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공터에서 뛰어놀고 있노라니 낯선 노인 한 분이 나를 불러세운다. 한참 동안 내 두 손을 꼭 붙잡고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대뜸 이런다.
“허… 크게 될 놈일세…”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크게’ 되지 못했다. 그 노인은 해장술에 취한 삼류 관상쟁이었을까. 어쨌든 그 노인은 내게 은인이다. 어떤 난관 앞에서도 ‘결국 내 인생은 해피엔딩이 되리라’는 대책없는 낙관을 갖게 해주었다. 나는 스스로 ‘크게 될 놈’에 어울리는 짓만 하려 애썼다. 크게 되지는 못했을 망정, 덕분에 작고 편벽되이 살지는 않았다.
또한 그 말은 내게 미래지향성을 심어주었다. 구차하고 핍진한 과거와 현재일랑 매순간 훌훌 털어버리고, 오로지 다가올 날들만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나는 결국 크게 될 놈이니까. 이대로 끝날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세간의 표현이 내겐 늘 흡족하지 않았다. 미래는 맞이하거나 준비하는 게 아니다. 확신을 갖고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한 직원이 뒤통수를 긁으며 사장실을 노크한다.
“사장님. 아들놈 숙제 때문에 상의 좀 드려야겠습니다.”
“숙제?”
“학교에서 아빠 회사의 사훈을 적어오라는데…”
10여 년전의 일이다. 그때까지 <미래산업>에는 사훈이라는 게 없었다. 난감한 와중에도 순간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미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창조합니다. 어떤가?”
시류에 끌려가지 않고 미래를 창조하겠다는 일념으로 <미래산업>을 만들고, 이끌어왔다. 착하고 진취적인 기업을 일궜다며 세인들이 칭찬해줄 때, 나는 그 노인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지금 이 순간, ‘크게 될 놈’에 어울릴 만한 일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회사를 직원들에게 물려주고, 인재양성을 위해 얼마간의 재산을 내놓았다. 이제 크게 되었나. 아니다. 여전히 그 말은 내게 숙제다.
은퇴한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명예욕이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이 바로 그런 부끄러움이다. 연재를 끝내면서도 나는 여전히 자문자답하고 있다. 무에 내세울 게 있다고 또 떠드는가. 물러난 놈이 왜 자꾸 떠드나. 그래서 노추(老醜) 아닌가. 하지만, 먼저 기업한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 걸 어쩌나. ‘크게 된 놈’으로서 떠드는 게 아니라 ‘크게 될 놈들’을 위해서 떠들고 싶은 걸 어쩌나.
나는 벤처인으로 살았다. 그래서 지금도 벤처인으로 사고하고, 벤처인으로 행동한다. 나는 내 자식들 만큼이나 이땅의 벤처인들과 벤처지망생들을 아끼고 사랑한다. 아니 모두 내 자식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때 신문들이 내게 ‘벤처 대부’라는 칭호를 달아주었을 때, 민망한 와중에도 한편으론 좋았다. 그래서 또한 나는, 지금도 수없이 반복되고 있는 그들의 시행착오와 실족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한다.
나는 이제 그들에게 ‘길’ 하나를 보여주고 싶다. 물론 그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우길 마음은 없다. 그래서 나의 글들은 시종일관 경험에 빗대거나 의문부호로 끝이 난다. ‘크게 될 놈들’이라면 전범(典範)이건 반면교사이건 깜냥대로 읽어내리라. 그걸로 족하다. 내게도 정답은 없다. 나는 그저 후배들에게 ‘그 옛날의 낯선 노인’으로 다가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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