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터들이 수집 물건(작품)을 고를 때 흔히 고려하는 사항들이 있다. 컬렉터 나름의 지침이나 기준, 원칙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의 취향을 충족하면서 깊이가 있는 물건이어야 하고, 물건의 가치와 느낌이 자신의 몸에 와 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형식을 갖추어 이야기하면, 컬렉션 대상 작품은 작가나 장인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창작된 것이어야 하고, 눈만이 아니라 영혼과 이성까지도 매혹함으로써 컬렉터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컬렉션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인간 활동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또 작가나 작품의 명성보다는 물건 그 자체로 가치를 판단하고, 형태미에 있어서 독특함이 있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컬렉터의 영혼과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같은 기준이라도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컬렉션의 세계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런 사항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정리하면 '좋은 컬렉션은 컬렉터의 직관이 반영된 것으로서, 수집된 물건 사이에 암묵적 질서(통일성)가 있어 컬렉션이 하나의 완성된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표현이 되지 않을까? 실제 얼마나 많은 컬렉터가 이러한 사항들을 실천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따지고 보면 참으로 어려운 주문 사항이다. 어쨌든 이를 좀 더 쉽게 요약하면 '좋은 선택은 좋은 컬렉션의 전제 조건' 정도가 되는 것이다.
수집 대상의 경이로움에 따라 컬렉션은 강한 생명력을 가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컬렉터들은 물건에 대한 분명한 관점이나 컬렉션의 참된 의미, 긴 안목 없이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일반적인 컬렉션 관행과 가치에 따른다. 초심자들이야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섭치 수집 단계를 벗어나 제반 비용과 시간을 아끼는 일이고, 또 안전한 일이기도 하다. 잘 포장된 길을 그저 신호만 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컬렉션은 이미 결정된 컬렉션 가치를 추종하고 보전하는 유형이다. 일종의 '지키는 컬렉션'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컬렉션이 모방이며 타인의 전철을 밟는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사회적으로는 기존 컬렉션 문화의 전통과 가치를 보전하고 발전시키는 일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자체로 컬렉션의 기본에 충실한 데 별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면 어떤가.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아름다움으로 가는 긴 여정이 아닌가? 그러나 그 아름다움으로의 긴 여정에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갈 수 있다면 그건 참으로 소중하고 축복받는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길이기도 하다. 그 여정은 포장되지 않고 안내판도 없는 시골 길을 가는 것이어서 때로는 차가 전복되기도 하고 길을 잃어버릴 위험도 있다. 그 대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는 늘 새로움이 있고 긴장감이 있다. 남들이 가는 길에 동행하는 컬렉션을 '지키는 컬렉션'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컬렉션은 '창작하는 컬렉션'이라 할 수 있을까?
창작하는 컬렉션은 물건에 대한 창의적인 관점의 소산이다. 컬렉션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름다운 물건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택한다기보다는, 선택되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물건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물건을 보는 관점이 열리고 안목이 높아지면 컬렉션은 하나의 창작이 된다. 아름다움을 보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가치체계가 새로 열리게 된다. 지금까지 묻혀 있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컬렉션이 지킴에서 창작으로 들어갈 때 컬렉션은 하나의 새로운 아름다움의 생명체로 태어난다. 거기에는 질서가 있고 조화가 있다. 위대한 미술가가 위대한 장인이 자신의 혼을 담아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름다움을 형상화하는 제1의 창작이라고 한다면, 관점이 있는 훌륭한 컬렉션은 제2의 창작인 것이다. 미술창작은 컬렉션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컬렉션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문제는 물건의 구입과 소유 방식과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물건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물건을 대하는 컬렉터의 그런 마음의 관점에서 볼 때 물건은 그냥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아름다움의 생명체가 된다. 즉, 컬렉터와 대화하는 '마음을 가진 생명체', 즉 유정(有情)의 개념이다. 이 말의 속뜻은 컬렉터가 수집에 임하면서 언제나 수집한 물건에 대해 자신이 존경심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그러한 물건을 수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단순히 그냥 좋아한다든가, 흥미롭다든가, 남이 권한다든가 하는 차원의 의미가 아니다. 그 대상에서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이와 존재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의 박병래 기증실에 있는 박병래 초상 부조. 백자, 연적, 필통 등 조선 선비의 기품이 뚜렷한 조선 백자를 만나볼 수 있다. ⓒ한길아트 |
