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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지 않는 직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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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지 않는 직관들

정문술의 거꾸로 인생론-'노욕(老慾)' <16>

몇 년전부터 합리주의 경영이론의 한계를 절감한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 ‘직관 경영’이란 개념이 제시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속도가 생명인 요즘과 같은 기업환경에서는, 아닌 게 아니라 리더의 직관력이야말로 집단의 생사를 결정짓는 꽤 중요한 변수일 수도 있겠다.

‘직관’이란 개념도 내게는 ‘우연’이란 개념과 동류다. 일정한 트렌드를 관찰하다 머릿속에 불쑥 떠오르는 어떤 예감, 또는 복잡한 상황을 순식간에 단순화시켜 실무와 의사결정에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직관력 있는 사람’이다. 역시 길목을 제대로 지키고 서서 늘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직관에 대한 믿음도 생기는 것이고, 그 믿음을 밑천으로 과감한 행동에 돌입할 수도 있는 것이리라.

<미래산업>이 초기투자했던 업체들 중에서 비교적 성공한 케이스는 보안솔루션 업체인 <S사>, 모바일 통신기기 업체인 <M사>, 그리고 지금은 어느 대형 인터넷 포털업체와 합병한 <L사>의 셋이었다. 그 중에서 <S사>와 <M사>의 증자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에는 모두가 벤처자금의 ‘유동성 위기’를 전망하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었지만, 또한 모두들 ‘그래도 조금은 더 가겠지’하는 태도로 벤처호황에 대한 환상을 차마 깨지 못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지나온 몇 년이 벤처들에게는 달콤했던 것이다.

당시의 벤처 현황으로서는 제법 군계일학이라고 소문난 이 두 업체의 증자에 많은 투자회사들이 앞다투어 참여의사를 밝혀왔다. 그때 나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되리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다. 내게 별도의 전문적인 헤드뱅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나마 조언을 얻을 만한 금융전문가들은 오히려 나의 ‘비과학적인’ 예감을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내 직관을 전문가의 조언보다 더 존중했고 신뢰했다.

나는 오히려 협상 가능한 액수의 70% 수준에서 증자를 추진했다. 그 액수가 거품을 제거한 제값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투자측과 증자측 양자가 상생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조건 거액의 증자만이 벤처의 최종목표가 아니라는 생각과 ‘거품’이 사라진 이후 투자자들의 원성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감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빠르게’ 결정지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나의 직감으로는 그나마 ‘제값’도 못받을 상황이 코앞에 닥쳐 있었던 것이다.

증자를 추진했던 업체의 CEO들뿐 아니라 모든 직원들이 내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불만스러워했다. 주주들은 “정문술이 앞장서서 바보짓 한다”며 원성들이 대단했다. 아닌 게 아니라 누가봐도 ‘바보짓’임에는 분명했다. ‘제가 지레 깎는 장사’가 아닌가.

두 회사의 증자를 마무리 짓고 불과 몇 주 되지 않아 청천벽력처럼 벤처의 빙하기가 찾아왔다. ‘유동성의 위기’가 아니라 시중의 벤처자금은 완전히 동결되었다. 수많은 사업계획서가 프리젠테이션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곧장 휴지통 속으로 들어갔다. 투자자들은 언제 끝날지 모를 복지부동에 돌입하며 다짜고짜 눈과 귀를 틀어막았다.

훗날에 “아차!” 하며 무릎을 치거나, “거봐라”하고 자위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직관력을 가졌더라도 ‘행동’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열매도, 성찰도 얻지 못한다. 공부를 많이 한 경영인들이 흔히 겪는 오류다. 생각이 많고 아는 게 많아서 머뭇거림도 그만큼 많은 걸까. 식자우환이란 말이 이런 경우에 적절하다.

어느 유교 경전에는 “알고 행하지 않는 자, 알고 행하는 자, 모르고 행하지 않는 자, 모르고 행하는 자, 그중에서 가장 후자가 군자”라는 구절이 있다. 프랑스의 어느 법학자는 또 이런 말을 했다. “판사는 직관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나서 그 결정을 정당화할 근거를 찾는다.” 행함 없이는 모든 판단과 결정이 무의미하다는 뜻이겠다.

아무리 훌륭한 정보를 수집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적재적소에 적용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직관은 집중력에서 생겨나 실천력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모두들 실패가 두려워 행동하려 들지 않는다. 실패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포기’를 두려워한다는 말과도 같은 뜻이다. 확신이 생겼을 때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결단력과 실천력뿐만 아니라, 아니다 싶을 때 본전 생각 않고 과감히 포기하는 과단성까지 합쳐져야 비로소 ‘직관’은 현실의 힘을 얻어 완성된다.

나는 <미래산업>의 직원들에게 늘 이렇게 당부했다.

“외부와 분쟁이 생기면 그 즉시 포기하세요. 공연히 본전이라도 구하겠답시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회사 망합니다. 어찌어찌 노력하여 용케 본전을 되찾았다고 합시다. 본전을 되찾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과 비용이야 말로 진짜 본전이예요.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되찾을 수 없는 겁니다.”

서점에는 처세술 서적과 경영이론서가 넘쳐나지만, 정작 지혜로운 처세와 합리적인 경영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무척 힘들다. 오늘날은 이론과 방법론의 과잉시대다. 하지만 이론과 방법론은 실천없이 무용지물이다. 또한 그 실천의 으뜸은 다름아닌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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