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물성적 내구성에 더해, 하나 더 언급할 사항은 고미술품의 경우 어느 분야의 컬렉션보다 수집한 물건의 소장 기간이 길다는 점이다. 이런 속성을 소장적 내구성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중도에 취향이 바뀌거나 안목이 높아져 컬렉션을 업그레이드하는 경우도 있지만, 잘 선택된 물건의 경우 대개가 컬렉터와 일생을 함께하는 것이 고미술품의 타고난 운명이다. 또 컬렉터가 컬렉션에 몸담는 기간이 어느 컬렉션보다 긴 것도 고미술 컬렉션의 한 속성으로 알려져 있다. 관심을 갖고 4~5년 정도는 열정을 쏟아야 컬렉션으로 가는 마음의 문이 열리고, 어느 정도 컬렉션 세계의 물리(物理)를 알게 되기까지는 또 수년이 걸리는 것이 고미술 컬렉션이다. 그렇지만 한 번 빠지면 그만두기가 힘든 것이 고미술 컬렉션이다.
이처럼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고미술 컬렉션의 시계(time horizon)는 시대 흐름에 순응하며 유행을 많이 타는 현대 미술보다 훨씬 길 수밖에 없다. 변동성도 변덕스러움도 덜한 편이다. 그래서 느낌으로 말하면 진득하면서도 뿌리칠 수 없이 휘감겨오는 지긋한 여인의 끈적끈적한 유혹 같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만의 느낌과 관점으로 컬렉션 세계를 구상하고 실행에 옮겨야
처음 컬렉션으로 향하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어렵고 컬렉션 물리에 눈을 뜨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맛 들이면 거의 일생 동안 지속되는 고미술 컬렉션. 시작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단계가 긴 호흡과 안목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판단하고 즐기는 사이클이 길다는 의미다. 따라서 컬렉터는 자신의 품에 두고 즐길 수 있는 적어도 20~30년 정도의 세월을 염두에 두고 컬렉션을 구상하고 또 실행에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건의 선택이나 구입과 관련되는 의사결정을 서두를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충분히 생각하고 연구하여 자신만의 느낌과 관점으로 컬렉션 세계를 구상하고, 평생을 함께 해로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반려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수집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초보 컬렉터들은 십중팔구 물건을 보는 눈이 조금씩 열릴 때마다 물건을 사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다. 열병을 앓게 되는 것이다.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는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좋아 보이고 사고 싶어진다. 꿈에 나타나는 것은 보통이고 시도 때도 없이 환영으로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도 다반사다. 그처럼 컬렉션 열병이란 지독한 데가 있는 것이다.
내가 고미술 컬렉션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아내 몰래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여 물건을 샀다는 고백을 어디선가 한 적이 있다. 따지고 보면 나도 남 못지않게 컬렉션 입문 초기에 열병을 앓았던 셈이다. 일종의 통과의례인 그런 열병을 짧게 그리고 진하게 앓을수록 섭치 수집과정에 수반되는 시간과 비용은 절약된다. 그럴 경우 한 사람의 뛰어난 컬렉터로 성장하는 과정은 곧바른 길, 때에 따라 좀 가쁜 숨을 쉬게 되는 경사길이 되겠지만, 그만큼 그곳에 도달하는 시간의 밀도도 강해 성취의 기쁨도 큰 법이다.
▲ 처음 컬렉션에 조금씩 눈을 떠갈 무렵에는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좋아 보여 갖고 싶은 열병을 앓기 마련이다. 그런 열병을 짧게 그리고 진하게 앓을수록 섭치 수집에 머무르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섭치가 가득 진열된 가게. ⓒ한길아트 |
참고로 많은 컬렉터들이 어느 정도 안목이 트이면서, 과거 자신이 입문 초기에 열병을 앓으면서 수집해 놓은 물건을 볼 때마다 모두 애물단지 같이 보이고 그런 과정을 걸어온 자신이 참 한심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당연히 그 정도는 컬렉션 열병을 강하게 오랫동안 앓았을수록 심할 것이다.
참 얄궂은 것은 초보의 눈에는 변변치 않은 섭치가 최고로 좋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주위에서 아무리 섭치의 한계를 설명하고 좀 비싸더라도 반듯한 물건을 살 것을 권해도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컬렉션에 있어서 이 말의 의미는 물건을 보는 눈의 단계가 높아짐에 따라 좋아 보이는 물건의 수준도 높아지기 때문에 결코 초보 컬렉터가 섭치 수집단계를 거치지 않고 고급 물건을 살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물건을 보는 안목이란 이처럼 묘한 것이다. 마치 소리에 빠져 절대 음을 찾아가는 음악 마니아가 단계 단계를 거치며 오디오 시스템을 업그레이드 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까?
