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풍토'와 '마을', 한국미의 원형을 설명하는 두 가지 핵심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풍토'와 '마을', 한국미의 원형을 설명하는 두 가지 핵심어

[오래된 아름다움을 찾아서]<5>

우리는 어떤 문화 사조 또는 미술 양식을 이야기할 때 '원형'이란 말을 자주 쓴다. 원형(原型)이란 기본이 되는 모형이다. 미학적으로는 한 국가 사회 또는 민족의 미술 활동이 처음 형성될 때 갖추어지는 기본적 성격이나 가치에 대한 구성원의 평균적 체험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형성되면 잘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이러한 원형의 관점에서 우리 전통 미술에 구현된 조형정신과 정체성 형성 및 진화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조금은 생소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해석의 틀이 될 수 있다.

'풍토', 원형을 잉태하고 살찌우는 토양

한 국가 사회나 민족이 미술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 중심 생각, 가치관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국토 조건과 기후, 자연환경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풍토(風土)가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과학 기술 문명이 발달하지 않아 생활 전반이 자연환경과 기후조건에 크게 의존하던 시대에는 풍토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시대에는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조화하는 생사관이 보편적인 가치관으로 자리 잡기 마련이고 그러한 가치관은 미술의 조형정신에 반영되어 그 국가 사회나 민족의 미적 원형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이 터를 잡고 살아온 "한반도의 풍토는 한민족의 미학적 원형을 잉태하고 살찌우는 대지의 자양분과 같은 것이다"고 할 수 있다.

한때 동북아시아 대륙을 지배한 고구려와 발해의 흥륭기(興隆基)를 제외한다면 우리 민족이 지배하던 지리적 영역(疆域)은 대체로 한반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말 이후 지금까지 한민족의 활동공간이 한반도라는 영역에 제한되었다는 사실, 또 그 한반도의 풍토가 남북과 동서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비산비야(非山非野), 완만한 산세, 온화한 기후 등을 주된 특징으로 하고 있음에서, 직관적으로 지금껏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심성과 가치관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사물의 해석에서 때로는 그러한 직관이 정교한 논리적 사유와 전개를 앞설 수 있는 것이다.

▲ 비산비야로 묘사되는 한반도의 지세. 완만한 산세와 그 사이사이에 자리한 농경지와 마을, 온화한 기온으로 특징지어지는 한반도의 풍토는 한국미의 원형을 형성하는 모태가 되었다. 낙동강을 끼고 펼쳐진 경북 상주 지방. ⓒ한길아트

아무튼 풍토와 원형의 관련성에서 본다면 한민족이 그러한 자연 환경에 적응하며 안정된 농업생산체제의 고대국가를 형성한 삼국시대 중반 무렵에 민족의 미적 원형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원형의 대략적인 골격은 삼국 통일을 계기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를 민족의 미적 원형의 형성기로 보는 또 다른 이유는 불교적 생사관과 사상체계가 삼국의 주도적 또는 보편적 가치관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 무렵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조선시대 들어 현세적 가르침을 중시하는 유교가 주도적 가치체계로 등장하기도 하였으나 불교적 가치관은 여전히 우리 민족의 바닥 심성을 지배하면서 민족 원형이 큰 변화 없이 금세기 초입까지 유지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마을', 한국미의 원형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

이처럼 고대사회 우리 민족이 추구했던 아름다움, 그 원형의 형성과 진화는 일차적으로는 풍토와 거기에 적응하는 주거 구조에 의해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사회구성체의 기본 단위인 '마을' 중심의 생활 문화와 농업적 생산방식 등 사회경제적 기반과 특성에 의해서도 상당 부분 규정되었을 것이다.

