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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있는 상인과 장기적 신뢰관계, 그리고……

[오래된 아름다움을 찾아서]<15>

앞에서 언급한 사항들이 컬렉션과 컬렉터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 기준, 지향점에 관한 것이라면,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실제 컬렉션 상황에서 컬렉터가 취해야 할 처신이랄까 행동 지침 등과 관련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장이나 업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그리고 가격 흥정에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와 같은 것들인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의미는 크다.

먼저 시장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고미술계에도 이런저런 사연으로 형성되는 다양한 관계 문화가 있다. 함께하는 동호인이 있고, 사숙하는 선생도 있을 수 있고, 물건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공식 비공식 채널을 통해서도 다양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무엇보다 직접적이고 중요한 관계는 거래를 중개하는 상인이나 거간꾼들과의 관계이다.

상품의 정보나 가격이 공개되고 사고파는 형태가 정형화된 일반 재화시장과는 달리 고미술 시장에서는 물건에 대한 정보가 제한되어 있고, 거래 당사자 간에도 정보가 비대칭적으로 보유되다 보니 정보의 중요성이 그 어느 시장보다 큰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 시장구조에서는 통상적으로 상인이나 거간꾼들은 컬렉터가 모르는 많은 정보를 갖고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거래 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은 클 수밖에 없다.

컬렉터와 상인은 서로 믿고 협력해 훌륭한 컬렉션을 만들었다

컬렉터는 물건을 구입하고 상인은 거래를 중개한다. 따라서 컬렉터와 상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서로가 윈-윈(win-win) 할 수도 있고 함께 망할 수도 있는 관계다. 그 관계의 성패 여부는 서로 간의 신뢰에 달려 있다.

신뢰란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이끄는 협동의 규범을 말한다. 사고파는 사람이 서로 믿고 함께 승자의 길로 가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신뢰 없는 곳에 상도덕이 뿌리내릴 수 없고 거래문화가 성숙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고미술계 바깥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막상 이 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고미술 시장이 참 험한 곳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온갖 소문과 험담이 오가는 것은 상례이고 누구의 입에서는 명품이 되는가 하면 누구의 입에서는 가짜가 되고 섭치가 되는 곳이 바로 고미술 시장이다. 폐쇄적이고 음성적인데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시장을 무대로 아름다운 물건을 찾아 헤매야 하는 컬렉션 세계에서 신뢰할 수 있는 상인을 만나는 것은 컬렉터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자 축복이다. 상인도 마찬가지다. 그 험한 고미술계에서 자신을 믿고 거래를 지속하는 컬렉터를 만나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생업을 어느 정도 보장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은 훌륭한 컬렉션의 완성에 동반자가 되는 명예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훌륭한 컬렉터의 뒤에는 늘 뛰어난 감식력과 상도덕을 갖춘 상인의 뒷받침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믿고 협력해 훌륭한 컬렉션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우리는 간송(澗松) 전형필과 이순황(李淳璜)에게서 컬렉터와 상인 사이의 그런 모범적인 관계의 한 예를 찾을 수 있다. 간송이 사명감을 갖고 열정적으로 추진하던 민족 문화유산 수집을 자기일처럼 열심히 도운 이가 이순황이었고 여기에 일본인 거간 신보기조(新保喜三)도 한몫 거들었다. 그들은 당시 일본인들이 독점하다시피한 우리 고미술계의 고급 정보를 간송에게 아낌없이 제공했고 경매의 대리인으로 또는 간송이 직접 나서기 껄끄러운 일을 맡아 간송의 컬렉션 사업을 도왔다. 한 사람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대(大)수장가고 다른 둘은 상인(대리인, 세화인)인 탓에 위치와 입장은 달랐지만 그들은 서로를 신뢰했고 그런 신뢰가 바탕이 되어 오늘날 모두가 찬탄하는 간송 컬렉션의 내용이 한층 더 충실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 간송 전형필 ⓒ김영사

초보 컬렉터에게 처음부터 그런 관계까지야 기대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런 신뢰관계의 형성과 지속 여부의 단초는 상인이 제공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호기심으로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초보 컬렉터를 이해하고, 수준에 맞는 반듯한 물건을 소개하면서 컬렉터의 안목을 끌어올리는 데 협력함으로써 장기적인 신뢰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이 컬렉터와 상인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아름다운 관계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종래는 마음에 상처를 남기며 끝나는 관계가 얼마나 많은가? 급한 김에 변변치 못한 물건을 과장해 소개하고, 값을 터무니없게 부풀리고, 심지어 가짜를 팔아 단물만 빨아 먹고 내팽개치는 상인들이 한둘인가? 그러기에 우리 고미술계에서 안목과 상도덕을 갖춘 상인을 찾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컬렉터도 마음에 새길 것이 있다. 너무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신뢰는 한순간 만들어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너무 완벽한 조언과 가이드를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도 부단히 노력하면서 상대방과의 대화의 폭을 넓혀나가되 그 사람의 능력과 심성이 인정되면 믿고 도움을 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때때로 상대방이 조금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그들의 관계는 두터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충분한 신뢰 관계가 만들어지면 물건구입 창구를 그쪽으로 단일화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상인에게는 거래가 생업의 수단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컬렉터와 상인, 좋은 의미에서 서로를 이용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즉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과 상인의 이해 관계를 뛰어넘을 때 고미술 시장은 성숙하고 컬렉션 문화는 발달하는 것이다.