서두르지 말고, 그렇다고 나태하지도 말고, 꾸준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끈기와 인내. 그 과정에서 눈은 열리고 물건은 아름다움의 생명체로, 영혼의 반려자로 다가오는 것이다. 너무 막연한 이야기 같지만 그런 것이 고미술 컬렉션의 묘미이고 그런 쉼 없는 느린 걸음걸이가 컬렉터의 기본 덕목이다. 그래서 그만큼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일지도 모르겠다.
컬렉션의 생명력과 가치는 보편적 아름다움에서 비롯하는 것
당연한 얘기지만 컬렉션에서 수집품의 예술성(작품성)이란 그 물건의 소장가치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이다. 통상적으로 고미술품 하면 문화재적 또는 사료적 가치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문제는 문화재적 가치와 소장가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장가치는 오히려 경제적 가치(거래 가격)와 유사한 개념이다. 그렇다 보니 소장가치는 작품의 예술성에 더하여 희소성, 보존 상태, 컬렉터들의 선호도와 시장의 수급 사정까지 포함된 대단히 포괄적인 가치개념이다.
그렇다면 컬렉터의 입장에서는 어떤 가치를 더 중시해야 할까? 나는 개인적으로 문화재적 또는 학술적 가치보다는 당연히 소장가치를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소장가는 소장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 컬렉션은 박물관이 아닐뿐더러 집이라는 소장 장소의 공간적 특성도 대중을 상대로 하는 박물관의 전시공간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소장가치는 필수조건이고 문화재적 또는 학술적 가치는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품 컬렉션의 대상에 내재된 아름다움 또는 작품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통상적으로 대상의 아름다움과 예술성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사람에 따라 보는 눈이 다르고 받는 감동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 둘은 크게 어긋나지 않는 개념이다. 대개 아름다운 것은 작품성이 뛰어나고 또 작품성이 뛰어난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현대 미학에서 복잡하게 이야기하는 조형 기법이나 표현 양식은 달라도 인간의 눈에 비치는 아름다움의 본질, 그 정신을 잘 표현한 것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느낌으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미술 컬렉션이 추구하는 오래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 오래된 아름다움이란 말에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하나는 물건을 만든 사람이 표현하고자 했던 창작적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 오랜 세월에 걸쳐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의 손때가 남긴 흔적의 아름다움 또는 사용적 아름다움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장인들과 사용자들에 의해 추구되고 형성되어온 그러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것을 고미술품의 보편적 아름다움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아닐까?
고미술 컬렉션의 진정한 생명력과 가치는 그런 보편적 아름다움에서 비롯하는 것이고, 안목있는 컬렉터는 그런 아름다움이 잘 구현된 물건을 수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컬렉션 대상물은 적어도 누가 보아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고 가까이 두고 싶은 그런 물건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우리가 컬렉션 대상의 예술성을 이야기할 때 그런 보편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언급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하나 더 있다. '한국적 아름다움'(미감)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앞에서 한국 미술의 핵심어로 '자연에 순응하는 자유로운 창작정신'을 이야기한 바 있다. 한국의 자연은 한국인의 삶을 규정하고 그 땅에 살아온 한국 사람들의 눈을 통해 창작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 그런 자연에 순응하는 자유로운 심성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미술창작 정신으로 녹아 한국미의 원형을 형성하는 자양분이 되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우리 산하가 우리에게 편하게 느껴지고 익숙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고미술품에서 그런 느낌과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바로 한국적 미감일 것이다.
▲ 분청사기는 보편적 예술성에다 한국적 미감이 잘 구현된 우리 고미술의 대표적인 영역이다. 여유와 해학, 파형적 기형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분청 조화문 편병(일본 아다카 컬렉션 소장) ⓒ한길아트 |
참고로 우리 고미술품 가운데 그러한 보편적 아름다움에다 한국적 미감이 잘 구현된 컬렉션 영역은 어디일까? 나는 우리 도자기, 그중에서도 분청사기를 그러한 아름다움이 잘 나타나 있는 대표적인 컬렉션 대상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의 자연을 담은 옛 가구의 편안한 느낌도 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농경 생활의 지혜가 녹아있는 우리 민속품 또는 민예품에서도 그러한 미감을 발견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수많은 토기의 기형에서 발견되는 형태미에서도 그런 특질을 찾을 수 있다. 삶과 신앙과 미술이 하나였던 시대의 미술창작 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한국미의 원형으로 남아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저자 김치호 195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77년 연세대학교상경대학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통계학 석사(1983), 경제학 박사(1987) 학위를 받은 뒤 20여 년 동안 한국은행, 예금보험공사 등에서 한국의 거시경제, 통화정책, 금융위기를 연구했다. 정리금융공사 사장을 역임했고,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한국의 거시경제 패러다임>(2000, 한길사) , <고미술의 유혹>(2009, 한길아트) 등을 저술하고 논문 50여 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으며, '유망 미술작가 해외진출 후원모임'을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우리 미술시장 저변 확대를 위한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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