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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꽃나무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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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꽃나무 도둑'

[새 연재] 정문술의 '거꾸로 인생론'-'노욕(老慾)' <1>

오늘부터 벤처경영인 정문술씨(65)의 <거꾸로 인생론-'노욕(老慾)'>을 연재한다. 매주 월,화,목,금요일에 걸쳐 네차례 연재할 예정이다.

정문술씨는 지난 80년대초 40대의 늦은 나이에 벤처업계에 뛰어들어 '신뢰와 자율'이라는 경영철학으로 '미래산업'을 세계 유수의 반도체장비 업체로 키워낸 입지전적 인물. 미래산업은 지난 1999년 두루넷과 함께 국내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나스닥에 상장됐다. 특히 그는 2001년 미래산업의 경영권을 가족에 세습하는 대신 종업원들에게 물려준 데 이어 국내 첨단산업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KAIST에 사재 3백억을 기부해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편집자

***꽃나무 도둑**

내가 직원 여섯 명과 함께 미래산업을 창업한 것은 1983년의 일이다. 그리고 반도체 핸들러를 국산화하여 미래산업을 비로소 '반도체 제조장비 업체'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90년대 초의 일이다. 그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미래산업은 무척 어려웠다. 몇 번의 개발 실패가 계속되자 나는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집안 형편이야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어려웠던 시절에도 아내는 앞마당의 금송, 고려영산홍, 기리시마(일본 철쭉), 주목 등을 아이들과 함께 정성들여 가꿨다. 시내에 있던 집을 팔아 청계산 골짜기로 이사를 하면서 생겼던 약간의 여유자금으로 들여놓은 관상수였다. 당시 사정으로야 사치임에 분명했지만, 그만한 것에라도 식솔들이 정을 붙이고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다.

1988년 어느 월급날, 간신히 잔고를 맞춰놓았더니 경리직원이 은행 앞에서 날치기를 당하는 사고가 터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직원들을 위로하긴 했지만, 사실 그날은 더 이상 사무실에 버티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친구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빌려온 마지막 사채였다.

일찌감치 퇴근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마당을 한참이나 서성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래도 뭔가가 이상했다.
꽃나무가 무성해야 할 자리에 듬성듬성 구덩이가 패여 있는 게 아닌가.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던 나는 아내를 불러 버럭 역정을 내었다. 그날 아내는 내 앞에서 말없이 울었다. 꽃나무를 한 그루씩 팔아가며 연명해야 하는 세월이 아내에겐들 오죽했을까.

차차 형편이 좋아지면서 다시 신경을 쏟다 보니, 이제는 제법 볼만한 정원이 되었다. 은퇴한 후로 부쩍 한가해진 요즘의 두 늙은이에게는 다시없는 소일거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2002년 6월 중순, 난데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집 마당에서 제일 그럴듯했던 일본 철쭉 한 그루의 허리께가 무참히 잘려나간 것이다.

궁핍했던 시절에도 팔지 않고 그냥 두었더니, 근년에는 화려하고 무성한 꽃사태로 보답하는 애틋하고 기특한 놈이었다. 만일 거칠게 꺾어져 있었다면, 우리 집 앞마당이 등산로와 연해 있는 터라 술 취한 등산객의 주정쯤으로 짐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철쭉의 허리를 자른 것은 분명한 톱이었다. 안타깝기도 했지만 어쩐지 섬뜩했다. 원한 가진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남의 멀쩡한 꽃나무에 톱질이라니.

다시 8월 중순, 각지에 비 피해가 극심했다. 우리 집에도 수해가 있지 않을까 싶어 비옷을 입고 집 안팎을 돌아
보았다. 헌데 기가 막힌 일이 또 벌어져 있었다. 볼썽사나우나마 허리가 꺾인 채 그대로 두었던 나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뿌리채 뽑혀나간 구덩이 주변엔 발자국이 어지러웠다. 아무리 반토막이지만 우리 집 관목들 가운데 무성했던 놈 중의 하나였으니, 뿌리까지 온전히 챙겨가려면 장정 한 사람의 힘으로 어림도 없으련만 발자국은 분명 하나였다.
아내는 펄쩍 뛰었다. 내 속도 이렇게 쓰리건만 꽃나무에 얽힌 추억과 애환이 남달랐을 아내임에랴. 아내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발자국을 좇아 범인을 꼭 잡아오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비 내리는 산길을 건성으로 오르내리는 동안, 내 머리 속은 꽤나 복잡했다. 도대체 어떤 작자가 이런 이상한 짓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했을까. 나는 졸지에 탐정이 된 기분이었다.

