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 동료들은 거의 대부분 서울의 명문대 출신이거나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다. 그들은 나와 동기임에도 모두들 ‘4급’ 이상이었다. 나는 강한 승부욕에 사로잡혔다. 할당되는 업무는 항상 남보다 먼저 끝냈고, 수시로 실시되는 각종 정보시험에서 나는 항상 1등을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동기들 중에서 가장 빠른 승진기록을 세웠다. 1976년 7월, 나는 부이사관으로 승진했다. 입사 14년, 여섯 번째의 승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정확히 18년 동안을 일했다.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나의 공무원 생활은 마냥 순조로웠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몇 달전 <중앙정보부>는 <보안사령부> 축소작업을 단행했다. 본래 업무와 상관없이 일반인 대상의 정보활동을 벌이다보니 월권행위와 민폐가 극심하고 예산 유용도 심각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나는 그 작업에 실무책임자로 참여했다. 그러나 10.26.과 함께 <보안사>가 득세하고 <중앙정보부>는 오히려 풍전등화 신세가 되었다. 말 그대로 ‘세상이 바뀐’ 것이다.
1980년 5월, 평소처럼 출근했더니 내 책상 위에는 해고통지서가 놓여 있었다. 나는 책상정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직장을 나왔다. 그동안 직장밖에 몰랐던 인생이었다. 대낮에 마땅히 갈만한 곳도 없었다. 나는 집 뒤의 청계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과 순진하기만 한 아내, 내 주변의 익숙했던 모든 것이 갑자기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나는 마흔 셋이었다. 아득했다.
18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알만큼 알고 있다고 자신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무원의 눈으로 감당할 만한, 꼭 그만큼의 세상이었다. 막상 퇴직당하고 보니 세상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직장을 잃어버린 나는 세상의 모든 것에 서툴렀다. 무엇보다 일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일을 하기 위해서 나는 세상을 다시 배워야 했다.
동사무소에 가서 처음으로 인감증명이라는 걸 떼어보고, 등본도 떼어보았다. 운전기사나 집사람에게 시키던 일이었지만 직접 해보려니 어렵고 복잡하게만 여겨졌다. 무엇을 하든 운전면허는 있어야겠다 싶어 학원에 나가봤지만 면허시험에는 번번이 떨어졌다. 만만한 건 도대체가 하나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내 운전면허를 따놓고 소형차부터 한 대 구입했다. 차가 집으로 도착한 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아이들은 드라이브를 가자고 졸랐다. 나도 모처럼 기분이 좋아 그러마고 나서려는데 불쑥 손님이 찾아왔다. 공무원 시절 나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부하직원이었다.
위로와 안부와 격려가 한참 오간 후, 그는 귀가 솔깃할 만한 이야기를 꺼내놨다.
“제 잘 아는 분이 부천에서 조그만 부품공장을 하십니다. 요즘 동업자를 구한다고 하시던데…”
공장이면 어떻고 식당이면 어떠랴. 찬밥 더운 밥 가릴 심사가 아니었다. 더구나 동업이라지 않은가.
“공장이라면, 대체 뭘 만드나?”
“스위치 클립이라는 건데요. 전기설비에 쓰이는 부품이랍니다. 판로가 확실해서 경기도 안 타고 전망도 좋다던데요.”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그런 쪽으로는 워낙에 문외한 아닌가. 나 같은 사람도 쓸모가 있으려나?”
“그런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은행쪽이나 관청쪽 일을 봐주시면 되지요.”
듣고보니 그럴 듯했다. 그런 일이라면 내 공직 경험도 제법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그를 앞세우고 당장 공장으로 향했다.
상호는 <풍전기공>이었다. 사장을 만나보니 우직하고 성실해 보였다. 다만 전해들은 것과는 말이 좀 달랐다. 대표이사 자리를 넘길 테니 얼마가 되든 자본을 투자하라는 것이다. 자기는 영업이사로 물러나겠다고 했다. 불안하기도 했지만, ‘사장’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들떠 그 자리에서 2천만 원을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내가 받은 퇴직금의 꼭 절반이었다.
출근을 시작한지 1주일이 채 안되어 빚쟁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영업이사로 일하겠다던 사장은 그날 이후 볼 수 없었고, 인사기록부에 올라있던 이사들은 아예 연락조차 안되었다. 공장에 있던 기계들도 알고보니 모두 담보에 걸려 있었다. ‘퇴직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퍼뜩 떠올랐다.
순식간에 2천만 원을 날리고 껍데기뿐인 공장 하나를 인수한 것이, 말하자면 내 ‘경영 인생’의 시작이었다. 어찌해야 할 지 몰라 허수아비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던 중에 옛 은사의 소개로 P라는 엔지니어를 만났다. 그와 나의 만남에는 무언가 운명적인 데가 있었다. 공장이 처한 사정을 솔직히 다 털어놨음에도 그는 막무가내로 내 밑에 들어올 것을 고집했다.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그는 폐허나 다름없는 <풍전기공>에 뛰어들었다.
그를 얻고 나니 비로소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게 모자란 현장경험은 베테랑 엔지니어였던 P가 보완하고, 회사의 전반적인 관리업무와 영업활동은 내가 담당했다. 현장이 움직여주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뒤늦게 <풍전기공>을 살려보고 싶어진 것이다. 이대로 속수무책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오기이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건 다 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하고 무슨 일이든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현장직원들이 부품을 사다 달라면 즉시 청계천으로 달려갔다. 공장 청소도 내가 하고 은행일도 내가 보았다. 거래처에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찾아가서 몇 번이고 담당자의 바짓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 시절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나를 두고 허수아비라고, 팔불출이라고 무시하며 수군거리던 직원들도 차츰 나의 진정을 알아주기 시작했고, 나는 서서히 진짜 ‘사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