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의 책상물림이었던 내가 다짜고짜 반도체 제조장비 사업에 뛰어들어 이만큼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 한다. 엔지니어들도 전전긍긍하는 문제에 대해, 늘 문외한이었던 내가 본질적인 해결책을 내는 것에는 우리 직원들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혹자들은 나더러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점에는 나도 동의한다. 나는 늘 운이 좋았다. 다만 그 ‘운’이란 것에 대한 내 개념은 좀 특별하다. 내게 있어 ‘운’이란 지독한 집중으로 일궈내는 필연이다.
<중앙정보부> 시절에 선물로 받은 서양화 한 점에 매료된 이후, 나는 형편껏 그림을 수집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대학교수나 화가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림을 보는 안목도 집중적으로 키웠다. 한편으로 트렌드를 이해하고 따라잡기 위해 각종 미술잡지들을 놓치지 않고 구독했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내가 좋아하는 작품과, 작가나 전문가들이 좋아하는 작품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취향을 섣부르게 내세우지 않고 그들의 안목을 존중하고 경청했다. 그것이 문밖에서 문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태도라고 여겼다.
그럭저럭 그림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겨나자 나는 화랑을 돌았다. 하지만 명망있는 작가들의 것이라 해서 무턱대고 그림을 사모으지는 않았다. 그럴만한 재력도 없었다. 다만 재능있는 화가들에게도 절정기는 따로 있는 법, 충분히 무르익은 작가가 득의작을 내놓는 시점을 골랐다. 그럴 때면 나는 오프닝 전날 미리 전시장을 찾아가 누구보다 먼저 꽃을 달았다.
순수한 예술애호가들에게는 욕을 먹을는지 몰라도, 나는 그림을 수집하면서 투자의 의미도 배제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모았던 작품들은 <미래산업>이 한창 어려웠던 시절에 모두 팔려나갔다. 미적 안목을 키우기 위해 바쳤던 그 시절의 끈질긴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미래산업>은 그나마 숨통도 틔우지 못하고 일찌감치 무너져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림을 팔 때에도 그런 말을 들었다. 이렇다 할 재산가도 아니었던 사람이 어떻게 그런 좋은 작품들만 골라서 수집할 수 있었느냐고, 비전문가 치고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이다.
요즘도 나는 날씨가 좋은 계절이면 곧잘 친구들 내외를 집으로 초대하곤 한다. 청계산과 맞닿아 있는 뒷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텃밭에서 나온 상추며 쑥갓, 풋고추를 곁들여 벗들과 함께 사는 얘기를 나누는 재미가 그럭저럭 괜찮다. 산속이나 다름없으니 공기 좋은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산자락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마당 구석을 가로지르니 그 소리를 듣고 보는 운치도 제법이다.
그런데 요즘은 친구들이 놀러오기를 꺼리는 눈치다. 아내들로부터 한결같이 “그동안 당신은 뭐했느냐”는 지청구를 듣는다는 것이다. 20여년 전 내가 원지동 촌구석에 집을 마련하겠다고 하자 친구들은 내게 한 입으로 말했다.
“이 친구 정신 나갔군!”
1970년대에 나는 세 번에 걸쳐 외국여행을 했다. <중앙정보부> 기조실에서 일하는 동안, 해외공관들을 감사하는 업무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선진국’들을 다녀보니, 좋은 집들은 예외 없이 산중턱에 있거나 호수를 끼고 있었다. 오히려 도심지의 집들은 모두 슬럼화되어 있었다. 당시의 한국 사정과는 정반대였다. 멀쩡한 단독주택을 팔아 닭장같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이 당시의 한국에서는 대유행이었다. 개발지상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환경보다는 생활의 편의가,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이 생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곧 한국의 사정도 곧 바뀌리라 여겼다. 오래지않아 도시는 슬럼화되고, 자연친화적이고 한적한 교외가 각광받으리라고 예감했다. 물론 당시의 내 안목에 동의하는 친구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 친구들 몇몇은 나와 함께 호젓한 산동네를 두루 답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긴 것은 오직 나 하나였다. 내가 그들보다 넉넉한 여유자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행동했고, 그들은 머뭇거렸다.
교외로 이사하겠다는 나의 결정을 비웃거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친구들은 요즘 내게 이렇게 말한다.
“이 촌동네가 이렇게 귀하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자넨 정말 운이 좋은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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