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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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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

가능한 것에 대한 포기

삶은 만남과 이별, 일상과 일탈을 두 중심으로 하는 타원형이다. 한 중심에서 다른 한 중심으로 오가며 ‘처음’과 ‘익숙함’을 반복하는 것이 삶이다. 어느 한 쪽에 머물러 있는 한 가슴 떨리는 삶은 없다. ‘익숙한 처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삶이 그 의미를 유지해가는 비결이다.

인도철학의 대가 이거룡 교수(동국대)가 인도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실은 인도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오히려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체념과 초월, 내면으로의 침잠과 우주로의 확산, 맹목과 깊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익숙한 처음을 시험했던 고대 인도인들의 삶으로 오늘 우리의 삶을 보자는 것이다. 편집자

***가능한 것에 대한 포기**

마드라스대학 부근에 하루 종일 하늘만 쳐다보는 이상한 거지가 있었다. 다만 두 손을 내밀고 서서 하루 종일 하늘을 쳐다볼 뿐, 지나가는 행인이든 동전을 던져주는 사람이든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리송한 거지였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끔 말을 걸어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처음에는 구걸을 위한 고도의 위장술이려니 했다. 그러나 두 해가 지나도록, 내가 마드라스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도 그는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어떤 때는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보이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시시콜콜한 세속을 훌쩍 뛰어넘은 성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대화가 없었으니 그의 속마음을 확연히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행위가 단지 구걸을 위한 쇼맨십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드라스를 떠나 델리대학으로 옮긴 후에도 그의 정체는 늘 내 마음 속에 맴도는 화두였다.

체념과 초월의 경계에 의심이 일었다. 끼니는 걸러도 구걸한 돈으로 꽃을 사서 신 앞에 바치던 그의 뒷모습에서 체념과 초월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체념이 초월 같고 초월이 체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가 막혀 앞이 캄캄할 때 언뜻 피안을 보듯, 미래로 통하는 문이 꽉 막힐 때 문득 신을 만나듯, 체념은 언뜻 초월의 틈새를 엿보게 하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체념은 초월을 닮아있다. 비록 짧은 순간이기는 해도 체념의 순간에 편안함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릴 적에 어쩌다가 매 맞을 일을 했을 때, 매를 피할 수는 없을까, 몇 대나 맞을까, 얼마나 아플까를 걱정하고 지레 겁을 먹고 있다가도, 문득 설마 회초리 몇 대 맞는다고 죽기야 하겠는가 하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것은 일종의 포기 혹은 체념에서 오는 편안함이다. 회초리를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나 회초리를 맞더라도 좀 덜 아프게 맞았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지니고 있을 때는 두렵고 고통스럽지만, 차라리 이런 기대를 포기하고 최악의 경우로 생각을 고쳐먹을 때 오히려 편안함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초월이다.

체념은 분주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초월을 닮아 있다. 삶을 포기한 사람은 이런 저런 것을 찾아 움직이지 않는다. 적어도 겉모습은 지극히 고요하다. 초월 또한 그렇다. 고요하다. 분주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사진> 갠지스 강가에서 목욕하는 힌두교도들. 강에서의 목욕은 힌두교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화의례 중 하나다. @ 이거룡

이렇듯 체념은 초월을 닮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체념이 다 의미 있는 체념은 아니다. 백치의 무지와 성자의 무지가 다른 것처럼, 체념에도 의미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인도의 길거리에서 만나는 숱한 체념들이 모두 초월일 수는 없다. 만일 모든 체념이 그대로 초월이라면, 요가도 필요 없고 고행도 무의미할 것이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가능한 것에 대한 체념이다.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체념하는 것과는 다르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체념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화성에 가는 것을 체념하는 것은 쉽다. 애써 체념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체념이 있다. 이것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을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가능한 것에 대한 포기는 에너지를 생성시킨다. 먹을 것이 없어서 끼니를 포기하는 것과 먹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는 단식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다. 끼니를 포기한다는 점에서는 둘 다 같지만, 그 동기나 결과는 전혀 다르다.

마드라스에 살면서 가끔 우리나라 선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이 내게 물어오는 단골 질문은 “김치 생각나지 않느냐?” “된장찌개 먹고 싶지 않느냐?”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미 체념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치를 생각한다고 해서, 된장찌개를 바란다고 해서 그것을 맛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항공 우편으로 편지를 보낸다 해도 2주는 걸리는 형편이었으니, 김치를 바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델리로 옮기고 나서 먹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한국을 오가고, 원하기만 하면 인편에 진공 포장된 김치 한 포기라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을 때, 김치 생각도 나고 된장찌개 생각도 났다. 가능성이 없으면 기대도 없다. 체념뿐이다.

아예 가능성이 없으면, 전혀 기대하는 마음도 일지 않는다. 아무런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다.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체념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정말 외로운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누군가가 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언제고 불쑥 와 줄 사람이 있는데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찾아올 사람도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는 사람은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체념이 있을 뿐이다.

<사진> 인도사람들의 동물에 대한 친근감은 각별하다. 특히 소는 숭배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우리가 인도에서 흔히 보는 체념도 그런 것이다. 그것은 내가 마드라스에서 김치를 체념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아무도 찾아올 이 없는 사람이 손님을 기대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는 체념이다. 불가능에서 오는 체념이다.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루 세 끼의 밥은 기대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노변에서 파는 차 한 잔이라도 얻어 마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다행이다. 아무리 벗어나려 애쓴다 해도 이미 모든 가능성은 막혀있다.

