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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노욕(老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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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노욕(老慾)

정문술의 거꾸로 인생론-'노욕(老慾)' <8>

돈을 잘 써보겠다는 일념으로 '자선 공부'를 시작했지만 막상 결정이 쉽지는 않았다. 바야흐로 '첨단과학의 21세기'가 아닌가. 아직 한국에서 손을 못 대고 있는 '첨단'이 너무나 많았다. 아무려나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볼까도 싶었지만, 후발주자로 뛰어들어 선진국들이 쌓아놓은 기술과 노하우를 따라잡기까지가 요원해 보였다.

남들이 안하는 것을 내가 하고, 내가 못하는 건 남들에게서 구하면 된다. 그것이 글로벌시대의 경제학이자 아웃소싱의 기본개념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안하는 것, 또는 모두가 출발선에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연구를 해봐도, 그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할 만한 분야는커녕 선발주자들이 놓치고 있는 틈새를 찾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야말로 안목인 모양이었다. '장차' 세상에서 필요로 할 만한 무엇인가를 찾아 '지금'부터 투자를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

그러저러한 공부와 갈등으로 날을 보내던 중, 분당의 연구소에 새로 입사한 젊은 연구원과 면담자리를 갖게 되었다. 현역으로 일할 때에는 현장 직원들이 개별미팅을 신청해올 때가 종종 있었다. 개인적 고민을 털어놓을 때도 있고, 회사의 비전에 대해 진지한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때로는 새로운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들고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장님. 바이오테크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앞뒤 없이 무슨 소린가? 자세히 좀 설명해보게."

"생명공학과 기계기술, 나노테크놀러지의 만남이야말로 21세기를 관통할 핵심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이야기라면 나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네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미래산업도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비해야 합니다. 사장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바이오테크놀로지에 관해서 제가 좀더 자세한 보고서를 만들어보겠습니다."

별 건 없었다. 패기만만한 신입사원이 사장 앞에서 당돌한 배포를 시위하고 싶었을 게다. 그래서 대충 격려해 보내고 말았다. 하지만 나중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냥 흘려들을 이야기만도 아니었다. 원론적인 안목이지만 틀림없는 안목이기도 했다. 보고서가 실제로 작성될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나대로 바이오테크놀로지와 관련해 본격적으로 자료수집을 시작했다.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단연 미국이 최고였다. 하지만 영국이나 일본, 이스라엘, 중국 등 후발국가에서도 집중적으로 그 분야를 육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 분야에 관한 한 아직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바이오 분야의 성장지표처럼 언급되는 염기서열분석기를 한국은 200여 대 보유하고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에는 일개 기업에서만 무려 400대를 보유한 경우까지 있다. 누구 말마따나 한국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거나 그럴 여력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나는 차라리 기술간, 학제간 융합지점에 주목했다. 예컨대 IC집적기술의 발전양상만 따져보더라도, 실리콘으로는 더이상 감당이 안 될 시점이 조만간 도래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동물의 단백질 또는 그에 상응하는 생명물질과 첨단의 전자나노 기술이 만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연구는 이미 의학계에서도 조심스레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이 분야는 세계 각국이 공통적으로 초보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순수과학이나 생명공학 분야에서 뒤쳐진다고 해도 기계와 전자 등의 융합기술인 메카트로닉스 분야에서는 우리도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미국이 2000년도에 확보한 지식축적량을 한국이 추월하는 데에는 향후 5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정작 50년 후에는 미국과의 지식축적 격차가 지금보다 더 심각해질 게 분명하다. 한국이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비용은 국민총생산(GDP)의 3%도 채 안된다. 물론 세상은 넓고 돈 쓸 곳은 많다. '나라의 살림이 그만하니 그만큼 쓰는 것 아니겠느냐'고 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다만 나라에서 못한다면 민간에서라도 그 격차를 줄이는 데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300억을 기부한 것에는 나름대로 이런 계산속이 있었다. 기부를 결심하면서 나는 KAIST와 정부의 과학기술부에 직접 두 가지를 요구했다. 생명과학과 정보기술 및 기계기술을 서로 융합하여 학제간 연구를 할 수 있는 첨단학과를 신설해달라는 것, 그리고 교수와 시설, 기자재의 유지관리에 필요한 예산을 국가에서도 일부 보조해달라는 것이었다. 바이오테크 분야의 고급 인재를 키우려면 향후 10년만 따져보더라도 대략 교수 80명과 학생 480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해진다. 그들에게 첨단의 연구환경을 제공하려면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나의 당돌한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KAIST에서는 '바이오시스템학과'를 신설하는 한편, 나의 기부금을 재원으로 바이오테크 연구동을 신축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과학기술부 장관은 내 제안을 환영하면서 기획예산처와 관련 예산을 협의해보겠다고 약속해주었다.

학술지원재단을 만들어 KAIST에 필요한 자금을 안정적,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일시불 전액 기부로 마무리 짓고 말았다. 급한 성정 탓도 있지만, 대체로 '재단'이란 것들이 이 사회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니 그쪽은 아예 생각하기도 싫었다.

2002년, KAIST의 '바이오시스템학과'는 IBM이 전 세계 대학을 대상으로 선발해서 주는 공동연구 프로그램 'SUR(Shared University Relationship)상(賞)'에 선정되어 80억 원 상당의 슈퍼컴퓨터 시스템을 기증받게 되었다. 또한 IBM과 공동으로 연구 프로젝트도 수행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한국 최초였다. 올해 초에는 <KAIST>의 학사과정 학생들의 진학 희망학과 조사에서 그동안의 유력 학과들을 제치고 '바이오시스템 학과'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나는 기뻤다. 내가 한 일이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다. 내 '안목'을 공인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벤처'의 득의감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기쁨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안도감인 셈이다.

사람이라면 적어도 '밥값'을 하고 죽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이 사회가 지금껏 나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왔으므로 떠나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며 살았다. 단순하나마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회환원'의 의미였다.

난데없이 밥값타령을 하는 이유는 이제 솔직해지고 싶어서다. 매스컴들은 나를 두고 '아름다운 퇴진'이니 '진정한 부자'니 떠들썩하게 칭찬들을 했지만, 사실 은퇴와 기부에 관련한 내 행보들이란 그저 추하지 않게 늙어가며 남은 인생을 평안하게 살아보겠다는 또 다른 노욕(老慾)의 발로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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