청계산 자락에 있는 우리 집에는 담이 없다. 그저 조밀한 관상수들이 울타리 구실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꽃이 한창인 계절이면 등산객들이 자연스레 앞마당까지 들어와 사유지인 줄도 모르고 꽃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고 김밥도 먹는다. 정원 한쪽에 아예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는 사람들까지 있다.

아마 범인도 그런 등산객들 중의 하나였으리라. 우연히 그 화려하고 이국적인 꽃나무를 발견하고 감탄을 했으리라. 돈을 주고서라도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물건의 자태로 보아서는 아예 말도 못 붙이게 하리라는 짐작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발길이 안 떨어졌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자꾸 그놈이 눈에 밟혀 생몸살을 했을 것이다. 결국 등산을 핑계 삼아 또다시 우리 집 마당을 찾아와 기웃거렸을 것이다. 그리곤 결국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훔쳐가자.

하지만 저토록 가지가 무성하고 덩치 큰 관목을 어떻게 통째로 가져간단 말인가. 차라리 반토막을 내서라도 훔쳐가자는 독한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 뿌리만 성하다면 싹이야 다시 틔우면 되고, 근본이 어디 가지 않으니 오래잖아 화려한 꽃도 다시 피리라 자위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꽃이 좋아 욕심을 내는 사람이, 꽃이 한창인 나무에 톱을 대는 짓만은 차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꽃 지는 6월이 되어서야 톱과 삽을 들고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톱질을 하고 나니 겁에 질려 삽질까지는 못하고 그대로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아쉬움과 안타까움 속에 한두 달이 지나고, 장마철이 되자 아마도 다시 용기를 냈으리라. 장마철에는 등산객이 드물고, 주인집에서도 바깥에 신경을 쓰지 못할 것이며, 땅이 무를 테니 변변한 삽질 없이도 뿌리를 쉽게 떠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다시 한번 완전범죄를 꿈꾸며 빗속에 삽을 챙겼을 것이다.

우리 동네 사람은 분명 아니다. 이런 정도의 꽃나무라면 어디에 심더라도 금세 남의 눈에 띌 것이니 그렇고, 사전조치부터 마무리 결행까지의 시간적 간격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관상수 절도단의 소행도 아니다. 우리 마당에는 안목있는 애호가들이 좋아할 만한 나무들이 꽤 있었음에도 유독 일본 철쭉 한 그루만, 그것도 훼손한 상태로 훔쳐갔기 때문이다.

푼돈을 바란 좀도둑의 소행 또한 아닐 것이다. 꽃나무는 원래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야 부르는 게 값일 수도 있겠지만, 정작 시장의 가격이라는 것은 대수롭지 않기 때문이다. 멀쩡한 상태로 내놔도 몇 십만 원이 고작이었을 물건을 허리까지 꺾어놨으니 사자는 이가 나설 리도 만무했다.

어쨌든 4, 5개월에 걸친 장시간의 수고로움으로 얻은 게 기껏 나무 뿌리 하나라니. 더구나 발각되었을 때 감수해야 할 망신까지 염두에 두자면 얼마나 어리석은 도둑인가 말이다. 아내는 경찰서에 신고라도 해둬야 하는 것 아니냐며 잔소리였지만, 나는 그 황당한 도둑을 용서하기로 했다. 공범을 동원할 주변머리도 없어 하필 비 오는 날 그 무거운 것을 혼자 껴안고 끙끙댔을 그를 생각하면 오히려 안쓰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엉뚱함이 귀엽게 여겨지는 바도 있었다. 그는 우리 집 마당의 수백 종의 화려한 꽃나무 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하나'만을 선택했다. 또한 가지를 먼저 잘라내고, 나중에 다시 밑둥을 뽑아가고, 그리고 어딘가에 심어 다시 꽃을 볼 수 있을 때까지의 시간을 따져보면 최소 '3년짜리 프로젝트'라 할 만했다.

줄기를 잘라낸 후에 다시 장마철을 기다리는 용의주도함도 제법이었다. 소위 '타이밍'을 고른 게 아닌가. 게다가 마을 입구에 차를 대고 훔쳐간 것도 아니다. 발자국으로 보아서는 자신이 직접 둘러매고 일부러 산을 빙 돌아 반대편 기슭으로 내려간 것이 분명하다. 미련함일까 치밀함일까.

