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정문술씨의 젊은 시절부터 미래산업을 일구어내기까지의 과정을 '일과 삶'이란 제목 아래 8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내 고향은 전북 임실이다. 시절도 어수선했고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다행히 집안은 비교적 넉넉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기부금을 주고 보결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원광대 종교철학과에 간신히 진학했지만, 2년동안 하릴없이 허송세월만 하다 결국 군입대를 결심했다.
당시에는 군대를 '죽으러 가는 곳'쯤으로 여겼다. 우리 어머니도 그랬다. 어머니는 입대영장 보자마자 눈물바람이었지만, 나는 사실 들떠있었다. 힘든 것이야 모두들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했지만, 나는 장차 내 앞에 펼쳐질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밤잠까지 설쳤다.
과연 군대는 힘든 곳이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몹시 힘들었다. 전쟁통에 가산이 구몰된 이후에도 어머니께서 곡식 장사를 하신 덕분에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던 나는, 무엇보다 군대의 배고픔이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 즐거웠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기만 한 신병훈련소는 내게 신나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퇴소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일과가 끝난 시간에 우리들에게 설문지 두 장씩이 지급되었다. 밥도 먹었겠다 몸도 피곤하겠다, 모두들 그림 그리듯 답안을 대충 대충 기입하고는 침상에 벌렁벌렁 드러눕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겐 그 설문 내용이 재미있었다. 질문들이 엉뚱하고 기발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설문조사가 아니라 적성검사와 지능검사였다.
신병훈련이 끝나자 나는 육군행정학교에 배속되었다. 순간의 호기심 덕분에 모두가 소원하는 행정병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기획관리, 문서관리 등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어릴 적 고향 농협의 급사노릇을 한 적이 있던 나로서는, 난생처음 서구식 행정 시스템을 접하자마자 그 합리성과 효율성에 잔뜩 매료되었다.
당연히 성적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행정병교육이 끝나자 나는 '보직 중의 보직'이라는 육군본부에 배속되었다. 육군본부 부관감실 통계과에서 일하면서 당시 육군업무의 전산화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할 수 있었다.
동기들 표현대로라면 나는 "억세게 운이 좋은 녀석"이거나 "끝내주는 잔대가리"였다. 신병훈련소에서 육군행정학교로, 그곳에서 다시 육군본부로 소위 "보직의 고속도로"를 탔기 때문이다. 동기들이나 선임자들은 모두 내게 든든한 '빽'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 사실 그 '빽'의 정체는 '호기심'이었다.
육군본부에서 근무 중이던 1961년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육군본부 근무자를 대상으로 행정요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원은 고사하고 혹시라도 차출될까 싶어 모두들 전전긍긍하는 분위기였다. 쿠데타가 진압되고 나면 반역자로 몰려 죽게 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에 정치적 식견이나 역사의식이란 것이 부족했던 내게는 그런 소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운 곳에는 늘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경험이 있는 법, 그곳에 내가 안 가고 누가 가랴. 동기들은 당연히 "미친놈" 취급이었다.
다행히(?) 반역자로 몰려 처단되는 일 없이 나는 나머지 군생활을 그곳에서 보냈다. 새로운 것이라면 무조건 사생결단하고 달려드는 성격 탓에, 그곳에서도 나는 성실하고 영민한 행정병으로 소문이 났다. 당시 그곳에 파견나와있던 <중앙정보부> 간부들은 내가 전역 명령을 받자마자 곧장 <중앙정보부>로 데려갔다. 파격적인 '스카우트'였다. 내 안의 호기심을 부단히 좇고 있는 사이, 어느새 나는 5급(현재 9급) 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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