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비상근 상담역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비상근 상담역

정문술의 거꾸로 인생론-'노욕(老慾)' <4>

***'비상근 상담역'**

<논어>에서는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이라 했다. 인물이 순후해진다는 그 예순에 맞춰 은퇴를 작정했었다. 나름대로 소박한 멋을 부리고 싶었던 게다. 하지만 싱거운 욕심이었다. 마침 <미래산업>의 나스닥 진출과 시점이 맞물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별수없이 2년이 늦어졌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집요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가 은퇴를 기정사실화하자 임원들은 대안을 제시했다. 당장 '명예회장'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핀잔을 주었다.

"이 사람들아! 평소에 회장도 하지 않겠다는 사람더러 명예회장이 다 뭔가!"

"그럼 고문이나 자문역이라도…."

나는 지금까지 스스로를 최고경영자라고 생각했던 적도, 전문경영인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없다. 그저 직원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주고, 그 놀이터를 지켜주고, 그들이 방해받지 않도록 외풍을 막아주고, 심부름이나 해주는 게 내 역할이라 여겼다. 그게 소위 '관리직'의 고유업무라 여겼다. 그래서 함부로 간섭하지 않았고, 다만 그들이 지치지 않도록만 애썼다.

하지만 임원들의 집요함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창업주에 대한 예의였고, 함께 고생했던 이들끼리의 동지애였으며, 갑자기 시장에 던져질 충격에 대한 현실적인 우려였다. 정문술이라는 '브랜드'를 아직은 폐기할 상황이 아니라는 위기감도 있었을 것이다.

나 편하자고 회사에 부담을 줄 수는 없는 노릇, 결국 나는 '비상근 상담역'이라는 다소 기형적인 직함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정책결정에 나를 끌어들이지 말 것'과 '절대로 업무보고를 하지 말 것' 등 몇 가지를 다짐받았다.

"며느리에게 곳간 열쇠를 넘겨주고 나서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는 시어미가 있다고 칩시다. 정말 꼴불견이겠지요?"

몇 해 전, 세계 정상의 반도체 제조장비 회사인 스위스 <에섹>의 연구센터를 견학한 적이 있다. 그곳을 둘러보며 나는 첨단의 연구환경과 복지환경을 갖춘 초일류 연구센터를 직접 만들겠노라 결심했었다. 그 후 2년여동안 <에섹>뿐만 아니라 <GM 자동차연구소> <크라이슬러 자동차연구소> <노키아> 등 세계적으로 이름난 첨단연구소들에 설계팀을 보내 견학을 시키는 한편, 경기도 기흥에 1만4백 평의 넉넉한 대지를 마련해두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만들어진 <미래종합연구센터>는 말하자면 내 '필생의 역작'이자 '꿈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의 은퇴는 완공보다 빨랐다.

퇴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미래종합연구센터>의 건립팀장이 나를 찾아왔다. 약간의 설계변경을 상의하기 위해 설계도면과 관련자료를 준비해온 것이다. 진입로에는 어떤 종류의 나무를 심고, 로비에는 누구의 작품을 걸 계획인지까지 모조리 궁금했다. 건립팀장은 이제 막 내 눈앞에서 '내 꿈'의 현황을 펼쳐 보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스스로를 향했어야 할 호통은 애꿎은 건립팀장의 코앞으로 떨어졌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나의 갑작스런 역정에 그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회사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보고하지 말라 하지 않았나!"

"다른 건 몰라도 이 건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회장님께…."

"다시는 이런 용무로 찾아오지 말게!"

그는 막 펼치려던 자료들을 황망히 다시 챙겨든 채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나저나 내가 왜 회장인가!"

그는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났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오래지 않아 준공식이 잡혔다. 알고도 모른 척했지만 나 역시 마음이 들떠 있었다. <미래산업> 사장이 내게 직접 전화를 했다.

"사장님. 준공식 때만은 꼭 와주셔야 합니다."

"싫네."

"다른 뜻이 아닙니다. 사장님께서 물러나신 후로 직원들이 많이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오셔서 한 말씀만 해주세요. 제게 힘도 좀 실어준다 생각하시고…."

"싫네."

"사장님…. 너무하십니다."

"이 사람아. 내가 식언하는 모습을 그렇게도 보고 싶나."

요즘 우리 부부가 사돈댁과 함께 자주 찾는 골프장이 하필이면 기흥에 있다. <미래종합연구센터>가 있는 곳이다. 주말에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운전기사에게 '저기 한 번 들렀다 가세'하고 속으로만 말한다. 겨우 골프장에 도착하고나면, 운동도 하기 전에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흥건하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