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버림'-낮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버림'-낮술

정문술의 거꾸로 인생론-'노욕(老慾)' <2>

***낮술**

2001년 새해, 내 머릿속에는 '은퇴'라는 한 단어뿐이었다. 오래전부터 공언해왔던 일이었고, 이제는 때가 되었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바지에 이르러서까지 그 단어는 내 안에서 수백 번씩 죽다가 다시 살아났다.

가장 포기하기 힘든 것은 바로 '권력'이었다. <미래산업>이 내게 어떤 회사였던가. 공직에서 강제해직되고, 마흔 셋의 나이로 무작정 뛰어들어 죽을 고비까지 넘겨가며 일군 '내 회사' 아니었던가. <미래산업>은 차라리 내 목숨이었다.

일선에서는 물러난다 하더라도 회사가 돌아가는 모습을 조금은 더 지켜봐야 할 것도 같았다. 후진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내게는 아직 그만한 열정과 정력이 남아 있었다.

'사실 회사에 이만한 안목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자문'이나 '고문'쯤 되는 명함을 찍어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 정도만으로도 약속은 이행된 셈이니 욕먹을 짓도 아니었고, 멀쩡한 노동력을 썩히지 않아도 좋으니 사회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겠다 싶었다.

멋 부리느라 일찍부터 은퇴를 말해왔던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더구나 직원과 주주들은 아직도 나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가 다시 아차 싶었다. 노추(老醜)라더니, 늙어 추해지는 게 이토록 순간이구나. 하지만 정작은 번민보다 외로움이 먼저였다. 어떤 결론을 내리든 주변 사람들은 내 결정에 무조건 따라줄 것이었다. 순전히 나만의 문제였고, 나와의 싸움이었다.

한편으로, 아이들에 대한 심경도 복잡했다. "유산은 독약"이라며, "회사는 애비 것이 아니라 종업원들 것"이라며 회사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던 녀석들이었다. 다섯 아이의 결혼식에도 <미래산업> 직원들은 몇 명 오지도 못했다. 나는 아이들과 회사를 철저히 '격리'시켜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니 결국은 그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CEO 이전에 나 역시 늙은 아비였다.

다른 회사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는 동안 그 아이들이 추호라도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엄한 체하다 어느 순간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덥석 안아주길 속으로 바랐던 것은 아닐까. 어려웠던 집안사정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일찍부터 제몫을 스스로 감당해왔던 아이들… 그 어려웠던 시절을 씩씩하게 버텨준 끔찍하고 애틋한 내 새끼들.

경영권이란 아비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일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부와 명예와 권력이 한꺼번에 갖춰진 최고의 종합선물 아닌가. '은퇴'라는 화두를 붙잡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2001년 시무식을 하루 앞두고, 나는 점심시간에 두 아들을 음식점으로 불러냈다.

"이제 물러날 생각이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단도직입적이고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아이들은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너희들이 회사 하나쯤 잘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래산업은 아쉽게도 내 것이 아니어서 사사로이 물려줄 수가 없다."

아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그랬던가 싶었다.

"애비가 너희를 위해 해놓은 게 너무 없구나. 미안하다."

진심이었다. 나는 눈 앞의 두 아이에게 한없이 죄스러웠다.

잠깐의 침묵 뒤에 큰 아이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결정 잘 하셨습니다."

거의 동시에 둘째가 받았다.

"아버님, 훌륭하십니다."

아이들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좀더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저희에게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주셨습니다. 저희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어쩌면 나는, 아이들로 인해서 약해지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번복할 용기를 얻기 위해서 아이들을 불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된통 꾸지람을 들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뜨거운 술을 거푸 석 잔이나 들이켰다. 낮술에 취해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나는 양손으로 아이들의 등을 힘차게 두드렸다.

"나야말로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고맙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