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태규 명리학 <73>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73>

박산(博山) 향로에 담긴 비밀

지난 1993년 12월 12일 오후 5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충남 부여의 옛 절터에서 백제 문화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는 금동대향로가 발굴되었다. 후에 이 향로는 국보 제 287호로 지정되었다.

향로의 기본 형태는 박산 향로이며, 여기에 불교 사상이 가미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먼저 박산 향로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림을 보면서 알아보자.

<사진>

박산 향로란 중국 한(漢)대와 진(晋)대에 성행했던 향로의 형식으로서, 가운데의 몸체 부분이 바다 가운데 신선들이 살고있다고 믿어지는 박산 즉 봉래산(蓬萊山)을 조형화한 것이다.

박산 향로는 대부분 도자기로 만들어졌지만, 백제의 옛터에서 1300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 박산 향로는 금동제이며, 높이가 64cm에 달하는 초대형이다. 이 박산형 백제 금동 대향로는 현존하는 동아시아 향로 중에서 가장 우수한 걸작품이며,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최고의 예술품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향로 전체에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18명의인물과 65마리의 동물, 4곳의 산봉우리, 그리고 향을 피우면 봉래산과 봉황의 가슴을 통해 나오는 12개의 구멍들은 보기 어려운 독창적 예술의 표현이다. 1,300년전 당시의 백제 금속공예 기술은 오늘날에도 재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데, 청동을 재료로 하여 밀납법으로 향로의 몸체와 봉황의 속을 공간으로 비워서, 향을 피우면 연기가 밖으로 나가도록 하였고, 아말감 처리를 하여 찬란한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 유행했던 음양설과 불교의 연화화생(蓮花化生)사상이 깃들여진 이 박산형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시기를 음양 오행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년 癸酉
월 甲子
일 丁卯
시 戊申

년의 癸水가 월의 甲木을 생하고, 갑목은 문화를 뜻하는 丁火를 생하는 날, 戊土시에 스스로를 세상에 다시 내보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기운이 화기를 띄고 상생(相生)하는 날에 백제 문화의 진수를 담은 보물이 오랜 세월을 격하여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오늘 필자가 얘기하려는 것은 백제 문화의 우수성도 아니고 박산 향로에 관한 것도 아니다. 주제는 박산이란 어휘 속에 있다.

박산을 한자로 쓰면 博山이다. 앞서 박산을 바다 한 가운데 어느 곳에 신선들이 살고있는 봉래산이라 했지만, 원래의 박산은 오늘날 중국 산동에 있는 태산을 의미하던 말이다. 높은 태산에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가 나중에 지리적 외연이 확장되면서 바다 한가운데로 신선의 거처가 옮겨간 것이다. 그런데 산동과 오늘날의 북경 일대는 옛날 연(燕)과 제(齊)의 땅으로서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연과 제는 중국 민족이 아니라 우리와 가까운 동이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다.

연과 제의 지역, 정확히 말하면 발해만 일대는 음양 오행과 신선 사상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음양 오행과 신선 사상은 중국인들의 것이 아니라, 동이 사람들의 소산(所産)이다. 좀 있다가 얘기하기로 하고 먼저 박산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태산은 오래 전에는 岱山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가장 오랜 이름은 박산이다. 사실은 박산이 아니라 '박'이며 그 뜻은 산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는 '박'은 중국어가 아니라 순수 우리말로서 지금 우리말에 있는 '바위'나 '메'의 원형이 바로 '박'이다. 그러니 박산은 동의반복(同意反復)이다. 우리말인 '박'에다가 중국인들이 그들의 말인 '산'을 붙인 것이 바로 박산이다.

박이 한자로 博이니 한자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한자 이전에 '박'이란 말은 동이 사람들이 쓰던 '산'이라는 보통 명사였고, 나중에 그에 해당되는 博이라는 글자를 붙인 것이다. 하지만, 博이라는 글자 역시 그 뜻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 뜻은 '넓다'는 것인데, 산에 올라가면 저 먼 곳까지 다 보이니 넓다는 뜻으로 전화(轉化)된 것이다.