수집하는 물건에 그런 경이로움이 있을 때 그 컬렉션은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무정(無情)에서 유정으로의 바뀜이다. 그런 관점에서 평생을 조선 백자 수집에 헌신한 수정 박병래(1903∼1974)는 자신이 수집한 물건과 마주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도자기 수집에 취미를 붙이고 나니 처음에는 차디차고 표정이 없는 사기그릇에서 차츰 체온을 느끼게 되었고, 나중에는 다정하고 친근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또 고요한 정신으로 도자기를 한참 쳐다보면 그릇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처음처럼' 직관의 안력(眼力)으로 물건의 가치를 읽어내야
물건의 구입방식과 관련하여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참된 컬렉션 정신으로 '지금 이 순간, 이 물건'만 산다는 행위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 ▲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에 공감하면서 일제의 조선 문화 말살에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한 몇 안 되는 일본인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한국미술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과 심미안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한길아트 |
이 정신은 일본 다도(茶道)의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속뜻과 비슷한 데가 있다. 즉 일생에 단 한번 모임에서 단 한 번의 차를 다려내듯이 이는 구입 행위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 하나'를 '딱 한 번'만 구입한다는 의미이다. '언제나 처음'이라는 심정으로 구입하는 것이다.
자신이 구입하는 물건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의 첫사랑인 것처럼, 한 번뿐인 첫사랑에 빠지듯 진정한 컬렉터는 설레는 가슴으로 물건 하나하나를 온 정신이 집중된 눈과 가슴으로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진실로 아름다운 존재는 그저 각양각색으로 존재하는 사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좌우가 없는 현재의 하나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수집하는 물건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이와 창조성과 직관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 한 개의 물건이라도 그것을 수집한 사람의 직관과 안목, 열정이 담겨 있다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컬렉션이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창작하는 컬렉션의 조건은 자주적이고 자유로운, 그리고 살아 있는 생생한 눈을 갖추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롭고 살아있는 생생한 눈'이란 세간의 평판이나 시가(時價), 그런 것에 의거하지 않고 물건 그 자체를 보는 힘(안력,眼力)을 의미한다. 물건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을 의미하는 안목이 아니라 직관의 의미에 가깝다고 할까?
물론 지식과 경험도 중요하다. 그러나 물건을 대하는 순간 지식이나 경험의 틈입이 두드러지면 컬렉터의 시선은 흐려진다. 지식과 경험은 색안경과도 같아서 그 색 이외의 색깔이 무엇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다시 말하면 지식과 경험은 사물로부터 떨어져 보는 하나의 기능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진정 그 물건에 담겨 있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른 비유를 들자면, 지식과 경험은 구슬이고 직관은 이들을 꿰는 실과 같은 것이다. 안력은 흩어져 있는 여러 대상들을 꿰어 하나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직관과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안력은 어디에서 어떻게 얻어지는가? 나도 잘 알 수가 없다. 좀 막연하기도 하고 실제 컬렉션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이지만 아무튼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간절함이 있다면, 그러한 감성 속에서 물건을 보는 힘은 생겨나고 눈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눈빛으로 물건에 담긴 아름다움을 보면서 세속에 찌든 자신을 잊고 인간 본성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컬렉션 욕망. 그런 컬렉션 욕망을 어찌 세속적인 물욕(物慾)이라 하겠는가? 그건 아름다운 욕망이다. 그런 욕망이야말로 올바른 컬렉션으로 이끄는 힘이다.
저자 김치호 195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77년 연세대학교상경대학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통계학 석사(1983), 경제학 박사(1987) 학위를 받은 뒤 20여 년 동안 한국은행, 예금보험공사 등에서 한국의 거시경제, 통화정책, 금융위기를 연구했다. 정리금융공사 사장을 역임했고,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한국의 거시경제 패러다임>(2000, 한길사) , <고미술의 유혹>(2009, 한길아트) 등을 저술하고 논문 50여 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으며, '유망 미술작가 해외진출 후원모임'을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우리 미술시장 저변 확대를 위한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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