즉 자연조건이 생활의 전반을 지배하던 시대에는 당연히 공동체적 생활 단위와 사회경제적 특성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기 마련이고 이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시대 사회의 가치관과 미술의 조형 정신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형의 형성에 있어서 국토조건과 자연환경을 기본조건이라고 한다면 생활단위와 경제적 생산방식은 보완조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이전의 우리 사회의 기본 생활단위는 '마을'이었다. 신라의 서라벌, 고려의 개경, 조선의 한양을 제외하면 도시다운 도시는 없었다. 하나의 도시와 비산비야로 특징지어지는 국토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수만 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나라. 이것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머리에 수천수만 개의 발이 달린, 실제 그런 동물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 통일된 동작을 이루기가 힘든 연체동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사회적 환경에서는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거의 모든 것이 마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즉 자율신경에 맡겨지는 국가형태가 발달하기 마련이다. 마을은 동성동족 중심의 자급체제와 독립성을 유지했으며 가치관에 있어서도 국가에 대한 충(忠)보다 이웃에 대한 정(情)이 중시되었을 것이다. 사회 질서의 근간은 칼로 대변되는 냉혹한 국가 공권력이 아니라 혈연중심의 사적인 자율적 규제였다. 그러한 자율적 규제 질서에 익숙한 개인의 감정표현은 자유로웠을 것이고, 따라서 생각에도 깊이와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 완만한 산세와 넓지도 좁지도 않은 농경지를 끼고 자리 잡은 한국의 전통 마을. 마을은 자급적 생산단위이자 자율적 사회구성체였다. 그처럼 느슨한 사회 질서에 익숙한 개인들의 감정표현은 여유가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미의식에서도 은근함과 자유로움이 표출되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충남 외암리 전경. ⓒ한길아트

당연히 미의식에서도 엄격한 구성이나 기교의 완전함이 아니라 은근함과 여유, 자유로움 등 자율신경과 같은 강한 생명력이 표출되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무기교, 무계획, 비정제성 등 고유섭이 언급한 한국미술의 특징은 상당 부분 바로 '마을'이라는 자율적 공동체적 생활 문화에서 형성되고 발전하였다고 본다면 지나친 생각의 비약일까? 그렇지 않다면 한국사회에서 '마을'은 한국미의 원형을 푸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조선 시대 말의 마을 수는 약 7만 개 정도였고 지방 관리의 수는 700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자율적 질서가 근간이 되고 따라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는 느슨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비해 일본은 명치유신(1867년) 당시만 하더라도 180만 명에 가까운 무사단과 관리가 일본 전역을 경쟁과 긴장의 사슬로 묶고 있었다. 그러한 냉혹한 지배질서 체제하에서는 지방 영주 다이묘(大名)가 먹는 밥 속에 돌이 들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밥 짓는 사람의 목이 잘렸다. 살아남는 길은 오직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최고의 기능인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의 도구를 만들더라도 적어도 기능적으로는 문제가 없어야 했다. 감정의 표현은 억제되고 개성보다는 기교를 중시하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미의식이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인이 만든 이도(井戶) 다완(찻잔)과 일본인이 만든 라쿠(樂) 다완을 비교하면서, "자연의 지혜로 태어난 이도, 인간의 작위로 만들어진 라쿠"라는 표현을 쓴 것은 참으로 그 핵심을 찌른 것이다. 또 미국 출신 동양미술사학자로서 그 누구보다 한국미술의 뿌리를 찾는 데 헌신한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96)의 눈에 비친 한국미술과 한국인의 인상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한국인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보다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심성을 지녔으며, 자연에 가까운 사람들임을 안다. 그들은 이 땅에 흐르는 강과 산천경개와 일심동체가 되어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행동은 보다 자연스럽고 덜 속박된 감정에 자기 느낌을 보다 솔직하게 드러낸다. '바람직한 행동규범'을 위해 실제로는 마음속에 진심을 숨기고 있는 폐쇄적인 일본인과는 분명 다르다"

멀리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당 부분 한반도에서 전해져 뿌리가 같은 문화와 미술적 표현도 살아온 환경에 따라 이렇게도 달라지는 것이다. 풍토와 생활 터전이 다르면 원형도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 김치호

195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77년 연세대학교상경대학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통계학 석사(1983), 경제학 박사(1987) 학위를 받은 뒤 20여 년 동안 한국은행, 예금보험공사 등에서 한국의 거시경제, 통화정책, 금융위기를 연구했다. 정리금융공사 사장을 역임했고,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한국의 거시경제 패러다임>(2000, 한길사) , <고미술의 유혹>(2009, 한길아트) 등을 저술하고 논문 50여 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으며, '유망 미술작가 해외진출 후원모임'을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우리 미술시장 저변 확대를 위한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