 해병대에서 복무할 때도 그녀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제대 뒤 재입사한 남광기업에서 그는 '지각 대장'이었다. 아침마다 만나 그녀의 직장까지 데려다준 뒤 출근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버스로 함께 출근하다가 오토바이와 승용차로 출근 수단이 바뀌어갔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함께 사는 것이 더 이득이겠다는 판단을 했다. 2000년 여름, 그는 그녀의 집을 찾아가 결혼 승낙을 받았다. 그해 가을, 양가 부모가 상견례를 하면서 결혼 날짜를 잡기로 했는데, 불행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는 회사에서 전봇대에 전기를 가설하는 일을 담당했다. 전문 용어로는 '무정전 활선 작업기사'가 그의 업무였다. 고압선을 만지는 일이 잦은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이미 작업을 하다가 떨어져서 팔이 부러지고, 절단된 엄지손가락 접합 수술을 하고, 전깃줄이 눈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실명할 뻔한 사고를 겪은 적이 있었다.
치명적인 사고가 난 날은 2000년 8월이었다(그는 사고 충격으로 사고 당일부터 사흘 동안의 일을 전혀 기억 못 한다). 인천대공원 부근, 공수부대 입구의 전봇대에서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작업은 보통 운전기사 한 명과 전기기사 두 명이 한 조를 이뤄서 한다. 전기기사 한 명은 지상에 있고, 나머지 기사가 '작업차'(한국전력이나 경찰이 전기공사나 신호등 교체 작업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다리차를 생각하면 된다)에 올라가서 작업을 한다. 그날 작업차에 오른 건 그였다. 작업차는 절연이 돼 있어서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 22,000볼트 고압선을 오른손에 쥐고 작업하던 그는 작업차의 위치를 조정하기 위해 무심결에 작업차의 키를 왼손으로 잡았다. 순간 고압전류가 그의 몸을 관통하면서 온몸에 불이 붙고 말았다. 지상에 있던 동료 기사가 얼른 그를 끌어내리고 불을 끈 뒤 호흡이 멎어 있는 그에게 인공호흡을 여러 차례 했다. 그가 숨을 되돌리자 화상치료 전문병원인 서울의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에서는 처음에 그가 살 가망이 없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회복 기미를 보이자 의사들은 "체력이 참 좋다"고 입을 모았다. 11개월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죽을 고비를 두 차례 넘겼다. 양쪽 겨드랑이까지 고압전류가 관통했는데, 팔을 절단한 뒤 침대에 누워 있노라면 눈앞이 깜깜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겨드랑이 혈관이 터져 출혈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하면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뜨면 살아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혈관이 터질 때마다 담당 의사가 지나가다가 그를 발견하고 수혈해 살려냈다.
친정부모 반대 무릅쓰고 결혼
평일에는 그의 어머니(박기희·56)가 그를 간병했다. 주말 당번은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친구였다.
"병원에 서너 번 다녀왔더니 친정아버지가 '이제 그만 가라'고 하시더군요. 이 사람과 더 이상 만나지 말라는 거였죠. 전 그럴 수 없었어요. 제 눈에는 이 사람밖에 안 보였고, 사랑 하나면 뭐든지 다 되리라고 믿었거든요."
사고가 난 지 2년 4개월이 지난 2002년 12월, 두 사람은 결혼식을 생략하고 혼인신고를 했다. 그리고 충남 천안으로 도망치듯 내려가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인천으로 다시 돌아온 건 2004년 3월, 외동딸 유리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이제 친정아버지는 우리 집에도 자주 왕래하세요. 하지만 친정어머니의 노여움은 아직도 안 풀리셨어요. 시간이 좀더 흐르면 나아지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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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달리기를 시작한 건 천안에서 생활하던 2003년 2월부터였다. 83kg까지 늘어난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달리기에는 워낙 소질이 있었다. 해병대 복무 시절 그는 사단 대표선수였다. 당시엔 10km를 35∼36분에 달렸다. 사고 5개월 전인 2000년 3월에는 당시 하프코스가 있던 동아 마라톤에 참가해 1시간55분에 완주한 적도 있었다. 달리기 시작 한 달 만에 5kg을 줄인 그는 그해 10월 춘천 마라톤에 참가해 4시간02분에 골인했다.
"그때는 훈련 방법을 모를 때였습니다. 대회 4일 전에 39km를 달리기도 했으니까요. 아무튼 혼자서 걷지 않고 첫 풀코스를 완주하니까 세상살이가 두렵지 않더군요. 제게 팔은 없지만, 튼튼한 두 다리가 있으니까요."
팔이 없는 상태에서 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상인의 경우 양팔을 밧줄로 묶어놓고 달리는 것과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상체의 흔들림이 많고, 언덕을 내려올 때 균형 잡기가 어렵다. 이런 몸 상태로 풀코스를 2시간57분에 달린다는 것은 정상인이 2시간30분대에 골인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대회에 참가해 달리다보면 응원해주는 분들이 많아요. 그 성원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뛰게 됩니다. 어떨 때는 '어, 아까 지나갔는데 또 가네?'라며 의아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2시간30분대 주자인 경북 구미의 김영갑 선배와 저를 혼동하는 거죠(웃음). 앞으로도 열심히 뛰고,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동행한 우리 잡지 박지혜 기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양팔을 잃었다면 결혼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박 기자는 주저하지 않고 "조금만 같이 살다가 도망쳤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맞는 말일 것이다. 충동적인 사랑에 휩싸여 잠시 함께 생활하는 건 가능해도 영원히 부부로 같이 사는 일은 '기적'과 같은 일일 것이다. 헬렌 켈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삶에, 아니 타인의 삶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김황태·김진희 부부는 그들의 삶뿐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의 삶에도 기적을 만들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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