▲ 고미술 상가가 몰려 있는 일본 교토(京都)의 데라마치 토오리(寺町通り). 일본의 고미술 시장은 역사도 오래되고 그들의 시장규율 등 거래 문화는 우리가 본받을만한 데가 많다. ⓒ한길아트

가격에 너무 집착하면 마(魔)가 낀다

물건을 사고파는 상거래에서 가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더욱이 늘 빠듯한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며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물건을 사 모으는 보통 수준의 컬렉터에겐 가격보다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있다. 고미술 시장이 바로 그런 곳이다. 물론 이곳도 시장이다 보니 모든 거래는 궁극적으로 가격 조건에 의해 마무리되지만, 이 말의 요지는 물건의 구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의 무게중심을 너무 가격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정말 훌륭한 물건에 대해서는 한 돈 더 주고 사는 것이 고미술품이듯, 고미술품에는 가격 외에도 아니 그 이상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고미술품 컬렉션은 컬렉터의 생애에 걸쳐 긴 시계(時界, time horizon)를 두고 진행된다. 그렇다 보니 컬렉터와 시장, 컬렉터와 상인들과의 관계도 신뢰를 토대로 제대로 된 관계라면 길게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고미술 시장은 생각보다 좁다. 한두 사람 건너면 다 알만한 관계로 연결되는 곳이다. 그런 바닥에서 컬렉터가 좋은 인상으로 통할 수 있도록 처신하고 그들과 싫든 좋든 간에 원만한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큰 자산이 된다. 물건을 흥정할 경우에도 때에 따라서는 물건에 흠결이 있고 가격이 비싼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어수룩함이 긴 안목에서는 좋은 물건을 접할 기회를 늘리는 현명함이 되는 것이다. 주머니 사정이 조금 어렵더라도 여유 있게 임하는 느긋한 자세가 필요하고, 특히 초보 컬렉터는 물건 가격에 배우는 수업료를 얹혀준다는 생각으로 가격에 조금 여유를 두고 수집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은 좀 비싼 가격에 물건을 사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훌륭한 물건을 좋은 가격에 수집하는 경제적인 컬렉션으로 가는 길이다.

이와 관련해서 한 원로 고미술 감정인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참고될 수 있다. 그는 여러 해 전, 이름을 이야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 여성 연예인의 초청을 받아 그녀가 수집해놓은 물건을 감정할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물건의 양도 엄청났고 가짜도 많았지만, 정작 놀라웠던 사실은 그중에 정말 훌륭한 물건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물건을 보는 안목은 부족했으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 상인들이나 나카마들이 가져오는 대로 별 말없이 때로는 조금 깎는 선에서 물건을 사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한 때는 전국의 물건들이 그녀에게로 몰려들었고 그 속에 정말 좋은 물건들이 섞여 들어왔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좋은 물건 몇 점만으로도 충분히 그동안의 비용을 상쇄하고 남으니, 그녀의 어리석음(?)이 세상 상인들의 영악함을 이겼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너무 가격에 집착하다 만나게 되는 치명적인 위험은 위모작(僞冒作)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시장 상인들은 보통 컬렉터들의 주머니 사정의 약점을, 그래서 가격에 연연해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 가격에 집착하는 컬렉터는 이들의 주된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 특히 시장 사정에 어두운 초보 컬렉터일수록 그런 함정에 빠질 위험이 높다. 적정한 가격에 물건을 거래한다는 것은 비단 상인만이 아니라 컬렉터에게도 요구되는 덕목인 것이다.

세상에 예산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컬렉터는 없다.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가격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된다. 다른 대안으로 다른 방법으로 더 훌륭한 물건을 수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곳이 바로 고미술 시장이기 때문이다.

저자 김치호

195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77년 연세대학교상경대학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통계학 석사(1983), 경제학 박사(1987) 학위를 받은 뒤 20여 년 동안 한국은행, 예금보험공사 등에서 한국의 거시경제, 통화정책, 금융위기를 연구했다. 정리금융공사 사장을 역임했고,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한국의 거시경제 패러다임>(2000, 한길사) , <고미술의 유혹>(2009, 한길아트) 등을 저술하고 논문 50여 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으며, '유망 미술작가 해외진출 후원모임'을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우리 미술시장 저변 확대를 위한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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