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에게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했더니, 한 대기업의 2세 총수를 1위로 꼽더라는 내용의 신문기사를 읽었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히 보니 1위뿐 아니라 5위까지가 소위 ‘대기업 2세’들이었다.
성공적인 기업경영과 그를 통해 막대한 부를 이룬 재계의 거인을 존경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의 태도는 십분 이해가 간다. ‘이왕 세상에 태어난 바에야 그 정도 성취는 이루고 죽겠다’는 젊음 고유의 호연지기도 읽히는 듯하여 한편으론 기특한 마음까지 든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도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은 두렵게 느껴진다. 부모를 잘 만나 아예 처음부터 ‘재계의 거물’로 태어난 사람들을 우리 대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은 인물’로 꼽는다니, 달리 말하면 ‘부모 잘 만난 것’을 가장 부러워한다는 뜻도 되지 않는가.
작년 내 생일은 외손주들과 함께 보냈다. 두 아들네가 외국에 나가 있어 딸들이 우리 내외에게 저녁 대접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외손주들의 재롱에 그간 적적했던 우리 내외는 오랜만에 마음껏 웃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일곱 살 난 외손주 하나가 제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더니 대뜸 이런다.
“엄마,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 빼놓고 여기서 누가 젤 부자야? 할아버지는 이 호텔도 살 수 있어?”
어린 녀석의 당돌한 질문에 어른들은 하나같이 폭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철없는 머릿속에 어찌 그런 궁금증이 다 들어 있을까. 도대체 어떤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부자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나 하고 있을까. 이 아이가 자라면 과연 누구를 가장 닮고 싶어 할까. 하긴, 애어른 할 것 없이 우리 사회의 재물에 대한 태도가 대개 이렇지 않던가. 모처럼 흥겨웠던 자리라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내 기분은 오랫동안 씁쓸했다.
비슷한 시절을 거친 거의 모든 이들이 그랬듯, 나도 젊어서는 빈털터리였다. 군대 휴가 중에 군대동료의 소개로 만나 첫눈에 반한 여자와 제대하자마자 결혼까지는 했지만, 집은커녕 최소한의 가재도구조차 마련할 돈도 없었다. 단칸 사글세방 하나를 얻고, 옷 담고 이불 얹을 궤짝 하나 들여놓은 것이 당시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나서야 겨우 내가 번 돈으로 첫 세간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다. 장롱은 아니었지만 튼튼한 철제 캐비닛이었다. 물론 볼품없이 작고 초라한 물건이었지만, 당시 우리 내외의 눈에는 캐비닛의 엉성한 무늬까지 그렇게 예쁘고 대견해 보일 수가 없었다. 신혼초부터 줄곧 사용해오던 나무궤짝을 버리고, 그 안에 담겨있던 옷가지를 하나씩 꺼내 캐비닛 안에 옮겨넣는 일이 우리 부부에게는 마치 성스러운 의식 같았다.
1970년에는 발령지가 바뀌어 올망졸망한 5남매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해야 했다. 다행히, 그때까지 저축한 돈과 얼마간의 빚을 합쳐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할 수 있게 되었다. 대지 38평에 건평 18평짜리 아담한 단독주택이었다. 이사하던 첫날밤, 아내는 이불 속에서 소리없이 한참을 울었다. 감격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내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물으면 부지불식간에 그 시절의 어려움을 넘어서던 소박한 성취들이 떠오른다. 자식들에게 유산을 많이 남겨주는 부모는 자식들의 행복권을 남김없이 앗아버리는 못난 부모가 아닐까. 나는 늘 내 아이들에게 “유산은 독약”이라고 가르쳤다. 그 말은 내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스스로 겪어가며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다. 정도를 걸으며 역경을 통해 얻는 기쁨과 성취감은 물질적 유산보다 수백 배쯤은 값진 것이다. 많은 것들이 준비된 상황에서 시작하는 레디메이드 인생은 혹시 지레 늙어버린 인생이 아닐까. 잘 빠진 레디메이드를 닮고 싶어 하는 대학생들 또한 조로한 젊음들이 아닐까.
한국 사람들에게 ‘어째서 그토록 억척스레 돈을 벌려고 하는가’라고 물으면 열이면 아홉이 ‘자식들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내 역시 내가 자식들에게 너무 인색하게 군다며 늘 불만이다. 그럴 때면 나는 아내와 절충한다.
“우리 죽기 전에 애들한테 멀쩡한 집 한 채씩만 마련해 줍시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형편껏 도와줍시다. 공부 욕심을 내는 애가 있으면 공부도 시켜줍시다. 그 대신 더이상은 하지 맙시다. 우리까지 어리석고 추하게 늙지는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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