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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아지들이 일군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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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아지들이 일군 신화

정문술의 거꾸로 인생론-'노욕(老慾)' <21>

장차 마운터 개발을 책임질 <미래연구소>를 분당에 설립한 후, 신입 연구소장에게 나는 이렇게 당부했다.

“돈은 필요한 대로 갖다 써. 나한테는 아무 것도 보고하지 마.”

그리고 천안의 본사로 돌아와 자금담당 책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돈은 달라는 대로 줘. 절대로 따지지 마.”

처음엔 사주의 단순한 격려로 여기고 몸을 사리던 연구소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말이 ‘구체적 진심’이었음을 깨달았다. 연구소의 인력구성을 끝내자마자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30억 원을 호가하는 설계 소프트웨어의 구입이었다. 그나마 아직 상용화도 되지 않은 베타 버전이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거금을 들여 베타테스터에 지원하려는 ‘팔불출 짓’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연구소장을 격려했다. 소프트웨어 구매계약서에 서명하는 자리에서 나는 미국의 판매회사 임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연구소장에게 전권이 있으니 공연히 나한테 잘 보일 생각 마시오.”

이 한 건의 파격적인 사례로 용기백배한 연구소장은, 곧이어 작업실의 모든 PC를 당대 최고 성능의 워크스테이션으로 교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고하는 버릇’이 남아 있던 소장의 전화를 나는 일부러 퉁명스레 받았다.

“잘 했어. 그리고 앞으로는 보고하지 마.”

<미래연구소>는 그때부터 정말 ‘제멋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연구소 옥상에 골프연습장이 들어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후에는 연구소에서 최고급 헬스기구들을 마구 사들인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러한 소식은 주로 자금지원부의 볼멘 목소리로 전해지는 것들이었다. 그때마다 내 반응은 똑같았다.

“달라는 대로 줘. 절대 따지지 마.”

하지만 재무이사는 기회만 있으면 불만을 토로했다. 하루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분당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졌답니까. 사장님께서 지시하신 바도 있고 해서 저희도 참으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점입가경입니다.”

“내가 뭐랬나. 자네가 무조건 참게.”

“다음 주에 미국에서 열리는 장비전시회를 참관하겠다면서 열댓 명씩이나 해외출장을 신청했습니다.”

“큰 물에서 안목을 키워야지. 좋은 생각이구먼.”

“그것도 모두 부부동반에 2등석으로 가겠다는 겁니다. 미래산업이 무슨 여행삽니까!”

“바빠서 휴가들도 못 챙겨먹을텐데 거 참 잘되었네. 얼른 출장비 2인분씩 내줘.”

“고작 열흘만 기다리면 일본에서 훨씬 싸게 구입할 수 있는 부품을 두세 배나 더 주고 서울에서 구입하는 사람들입니다. 회사 돈을 이렇게 우습게 아는 직원들이 세상에 어딨습니까.”

“급하게 필요했겠지. 원래 벤처는 시간 많으면 못써.”

“어디 그뿐인 줄 아십니까. 연구소 사람들은 의료지원금 명목으로 금이빨 해넣는 것까지 회사에 청구합니다. 자기 부인이 다니는 불임클리닉 청구서까지 들고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말이나 됩니까.”

“하하, 재미있구먼. 그냥 다 해줘버려.”

“회식이다 접대비다 평소에 흥청망청 먹어치우는 돈만도 얼만지 아십니까. 엊그제는 간부회식을 했답시고 법인카드 영수증을 내미는데, 거기에 여자들 팁까지 버젓이 올라와 있지 뭡니까. 이런 돈까지 정말 회사에서 내줘야 하는 겁니까.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정말 못 참겠나?”

“도대체가 말이 안됩니다.”

“그럼 자네가 나가게.”

내가 <미래산업> 대표로 있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본 해고통지였다. 당시 나를 바라보던 재무이사의 원망어린 눈초리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너무나 원리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사실은 그 때문에 파격적인 대우로 스카웃한 고급인재였다. 직분에 충실했기 때문에 해고되어야 한다니 그로서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나는 그에게 넉넉한 퇴직금과 승용차, 그리고 나의 개인 돈으로 별도의 위로금을 마련해주었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결코 실책 때문에 해고되는 것이 아님을 그런 식으로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사람아. 나라고 마음이 좋아서 마냥 참고 있는 줄 아나…’

그를 보내고 나서 나는 전 직원에게 보약을 지어주라 지시했다. 제멋대로 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만은 꼭 챙기라는 뜻이었다. 수시로 임계점까지 오르내리는 내 다급한 성격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참기 힘들 때는 오히려 원인을 부추기는 것도 인내의 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불과 3년만에 마운터를 만들어냈다. 때론 몽둥이질을 해주고 싶을 만큼 밉게 구는 녀석들도 있었고, 회사가 휘청할 정도의 대형사고를 터뜨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것은 마운터 개발에 성공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상용화를 위한 업그레이드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됐다’ 싶으니 무조건 어마어마한 양의 부품부터 사들였다. 그 이후 마운터는 몇 번이나 구조변경을 했고, 미리 준비했던 부품들은 모두 쓰레기가 되었다. 오로지 자만심 때문에 몇백억 원의 손실을 회사에 안겨준 셈이다. 하지만 하지만 어쩌랴. ‘멋대로 해보라’ 부추긴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낭비를 줄이고 업무효율을 높이겠답시고 직원들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관리하다 보면 정작 ‘물건’은 생겨나지 않는다. 대기업들도 십여 년씩이나 매달렸다가 대부분 포기해버린 일을 우리가 뒤늦게 해내기 위해서는, 대기업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연구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미래산업>은 오래 전에 ‘중소기업진흥공단’에 경영평가 신청을 한 적이 있다. 경영평가단은 인사관리, 재고관리, 기술개발, 업무효율성, 재무구조, 근무태도, 조직구성, 현장생산성 등에 이르는 회사 전 영역을 파헤치는 대작업을 시작했다. 그 어수선했던 와중에 하루는 경영평가단장이 나를 찾아왔다.

“워낙에 우량기업으로 소문난 회사라 저희도 견학하는 심정으로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매우 실망했습니다.”

자금운용이 너무 무질서할 뿐 아니라 직원들의 근무태도나 기업문화도 지나치게 방만하다는 말이었다. 그는 특히 ‘선지급 후결재’라는 시스템과 무분별한 장비 투자, 과도한 연구지원, 무계획적인 물류관리, 과잉책정된 복지정책 등등에 관해 신랄하게 비판을 퍼부어댔다.

“한마디로, 회사는 돈으로 처발라놓았는데 직원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같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대로 가다간 이 회사 금방 망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를 모신 거 아닙니까. 꼼꼼히 살펴 잘 좀 지도해주세요.”

경영평가단이 철수하기로 한 전날, 평가단장은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왔다.

“저한테 여유자금이 좀 있었습니다. 어제 그 돈을 모두 미래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전 이제 사장님만 믿겠습니다.”

쑥쓰러웠던지 그는 오랫동안 껄껄 웃었다.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가 대단하더군요.”

나도 따라 웃으며 뒤늦은 말대꾸를 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고 하셨던가요? 우리 회사에는 아예 고삐도 없습니다.”

“리더십이 대단하세요.”

“그저 사람 꼴을 잘 봐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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