다시 말해 박은 동이 사람들의 말이고, 그 말은 우리말에도 그대로 남아서 내려오고 있다. 바위의 원형은 '바우'인데, '박'에서 기역 받침소리가 탈락한 소리이다. 또 산을 뜻하는 '메'는 b 가 m 으로 바뀐 것인데, 언어의 세계에서 이런 현상은 대단히 흔하게 나타난다. 가령 인도의 대도시 '봄베이'가 최근에 와서 '뭄바이'로 바뀐 것도 그 예이다. 보편적인 자음대체 현상인 것이다. 메라는 어휘는 에서 로 변했다가 로 변하고 다시 이조 중엽에 뫼로 변했다가 오늘날엔 메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백제(百濟)의 원형은 박께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뜻은 밝땅이며, 이는 박달과 동의어인데, 박달은 우리 나라 전국에 걸쳐 대단히 흔한 지명일 뿐 아니라 중국 발해만 일대에도 널리 퍼져있는 지명이다. 중국 만리장성 입구에 위치한 팔달령(八達嶺) 역시 박달재이다.

우리말에서 때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고 곳은 장소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원래 우리말에서 시간과 공간은 구분이 없었다. 다만 구개음화를 통해 변하는 소리에 변별력을 주어 다른 명사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라는 '어느 제'라는 말의 준말인데, 여기서 제는 시각이고, '어디'라는 '어느 데'라는 말의 준말로서 여기서 '데'는 장소를 뜻한다. 데의 원형은 인데 이것이 구개음화되어 로 변하고 여기에 시옷 받침이 붙어 '곳'으로 변했을 뿐이다.

따라서 곳과 제, 데는 모두 시간과 공간을 나타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가령 돼지는 데지인데, 데는 땅이고 지는 우리말에서 짐승을 뜻하니 원 뜻이 땅짐승이란 것을 알 수 있다(여기서 필자는 한글 워드를 쓰고 있어 언어학적으로 정확한 표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처음에 박산은 태산이었다가, 나중에 해양 문화의 영향으로 신선은 저 바다 멀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생겼고, 그 바람에 박산은 바다에 있는 봉래산으로 변했던 것이다.

중국 문화의 중심요람지는 바로 오늘날의 산동 지방이며, 그 중심축은 동이 사람들이었다. 동이 사람들은 북쪽 멀리에서 내려온 사람들로서 나중에 활동의 중심지는 발해만 일대, 그 중에서도 오늘날 베이징 동쪽의 난하가 중심 권역이었다. 바로 단군 조선의 발상지이다. 그리고 산동 지방 역시 발해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에 는 황하가 들어갈 것이 아니라, 발해가 들어가야 맞다. 동이 사람들은 바로 4대 문명의 하나를 일구어낸 사람들이다.

베이징 일대에서 발흥했던 연(燕)나라가 왜 국호를 연이라 했던가? 연이 제비인데 그들의 깃발 속에는 삼족오(三足烏)가 들어가 있었다. 삼족오가 무엇인가? 바로 고구려의 상징이다. 제비나 까마귀나 까치 모두 태양의 사자로서 태양을 숭배하던 동이 사람들의 상징물이다. 중국은 제비이고 한국은 까치이며, 일본은 까마귀로 약간 달리 하고 있을 뿐, 모두 옛날에는 같은 태양의 사자였으며, 나중에 태양의 사자는 봉황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박산 향로 꼭지에는 봉황이 앉아있는 것이다.

연을 떠난 위만이 조선 땅에 와서 위만 조선을 세웠다 하는데, 사실 연 사람들과 고구려 인들은 같은 말을 쓰던 사람들이었고, 같은 동이 사람들이었다.

그런 제(齊)나라는 왜 국호를 제라 했던가? 간단하다. 제는 우리말의 제이고 땅을 나타내는 말이다. 齊를 한자사전에서 찾아보면 세상의 중심이란 뜻이 있다. 제 나라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에 위치한다고 여겼었고, 제의 원 뜻은 단순히 땅이다.

