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지난 20여 년 동안 고미술업계를 나름대로 애정을 갖고 관찰해온 나로서는 분명 우리 고미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높아지면서 컬렉터의 층이 두터워지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다. 언뜻 보기에 세상은 무질서하고 발전이 없는 것 같지만, 세월이 얼마간 흐른 뒤에 보면 훌쩍 변해있는 것처럼, 우리 고미술 시장도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고미술에 입문하는 사람은 서화로 시작해 점차 안목이 높아질수록 도자기, 금속공예품 쪽으로 옮아간다고 한다. 이들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통적으로 우리 고미술 컬렉션의 중심축을 담당해왔던 영역이다. 근래 들어서는 경제력 향상과 더불어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미술 컬렉션에서도 양과 질 두 측면에서 꾸준한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과거 서화, 도자기류로 대표되던 골동 영역에서 벗어나 목가구, 생활용품, 민속품도 우리 전통 생활문화의 가치에 대한 재인식과 맥을 같이 하면서 새로운 컬렉션 영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불과 30~40년 전만 하더라도 정통 고미술품 또는 골동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들이다. 아무튼 고미술품에 대한 관심분야가 농경시대의 민속품이나 생활 잡기로 확대되고 있는 배경에는 이들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점이 작용했을 것이고, 또 과거 실생활과 밀접한 것들이어서 다가가기가 쉽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최근 이들의 경제적 가치도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 삶과 신앙과 미술이 하나였던 시대에 만들어진 물건들에는 민속적이고 민예적인 속성이 강하다. 꼭두, 무속화, 등잔대 등 그 옛날 이런 물건들을 만든 사람들은 후세 사람들이 큰 돈을 들여 이들을 수집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무속도 한 컷, 등잔대 사진을 같이 배열) ⓒ한길아트 |
그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우리 고미술에 관심을 갖고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 전부가 컬렉션의 유효수요층이 아니더라도 우리 고미술 애호가들의 저변을 두텁게 하면서 언젠가는 컬렉터로 나아갈 잠재적 컬렉터들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가끔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고미술품 중에서 어떤 영역의 어떤 물건이 좋으냐고. 컬렉션의 세계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라고 해 타인에게 수집을 권유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미술품 컬렉션은 지극히 주정적이고 주관이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 경제적 가치로 따진다면야 고급한 도자기나 품격 있는 서화가 있을 것이고 금동불상과 같은 금속공예품도 그 중심에 있을 것이다.
옛사람의 숨결이 서려있고 시간의 흔적과 교감할 수 있는 물건을 찾아서
내가 처음 고미술에 입문하고 그 문턱에서 묘미를 조금씩 알아갈 무렵에는 대부분의 초보 컬렉터들이 그러하듯, 나도 우리 고미술 컬렉션의 보편적인 기준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것이 사실이다. 가끔 내 경제적 능력 범위 안에서 한두 점씩 사본 물건들도 대개가 그런 컬렉션 가치 기준에 부합하는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기가 한참 지난 후 나는 수준을 높여가며 그런 종류의 물건을 계속 수집하는 컬렉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넉넉지 않는 월급으로 살아가는 경제력으로 그런 고급한 정통 고미술 영역의 물건을 수집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이후 내 관심은 그냥 느낌이 가고 옛사람의 영혼이랄까 숨결이 서려 있고 시간의 흔적과 교감할 수 있는 물건으로 옮아갔고, 그것들을 찾아보는 과정에서 자연히 우리 전통 미술의 민예적 특질과 그 아름다움을 찾는 데에 관심이 집중되어왔다. 그래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의 미술공예운동을 비롯해서 야나기 무네요시가 1930, 40년대 일본의 민예운동을 주도하면서 남긴 글과 정신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참고로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엇갈린다. 일본에서도 그의 민예론을 비판하는 주장들이 많다. 그러나 그의 이론과 주장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물건을 보는 그의 뛰어난 심미안과 선택안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내가 야나기의 저작물을 읽으면서 감탄한 그의 탁월함이란 당시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민예품에 최초로 주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고의 물건들을 골라냈다는 점이다. 대단한 심미안이고 시대에 앞서 그 가치를 알아보는 혜안이었다.
