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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 사육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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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 사육법

정문술의 거꾸로 인생론-'노욕(老慾)' <23>

IMF의 혹독한 시절을 겪는 동안, 우리 기업들 사이에서는 ‘다운사이징’이 유행이었다. 경영자들은 ‘다운사이징’의 선례를 서양의 초일류 기업들로부터 빌려왔다. 이른바 ‘벤치마킹’이었다. 그들은 인원삭감과 조직축소를 통해서 기업구조를 최적화, 합리화하겠다고 비장하게 외쳤다.

나는 그때의 사회 분위기를 분명히 기억한다. <아버지>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두 집 걸러 하나씩 명퇴자가 생겨났으며, 거리에는 노숙자들이 넘쳐났다. 전국민의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결과를 보자. 다운사이징이 우리 경제를 살렸는가?

회사에 감원의 소문이 돈다. 아무리 임원들끼리만 쉬쉬한다고 해도 인사와 관련된 소문처럼 회사 안에서 빠르게 확산되는 소문도 없다. 직원들의 손에 일감이 잡힐 리 만무하다. 직원들은 불안한 얼굴로 삼삼오오 자판기 앞에 모여 수군대고, 화장실 안에서 수군대고, 흡연실에서 수군댄다. 뚜렷한 발표가 있을 때까지 확인할 길도 없는 갖가지 루머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겨나고, 직원들은 그에 따라 일희일비한다.

감원의 폭풍도, 조직축소의 칼바람도 얼추 마무리되었다 치자. 쫓겨나고 좌천되고 감봉된 사람들의 고통이야 안된 일이지만,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어깨를 두드려 격려까지 했다 치자.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기분으로 회사를 위해 다시 한번 팔을 걷어붙일까? 중성자탄으로 인간의 냄새가 사라져버린 회사에서 과연 모험이나 도전이 다시 생겨날 수 있을까? 신바람이나 주인의식이 생겨날 수 있을까?

어려운 세월일수록 우리 방식을 찾아내고 과감히 싸워나가야 하건만, 철학은 없이 방법론만 수입하기를 우리는 반복한다. 벤치마킹이란 생산관리, 조직관리, 마케팅기법 등등 기업에 필요한 모든 원리와 철학을 업계의 선도기업으로부터 배우고 따라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벤치마킹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실제로 그 일을 맡아서 할 ‘사람’에 대한 정교한 관리경험은 배우지 못하거나 배우지 않는다. 그리하여 각각의 문화적 차이는 고려되지 않고 순수한 숫자와 도구로서의 호모 사피엔스만 남는다. 어쩌면 ‘벤치마킹’이란 그리 효율적인 경영기법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경영에 있어 ‘사람’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말이다. 어디, 사람이 책이나 그래프 보고 배워지던가.

물론 선진외국의 경영기법에는 배울 점들이 참으로 많다. 너무 옳아서 폭력적으로 수입해야 할 것들도 있다. 하지만 이를 금과옥조처럼 여겨 무비판적으로 도입할 때 생기는 낭비와 부작용도 참 심각하다. 가려서 들이고 바꿔서 들이되, 결코 ‘중심’은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만 굳건하다면야 무엇인들 독이 될까.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자생적으로 생겨난 각각의 ‘기업문화’들만큼 최적의 경영기법이 다시 어디 있겠는가.

한국인들은 유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경쟁의식도 강하다. 그래서 반목도 많고 분란도 참 많다. 하지만 신뢰할만한 경영 여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업무여건이 일단 조성되고 나면, 굳이 시키고 지시하지 않아도 놀라울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 어떻게 이런 여건을 만드느냐에 한국기업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냉정하지 못하다’고 욕먹을 소린지는 몰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낭만이 필요한 건 아닐까. 늘 사람을 중심에 놓는 감동의 기업문화가 필요한 건 아닐까? 서양식 합리주의에 밀려 오랫동안 의식의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낭만과 감동과 신명을 다시 끌어내야 하는 건 아닐까.

미국 샌디에고를 여행하던 중 돌고래의 훈련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높이 뛰어 오르거나 공을 잘 다루는 돌고래는 물고기 한 마리를 상으로 받는다. 반면에 훈련에 잘 적응하지 못하면 굶어가며 반복 훈련을 해야 한다. 서커스단의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용맹하기 짝이 없는 호랑이조차 고깃덩이 한 조각을 얻기 위해 기꺼이 애완동물이 되지 않던가.

그렇게 훈련을 받고 난 야생동물들은 드디어 일사분란한 쇼를 보여준다. 물론 쇼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잘하는 녀석은 먹이를 얻어 먹고 신통찮은 녀석은 못 먹는다. ‘돌고래 사육법’이란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인 ‘경영기법’이다. 연봉제나 스톡옵션만 해도 그렇다. 샐러리맨들에게 그것은 ‘물고기’다.

하지만 물고기 없이는 쇼도 없다. 또한 그렇게 훈련받은 존재는 항상 ‘더 큰 물고기’를 따라 어디든 갈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해 쇼를 하는 애완동물들에게 꼭 ‘이 곡마단’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요즘 젊은이들의 이력서를 보자. 과거의 어느 세대보다 직장경력이 많다. 한 페이지에 모자라 두 페이지를 넘어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짧으면 석달, 길어봐야 1, 2년의 ‘경력’들이다. 이직(移職) 매니아들인가? 연봉제와 스톡옵션의 유행과 함께 생겨난 세태다.

내가 노력하여 번 돈이 사장의 뒷배를 불려주거나 허튼 데 쓰이지 않고 고스란히 나와 내 미래를 위해 투자되고 있다는 믿음. 누구 한 사람의 개인 의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업원들이 스스로 결정하여 행동하여도 함부로 쫓겨나지 않고,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누구라도 최고경영자도 될 수 있다는 믿음. 인연의 소중함과 사람의 가치를 늘 중심에 놓는 착하고 선한 공동체에 대한 가족과 같은 믿음. 이 믿음들이 고스란히 기업문화로 정착되어 전직원의 신바람으로 외화되는 것. 돌고래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우리식 경영’이다. 여전히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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