나는 어쩌면 꽃나무 도둑으로부터 '나'를 발견하고 너그러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기술개발에 중독되어 손익계산마저 잊고 20년을 숨가쁘게 달려온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신을 사로잡은 꽃나무 한 그루만을 생각한 채 오랫동안 고위험을 감수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의 용의주도함을 잃지 않고 시점을 골라가며 과감한 결행을 했다는 점에서도 나와 닮았다. 그에게서 나 자신을, 또한 벤처정신을 보았다면 과잉해석일까.

이 나이가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열정과 위험을 사랑한다. 그 아름다운 무모함을 죽는 날까지 곁에 두고 싶다. 벤처인이 벤처인에게 그깟 꽃나무 한 그루쯤 못 떠줄까. 나는 차라리 이 땅에 꽃나무 도둑들이 넘쳐났으면 좋겠다. 모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로 온나라가 가득해졌으면 좋겠다.

***필자 정문술 약력**

필자 정문술은 193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남성고를 나와 원광대 종교철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군에 입대한 후 행정병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제대와 동시에 중앙정보부에 5급 공무원으로 특채, 그후 18년 동안 기조실 조정과장(부이사관 역임)으로 일했다.

1980년 마흔둘의 나이로 강제 해직된 후, 퇴직금으로 풍전기공이란 금형공장을 인수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그때 맺은 인연을 자산으로 다시 1983년 부천공단에서 미래산업을 창업한다.

창업과 동시에 미래산업은 '리드프레임 매거진'이라는 정밀기구를 개발하여 반도체 제조장비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한다. '매거진'의 성공을 발판으로 3년간 '무인웨이퍼 검사장비'라는 최첨단 제품의 개발에 매진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1988년에는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그동안 축적된 기술을 밑천으로 다시 '반도체 테스트 핸들러'의 개발에 뛰어들어 1년 만에 '핸들러' 국산화의 주역으로 당당히 재기한다.

1990년 12월에 미래산업주식회사로 법인 전환을 한 후, 91년에는 '장영실상'을 수상, 92년에는 '산업기술개발동상', 94년에는 '5월의 중소기업인상'을 수상하는 등 미래산업은 반도체 제조장비 선두업체로 꾸준히 성장해 나간다.

파격적인 직원복지정책과 '신뢰와 자율'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업문화가 안팎의 인정을 받게 되면서부터 <미래산업>이 매스컴과 투자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고 '정문술의 거꾸로 경영'이 벤처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93년 12월 부천에서 천안으로 본사를 이주할 당시, 전직원이 회사를 따라 천안으로 이주하여 세간의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5년 코스닥 등록, 96년에는 증권거래소에 상장하여 '최단기간 최고 주가상승률'의 황제주 바람을 이끌었다. 98년에는 한국 증시사상 최초로 1/50 액면분할을 단행하기도 했다.

1997년 7월, 핸들러에 이은 미래산업의 차기 주력제품으로 'SMD마운터'를 개발하기로 결정, 분당에 미래연구센터를 설립한다. 한국능률협회가 주는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하던 1998년에는 당시의 IMF경제 위기와 대량해고 분위기에 작은 희망을 보태고자 <왜 벌써 절망합니까>라는 제목의 저서를 발간했다.

1999년에는 소프트포럼㈜, 라이코스 코리아㈜, 사이버뱅크㈜ 등의 벤처계열사를 분리독립시키고, 반도체 제조장비 분야에 집중하기 위해 천안에 미래산업 제2공장을 준공한다. 1999년 11월, 두루넷과 함께 국내 최초로 미국 나스닥에 진출, 이듬해 2월에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상황에서도 1억 2천만불의 ADR발행에 성공했다(1 ADR = USD 16.08).

2000년에는 ㈜미래온라인 및 코리아인터넷닷컴㈜ 등 벤처계열사를 추가로 설립하고, 인터넷 문화컨텐츠업체인 ㈜컬티즌을 창업지원하기도 했다. 또 그해에 연세대 기업윤리자대상과 조세의 날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01년 1월, 장대훈 부사장에게 미래산업 대표이사 자리를 물려주고 경영일선에서 은퇴하였다.

곧이어 세계적으로 선례가 없는 바이오와 IT, NT의 융합기술 관련 차세대 신학문 학과를 신설해달라며 KAIST에 사재 3백억원을 기부했다. 이에 따라 <KAIST>는 2002년에 바이오시스템학과를 신설함으로써 국내외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는 벤처농업대학의 학장으로 봉사하면서 '의미있는 일'을 모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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