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많은 전란과 화재, 인재로 파괴 약탈당하기도 하고 혹은 멸실되어 수량적으로는 넉넉하지 않는 아쉬움이 크지만 컬렉션 대상 유물은 다양하면서도 각각에 개성이 뚜렷하다. 서화를 비롯해서 도자기, 금속공예품 등 전통적으로 고미술 수집문화의 중심을 형성해온 골동에다 목가구, 일상생활 잡기, 민속품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그 분야는 다양하고 각 분야에서도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형태가 다르고 양식이 다르다.
한국전쟁의 후유증과 1950~60년대의 경제적 어려움이 어느 정도 극복되면서 컬렉션 문화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시점을 1960년대 후반으로 설정하면 우리 고미술 컬렉션 역사는 이제 거의 반세기를 채워가고 있는 셈이다. 그 많은 분야에서 아직도 남들이 가지 않은 분야가 있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물건들이 있을까? 이제 막 관심을 갖고 있는 초심자들에게는 어려운 질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도 당황할 필요도 없다. 대개 세상일이 그렇듯 가능성과 기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있는 법이고, 특히 고미술 컬렉션은 가능성과 기회를 중시하는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재단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틈새와 가능성을 찾아가는 길
▲ 일본 오쓰에 (일본 민예관 소장). 도깨비의 익살스런 모습을 그린 일본의 민화인데 한국의 민화 까치 호랑이와 느낌이 비슷한 데가 있다. ⓒ한길아트 |
누구에게나 처음부터 남들이 가지 않는 영역을 찾는 것은 어렵다. 그러다 보니 컬렉션을 시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의 컬렉션 전통과 관행, 문화를 답습하기 마련이다. 그처럼 남들이 흔히 수집하는 물건을 따라 수집하는 컬렉션은 무난한 컬렉션은 될 수 있겠지만, 결코 독특하다거나 훌륭한 컬렉션은 될 수 없다. 그 벽을 깨는 길은 오직 시대적 미의식의 흐름과 변화를 읽고, 생각하는 컬렉터가 되는 것이다.
지난 1950~60년대에 흔하디흔했던 민속품이, 그림 축에도 들지 못하던 민화가 오늘날 이처럼 세간의 관심을 끌 줄 누가 알았겠는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마음으로 연구하고 찾아보면 기회는 있기 마련이고, 최소한 20~30년을 내다보는 안목으로 접근한다면, 지금의 고미술품 가격구조에서도 많은 틈새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조자용은 건축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구조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 민속과 민화의 소중함과 가치에 눈을 떠 자료 수집과 보존에 누구보다 헌신했다. 특히 우리 민화가 오늘날처럼 많은 컬렉터로부터 사랑받고 또 주요 컬렉션 영역으로 자리하게 한 그의 업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길아트 |
이와 비슷한 사례로 우리 민화수집과 그 의미 해석에 컬렉션 인생을 바친 조자용(趙子庸, 1926~2000) 선생을 들 수 있다. 우리 민화에 대해 정작 국내에서는 무관심하던 70년대 초, 외국인들이 먼저 그 가치를 알아보고 수집에 열중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그는 이후 우리 민화를 수집 분류하고 그 미술 문화적 가치를 발굴하는 데 열정을 바쳤고, 그러한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민화는 당당히 우리 고미술의 주요 컬렉션 영역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계통성이란 컬렉션의 주제와 스토리를 추구하는 것
컬렉션의 영역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컬렉션의 계통성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컬렉션의 계통성이란 한 분야(영역)의 물건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화, 도자기, 공예, 민속품 등으로 구분하거나 도자기 분야에서도 시대, 기법, 재료, 기형 등으로 컬렉션 영역을 세분화해(예: 도자기-분청-인화문-병 등) 계통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계통성을 조금 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다른 분야라 하더라도 연관 지어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그런 컬렉션을 말한다. 예를 들면, 조선 사대부 선비정신을 주제로 한다든가, 규방(閨房)문화를 주제로 컬렉션의 틀을 잡고 관련되는 물건을 수집하는 것이다. 컬렉션에 계통성이 있다는 말은 컬렉션 물건 상호간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고 컬렉션의 완성도가 높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컬렉션의 생명력이나 가치와도 관련되는 것으로서 컬렉터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전략이자 지침과도 같은 것이다.
조금 성급한 예측이기는 하나, 나는 앞으로 우리 사회의 고미술 컬렉션 문화는 전문화 쪽으로 갈 것으로 보고 있다. 그건 분명 시대 흐름이다. 여타의 취미 영역에서도 그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컬렉션이 하나의 보편적인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것저것 백화점식으로 수집하는 것은 시대정신과도 맞지 않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재력이 풍부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사 모을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런 재력에다 고미술에 대한 안목을 두루 갖춘 컬렉터가 나오기도 힘들 것이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모아진 컬렉션 가운데 과연 특색과 생명력을 갖춘 컬렉션이 얼마나 될 것인가.
▲ 연적 모음. 연적은 조선 선비들이 애용한 문방구여서 기품이 있으면서 컬렉션 가치도 높은 것들이 많다. ⓒ한길아트 |
한편 계통성을 유지하는 컬렉션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컬렉터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된다. 일종의 범위의 경제(economy of scope)를 추구하는 전략이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집하는 데는 안목도 안목이지만, 당연히 상당한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특정 분야로 컬렉션의 계통성을 세우고 전문화하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이와 관련해 수정 박병래의 컬렉션은 좋은 사례가 된다. 수정은 평생 의사로 봉직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보다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겠으나, 컬렉터로서는 넉넉지 못한 경제력 때문에 마음에 드는 물건을 앞에 두고 늘 애를 태웠다고 전한다. 물건 대금을 몇 달에 나누어 지불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런 그의 여건은 조선 백자, 그중에서도 필통 연적 등을 중점적으로 수집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조선 백자 문방구류 컬렉션은 언제 보아도 경이로운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저자 김치호 195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77년 연세대학교상경대학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통계학 석사(1983), 경제학 박사(1987) 학위를 받은 뒤 20여 년 동안 한국은행, 예금보험공사 등에서 한국의 거시경제, 통화정책, 금융위기를 연구했다. 정리금융공사 사장을 역임했고,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한국의 거시경제 패러다임>(2000, 한길사) , <고미술의 유혹>(2009, 한길아트) 등을 저술하고 논문 50여 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으며, '유망 미술작가 해외진출 후원모임'을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우리 미술시장 저변 확대를 위한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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