음양 오행 사상을 처음으로 말한 사람이 바로 제 나라 출신의 추연이란 사람이었고, 진시황을 꼬드겨서 동남동녀 3천을 데리고 바다로 떠났던 서불(徐市) 역시 연 나라 출신의 방사였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재미난 것은 서불이라는 이름에서 불을 시(市)라고 쓴다는 것이다. 왜 시가 불일까? 그 이유는 市의 고음(古音)은 불이었기 때문이다.

市는 마을이란 뜻인데 원 발음은 불이었으며, 그 불은 바로 우리의 옛 지명들 속에 무수히 남아있다. 서라벌, 이사벌, 그리고 백제의 무수한 마을 이름들이 모두 '-불'이다.

연나라 사람들도 마을을 불이라 했고 우리 선인들도 마을을 불이라 했던 것이다. 동시에 마을이란 어휘 역시 원형이 불이었던 것이 앞서처럼 b가 m으로 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市는 발음이 '불'이었는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중국 서쪽 사람들의 발음인 '시'로 변했던 것이다.

땅을 데, 제 라고 했으며, 마을을 불이라 했으며, 산을 박이라 했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동이의 말을 쓰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알려진 기자(箕子) 역시 箕땅을 다스리는 사람이란 뜻인데, 여기서의 箕 또한 우리말로 '데'나 '땅'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이다. 중국 사람들이 나중에 우리말을 몰라서 땅을 뜻하는 보통명사 箕를 고유명사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연 나라의 도읍지는 지명이 계(薊)인데, 그 뜻 역시 땅이라는 우리말의 보통 명사였다.

앞서 연 나라의 상징이 삼족오라고 했지만, 사실 은상의 시조 전설 또한 맥락을 같이 한다. 은은 그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새(玄鳥)라고 하는데 이 역시 태양을 숭상하던 동이 사람들의 신화와 전통에 속한다. 우리의 난생설화(卵生說話) 역시 태양의 사자인 새로부터 조상이 기원한다는 신화를 반영하고 있으니 은상의 시조설화와 맥을 같이 한다.

아울러 음양 오행과 신선 사상의 발상지인 연과 제 지역 역시 나중에 주(周)가 은상(殷商)을 멸한 후, 주나라 사람들에 의해 지배 동화되면서 서서히 중화문명으로 편입되어 갔으며, 진시황의 전국 통일로 연과 제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연과 제의 역사는 엄밀히 말해서 우리 민족의 역사 체계 내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박산 향로에서 박산은 원래 태산이었으며, 백두산과 함께 동이 사람들의 영산(靈山)이었다. 나중에 연과 제의 해양 문화적인 영향을 받아 박산은 서해 바다의 전설적인 봉래산으로 장소를 옮겨갔지만, 태산은 중국 문화에서 여전히 높은 위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황제가 되면 태산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封禪)의식이 바로 그 잔재인 것이다.

필자는 좀처럼 주역(周易)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역은 주나라 사람들의 문화소산이고 음양 오행은 동이 사람들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주역과 음양 오행은 그 본질에 있어 사상 체계나 철학을 달리하고 있다. 나중에 중국 후한(後漢)대에 가서 음양 오행과 주역이 하나로 섞여버렸지만, 주역은 주역이고 음양 오행은 음양 오행인 것이다.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공자가 말한 괴력난신의 대표 주자가 바로 음양 오행이었고 좀 더 붙이면 산해경(山海經)의 세계, 신선의 세계였다. 공자의 예악(禮樂)을 회복하겠다는 말은 '주(周)에 의한 평화'(Pax Chou)를 다시 이룩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묘한 것은 공자가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공자가 말한 바로 그 괴력난신 즉 음양 오행 덕분이었다. 좀 더 설명하면, 음양 오행이 유교의 핵심 교리로 들어오면서 유학은 유교가 되었고, 음양 오행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의 지도 원리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