야나기의 수집과 미학 정신은 그의 <수집물어(蒐集物語)>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일상 잡기의 아름다움'에 주목했고, 특히 한국미술에 구현되어 있는 민예적 성격의 예술성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했다. 그는 민예 양식의 특징으로서, 소박함, 간명한 구성, 과도한 장식이 없는 것, 고도의 기술과 정밀한 기교가 없는 것, 지방성 등을 들었다. 일찍 그가 주장한 한국미술의 특질을 논의하면서 내세웠던 이야기들인데, 이것들은 우현 고유섭의 한국미론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 관련해 내가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인간부흥의 공예를 주창하는 이데카와 나오키(出川直樹, 1940~)의 관점이다. 그는 야나기의 '민예'를 넘어서 '인간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독특한 공예론을 전개하고 있는데, 우리 고미술을 보는 나의 관점에도 좋은 지침이 되고 있다.
우리 고미술에 대한 나의 관점은 그러한 민예적 특질을 주장한 야나기의 관점과 일치하는 데가 많다. 즉 민예적 양식에 충실한 물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그것이다. 야나기가 주목한 일상 잡기의 아름다움 또는 생활로서의 미술 정신이 잘 구현되고 있는 장르의 물건들, 예를 들면, 우리 목공예품에 대한 관심이 그렇고 민화에 대한 사랑도 그 연장선에 있다. 완상용이 아닌 생활용기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민족의 일상 생활의 지혜와 미감이 깊게 배어 있는 토기에 대한 나의 관심도 같은 맥락이다.
뿌리칠 수 없는 유혹, 멈출 수 없는 여정―사랑하며 함께 가자
우리 고미술에 대한 나의 사랑과 관심은 앞으로 상당 기간은 민예적 아름다움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지 않다. 내게는 화려 섬세한 청자보다는 분청의 자유분방함과 무심함이 좋고, 금동불상의 완벽한 조형과 터치보다는 돌에 새겨진 장승이나 동자석(童子石)의 표정에서 민속, 민중 미술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우리 미술의 강한 생명력을 확인한다. 이미 우리 몸에 체화(體化, embodied)되어 있으면서 어떻게 말이나 글로써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은 여전히 우리 선조들의 삶의 지혜와 소망이 담겨 있는 그런 물건에서 더 진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 목동자상은 사찰의 명부전에 모신 시왕(十王)을 좌·우에서 협시하거나 응신전의 나한상 옆에 봉안되었던 것인데, 천진난만한 표정에 보면 볼수록 사람의 마음을 흡입하는 그 무엇이 있어서일까. 가격도 상당하고 찾는 사람도 많다. ⓒ한길아트 |
나는 그들을 가까이 두고 세월을 넘어 대화를 하고 싶다. 한걸음 더 나아가 현대미술과의 소통을 꿈꿔보기도 한다. 그건 우리 고미술에 대한 나의 일관된 염원, 즉 현대와 고대, 작위와 무작위, 유명(有銘)과 무명(無銘)의 대비를 통한 오래된 아름다움과의 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는 이 연재를 마감하면서 내가 그동안 묻어두었던 몇 마디 이야기를 할 때다. 나는 이 글에서 지난 20년 넘게 동안 내가 가슴속 한켠에 담아 때로는 열병에 들떠 즐거워하고 때로는 고심하며 지내온 고미술 사랑을 컬렉션이란 화두로 풀어보고자 했다. 부족하지만 나의 생각과 관점, 체험을 바탕으로 독자들을 고미술 컬렉션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에둘러 표현하면 고미술 컬렉션이라는 짙은 안개 늪으로 독자들을 유혹하고 그 속에서 방황하며 도망가지 못하도록 잡아두는 것이 숨은 의도라면 의도였다. 우리 인간은 그런 방황을 통해 인간본성의 순수와 자유에 한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행간에 담은 나의 메시지와 속내가 얼마나 독자들의 가슴에 전해졌을까? 바라건대 고미술 컬렉션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그런 자리에 독자들이 함께 했다면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고미술 컬렉션,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고 멈출 수 없는 여정이라면 사랑하고 함께 가야 하는 것. 멈칫거리고 이것저것 따지기에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다. 그런 컬렉션 세계로 가는 여정에 앞으로도 내가 독자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진흙탕 길이라 해도 결코 마다하지 않겠다. 그래서 언젠가 또 만날 것이고 만나야 할 것이다.
* 이상 김치호의 <오래된 아름다움을 찾아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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