어느 도시를 가든 눈에 띄는 것은 가난이며 체념이다. 거리 곳곳에 집 없는 사람들의 남루한 옷가지가 걸려 있고, 그 아래 누운 사람들, 체념이 누워 있다. 체념이 주는 찰나의 편안함을 베고 누워 차라리 다음 생을 기다린다. 그렇다고 다음 생을 위한 준비가 따로 있을 리 없다. 현생은 이미 체념이다. 그것은 어떤 이유로도 미화될 수 없는 속절없는 체념이다.

인도인들의 이러한 체념은 수동성에 우위를 두는 이들의 오랜 사고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인도 사람들은 능동성보다 수동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외치기보다는 오히려 침묵의 자유를 믿는 사람들이 이들이다. 이들에게 소극성은 능동적인 것 이상의 어떤 차원이다. 그것은 나태하고 무능한 사람의 표징이 아니다.

이들의 철학에서도 수동성에 대한 우위는 현저하게 나타난다. “두 마리 새가 나무 위에 앉아 있다. 이들은 언제나 함께 있으며 또한 같은 이름으로 알려진다. 그 중 한 마리는 달콤한 열매를 먹고 있으며, 다른 한 마리는 다만 그것을 조용히 관조하고 있다”(<문다까 우빠니샤드> ⅲ.1.1). 우파니샤드의 이 유명한 비유에서 분주하게 열매를 먹고 있는 새는 저급한 차원의 경험적인 자아를 의미하며,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새는 업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자아를 나타낸다.

정신적인 원리 뿌루샤(Purusa, 순수정신)는 조용히 바라보는 자일 뿐 움직임이 없다. 이에 비하여 저급한 물질적 원리 쁘라끄리띠(Prakrti, 근본물질)는 활동성을 특징으로 한다. 해탈이란 뿌루샤가 쁘라크리띠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광란의 춤을 추는 깔리(Kali, 쉬바의 배우자 여신) 여신을 잠잠하게 하는 것은 쉬바(Siva, 힌두교의 삼신 중 하나)의 수동적인 행위다. 쉬바는 적극적인 어떤 행위로 칼리를 제압하여 잠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깔리 앞에 드러누워버린다. 수동성의 승리다. 비폭력의 승리다. 궁극적 실재 브라흐만은 행위자가 아니다. 움직임은 절대자의 모습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수동성은 신성의 표현이며 초월의 표현이다.

사실 힌두교의 종교적인 관용이라는 것도 다른 종교를 끌어안는 적극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가만히 내버려두는 수동성에 있다. 이것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스펀지가 이리 저리 흐르는 물을 흡수하는 것과 같다. 물론 가만히 내버려둘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점에서는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 어렵다. 적이 칼을 들고 덤빌 때 이에 맞서지 않고 조용히 앉아있는 것은, 맞서 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간디의 비폭력이라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동적인 삶의 자세는 구제 불능의 체념으로 빠져들 위험을 안고 있다. 인도사상의 근저에 흐르는 수동성은 이들의 삶을 초월 아니면 체념으로 이끄는 측면이 있다. 인도에 초월의 성자들이 많은 만큼 속절없는 체념의 거지들도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업과 윤회에 대한 믿음도 이런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초월에 이르는 길로 제시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체념을 낳았다.

<사진> 운수(雲水) 중인 유행자(游行者). 힌두교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마지막 단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유행하는 삶이다.

체념은 초월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에 대한 체념이 곧 초월일 수는 없다. 버리기 위해서 우선 가져야 한다. 가진 자만이 버릴 수 있다. 포기할 수 있으려면 우선 포기할 것이 있어야 한다. 포기할 것 없는 자의 포기는 공허하다. 그것은 무의미한 포기다.

진정한 초월은 가능한 것에 대한 포기에서 일어난다. 가능하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욕망이 언제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을 포기할 때,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 욕망이 없다면 초월도 없다. 욕망이 있는 곳엔 초월도 따라 자란다. 초월이 있기 전에 우선 욕망이 있어야 하고 나아가서 그 욕망은 가능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

사람인 이상 욕망을 지니기 마련이지만, 만일 이루어질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면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체념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가능한 상태의 욕망을 포기할 때, 그것을 체념할 때,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에너지가 일어난다. 용수철이 탄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우선 압축되어야 하는 것처럼, 욕망이 초월로 솟구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가능한 상태에 있어야 하며, 나아가서는 그것을 포기할 때 초월에 이르는 에너지로 변형될 수 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물질적인 풍요가 보장되는 사회가 될수록, 인간의 욕망은 무성해진다.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진다. 채울 수 있는 욕망이 많아질수록 그것에 대한 포기의 기회도 많아지며, 가능한 욕망의 포기는 초월에 이르는 에너지를 생성시킨다.

이런 점에서 물질문명의 발달은 자유와 초월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능성을 높여준다. 물질의 풍요를 걱정할 이유는 없다. 물질의 풍요는 새로운 정신문명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해진 욕망이 포기되지 않는 한 초월은 없다.

***필자 소개**

1959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한 후 인도 마드라스대 라다크리슈난연구소(석사), 델리대 대학원(박사)을 졸업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연구교수로 있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도 대중과 교류할 기회를 꾸준히 모색해왔으며, 한겨레문화센터, 철학아카데미 등에서 인도사상을 주제로 대중강좌를 열어 인도사상이 일상의 삶을 향해 열려있음을 보여주었다. 최근에는 ‘EBS세상보기’ 강좌를 통하여 심원한 인도의 사상과 문화를 쉽고 생동감 있게 다룬 바 있다.

라다크리슈난의 명저 <인도철학사>(전4권)를 우리말로 옮겼으며, 저서로 <아름다운 파괴> <두려워하면 갇혀버린다> <이거룡의 인도사원 순례> <구도자의 나라>와 공저로 <논쟁으로 본 불교철학>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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