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리 회사가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라도 섣불리 직원을 해고해본 적이 없다. 직원들의 능력이 늘 흡족했기 때문은 아니다. 또한 지금껏 거래해온 은행도 줄곧 하나다. 거래하는 증권회사도 변함없이 하나다. 특별히 조건이 좋은 거래처였기 때문은 아니다. 심지어는 처음 내게 골프를 가르쳐주었던 사범이 다른 지방으로 전직을 한 후에도 나는 부러 그 먼 곳까지 찾아다니며 레슨을 받는다. 지도력이 탁월해서도 아니고 유명 골퍼여서도 아니다.
나는 누구 못지 않게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인연이란, 모든 것을 그 관계 안에서만 풀고 해결하려는 막무가내의 ‘연고’ 또는 ‘인맥’과 다르다. 내게 ‘인연’이란 관계에 대한 성실함이자 사람에 대한 예의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 성실과 예의다.
<미래산업> CEO로 일하는 동안에는 무수한 청탁 때문에 늘 피곤했고 괴로웠다. 온갖 모임에서 회장이니 고문이니 하는 감투까지 맡겨대는 통에 거절하느라 진땀깨나 빼야 했다. 원칙을 앞세워 무쪽 자르듯 처신할 자신이 없을 때 나는 차라리 자리를 피하곤 했다. 물론 그 덕분에 ‘매정하고 독한 사람’이란 소리도 숱하게 들어야 했다.
은퇴 후 고향의 모 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명예박사를 수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교육부에 승인까지 얻어놓은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가운을 맞추자는 것이다. 모교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마다할 이유가 없는 명예행사다 보니 당연히 수락할 것이라 확신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거절당한 경험도 없었으리라.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내 인생이 학술적인 것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가 첫째요, 그 학교나 해당 분야에 아무런 기여도 한 바 없이 명예나 탐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둘째 이유였다. 하지만 그 대학에서는 포기하지 않고 경영대 학장을 서울로 보냈다. 인사 삼아 인연을 따져보니 나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일부러 서울까지 올라와 나를 찾아준 성의도 있는 데다 꼼짝 못할 지연, 학연까지 얽혀있는 터였다.
지금도 송구스러운 마음이지만, 나는 그 귀하고 반가운 손님을 식사대접도 없이 서둘러 돌려보내고 말았다. 애초 생각했던 바를 지켜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비슷한 일들이 연달아 다섯 차례나 반복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KAIST> 기부 이후라 내게 바라는 것들도 있겠다 싶었지만, 하도 겪다보니 내게도 점차 ‘거절의 노하우’란 것이 생겨났다.
“일전에 모대학교에서 명예박사를 주겠다는 제안이 왔는데 자격이 모자란 듯해서 정중히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거절해놓고 어떻게 이번에는 받을 수 있겠습니까?”
새로 시작하는 학교법인의 이사장을 맡아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공익적인 사회사업의 명예고문으로 일해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사단법인 총재, 심지어는 대학교수 제안까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벤처인의 얼굴로 공적인 삶을 이미 마감한 사람이다. 그 중의 어느 것 하나 내게 합당한 감투는 없다.
소위 ‘자수성가’한 사람이 가장 먼저 기분을 내고 싶은 곳,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고향과 모교일 것이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흔히 그 성공을 고향에서 먼저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신의 고단했던 과거를 그렇게 보상받고 싶어한다. ‘금의환향’이란 말이 그래서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인지상정일지언정, 그 소박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이나마 경계해야 할 사회다. 고향을 따지고 출신학교를 따지는 것이 한국형 연고주의와 지역감정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나는 현역 때나 지금이나, 동향인들과 동창들의 대면을 일부러 더 피하는 편이다. 청탁을 거절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교당한’ 인연들도 꽤 있다. 가급적 고향 갈 일을 줄이느라 부모님 묘소까지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 말았다. 급기야는 ‘후레아들놈’이라는 욕까지 들었다.
고향에 있는 학교도 아니고 더욱이 모교도 아닌 곳에 300억씩이나 기부했다며 욕하는 사람들은 또 어찌 없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연고주의라는 이 땅의 옳지 않은 순환고리를 끊고 싶었다. 도대체 이 나라는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의도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살면서 맺어지고 맺어야 하는 인연이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법이다. 그 끝없는 인연의 고리들 속에서 부끄럽지 않은 한 좌표를 차지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은 세상이다. 그래서 내가 홀로 터득한 처세술은 비겁하게도 이렇다.
“버텨낼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도망가라.”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