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이 눈앞에 닥쳐 있었다. 한 목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가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집에서 아내와 함께 우울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드디어 장비가 돌아간다는 개발팀장의 전화였다. 나는 듯이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정말로 기계는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우리는 실로 어이없는 헛점을 발견했다. 기능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우리가 만든 기계는 숙련된 기능공보다 무려 4배의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18억을 삼킨 ‘바보 장비’였다. 개발팀장은 나를 부둥켜 안고 오열했다.
“사장님, 용서하세요! 제가 사장님 전재산을 날렸습니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상태로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후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방안에만 틀어박혀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사무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원들은 어떻게들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강원도 어디쯤에서 승용차를 타고 가던 일가족이 벼랑에서 떨어져 몰살했다는 뉴스보도가 있었다. 내게는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있었다. 식구는 많고 차는 작아서 문제가 좀 되겠지만, 한 가족이 자살을 하기에는 그 방법이 가장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를 불러앉히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죽읍시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이 없구려.”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아내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동반자살을 결심했건만, 아이들 생각만 하면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이내 포기하곤 했다. 나는 결국 동반자살을 포기하고 혼자서라도 죽을 결심을 했다. 근 한 달간 동네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한 병 가까이 사모은 나는, 소주 한 병을 사들고 집 뒷편의 청계산에 올랐다.
정상에 올라와 보니 강남 일대가 시원스레 내려다보였다. 비정한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나 혼자만 이렇게 비참해져야 한다는 것이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라도 갈라져서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한꺼번에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주병과 약병을 발치에 내려놓은 채 나는 그대로 앉아 한참동안 서럽게 울었다.
어두워지도록 산 속에 홀로 앉아 실컷 울고나니 얼마간 속이 시원해진 느낌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산속의 차가운 밤공기가 내 탁한 뱃속을 정갈히 씻어주는 듯했다. 명징해지는 머릿속에서 차츰 오기 같은 것도 생겨나고 있었다. 실패는 했지만 기술은 남아 있지 않은가. 4년 동안 18억을 쏟아부어 축적한 첨단기술을 이대로 흩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 기술로 좀더 쉬운 일을 다시 시작하면 될 게 아닌가.
어두운 계곡을 향해 약병을 있는 힘껏 던져버린 나는, 그 길로 산을 내려와 택시를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직원들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사무실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각자 알아서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달만에 갑자기 나타난 사장을 보고 놀라는 직원들에게 나는 호통을 쳤다.
“무슨 짓들 하고 있는 거야! 우리 회사가 망했어? 얼른 짐들 못 풀어!”
모처럼 기분 전환도 할 겸, 자극도 받을 겸하여 나는 직원들을 데리고 마침 진행중이던 [세미콘 코리아]라는 반도체장비 전시회를 찾아갔다. 그 전시회는 선진국 첨단장비들의 각축장이었다. 그곳에서 우리의 눈길을 대번에 사로잡은 것은 ‘반도체 테스트 핸들러’였다. ‘핸들러’는 생산된 반도체칩의 이상유무와 성능을 테스트한 후, 등급별로 분류하는 기계였다. 반도체 제조공정에 꼭 필요한 장비이면서도, 매우 복잡한 종합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필요한 전량을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웨이퍼 검사장비’를 개발해왔던 우리들로서는 핸들러의 국산화가 영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다만 시간이 문제였다. 당시의 <미래산업>은 또다른 장비개발에 투자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아니, 개발이 문제가 아니라 회사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당장의 큰 일이었다. 사실 핸들러라는 장비는 그 크기부터가 엄청났다. 그토록 커다란 기계는 수만 개의 정교한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최첨단의 전자, 기계 기술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우리는 핸들러의 구조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우리가 풍부한 개발 경험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개발시간은 필요할 터였다. 어렵사리 추스린 의욕이건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내 앞에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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