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수성을 통치한 ‘헤르메스’ 의 지구 방문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수성을 통치한 ‘헤르메스’ 의 지구 방문기

이향순의 '우주 읽어주는 엄마' <9>

올림포스 산에는 궁전들 한 가운데에 큰 도로가 하나 자리잡고 있다. 이 도로는 밤이면 지구에 사는 인간들의 눈에도 잘 보이는 길이다. ‘은하수’라고 부른다.

‘은하수’ 양옆으로 줄지어선 궁전들에는 신들이 거주하며 풍류를 즐기고 사랑을 속삭이며 지구인들을 통치할 신탁을 의논하기도 한다.

어느 날 제우스가 프리기아 땅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아들 헤르메스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헤르메스, 저 언덕 위에 보리수와 참나무 한 그루씩 서 있지. 그리고 거기서 머지 않은 곳에 늪새와 가마우지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늪이 보이지. 저 곳이 프리기아란다. 오늘 저곳을 방문하려고 하는데 나와 함께 가겠니?”

“예. 아버님,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제우스가 주문을 몇 마디 외우더니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올림포스 산 정상에 위치한 구름문을 막 벗어난 헤르메스는 왼손에 지팡이만 움켜쥐고 있었다. 헤르메스의 발에는 날개 다린 가죽신이 보이질 않았다. 제우스가 내려준 마법의 지팡이는 신이건 인간이건 건드리기만 해도 잠이 들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날개 달린 가죽신은 하루에 만리 길도 가볍게 달릴 수 있다.

“아버님, 깜빡 잊고 날개 달린 가죽신을 올림포스 궁전에 놓아두고 왔는데요.”

“하루쯤이야 무슨 일이 있겠니?”

그러나 두 신은 밤이 깊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지상에서 하룻밤을 지새야 했다. 피곤에 지쳐 남루해진 아들과 아버지는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렸다. 집집마다 대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인기척이라곤 거의 들리지 않았다.

마을에서 제일 큰 부잣집 대문을 두드렸다. 덥수룩한 수염이 삐쭉 삐쭉 난 힘센 하인이 두 눈을 비비적거리며 나와 두 행인을 보더니만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으며 투덜댔다. 하인의 찢어진 말투가 적막을 뚫고 높은 담장을 뛰어 넘었다.

“늦은 밤에 빌어먹을 거지들이야.”

두 신은 지친 몸을 이끌고 몇 발자국 걷자 다시 이 마을에서 두 번째로 큰 부잣집을 발견하였다. 처량한 꼴이 된 두 신은 주인을 붙잡고 구걸하다시피 졸랐다.

“당신들 재울 방은 고사하고 먹일 물 한 방울도 없소이다.” 귀찮다는 듯이 돌아선 주인의 뒷모습은 몰인정했다.

“마을 인심이 왜 이다지도 고약하단 말인가.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라곤 없구나.” 아들 헤르메스를 데리고 지구를 방문한 제우스는 천상의 궁전이 몹시 그리웠다.

시간은 달빛마저 졸고 있었다. 갈 곳을 잃고 추위에 덜덜 떨고 있던 두 신은 마을 외딴 어귀에 한적하게 서 있는 오두막집을 보았다. 처마 밑에서 추위나 피해볼 생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작은 오두막집에서는 노부부 필레몬과 바우키스가 한평생을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부뚜막에 진열돼 있는 낡은 가재도구들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꾸밈없이 살아온 두 부부를 닮았다.

신 중의 신이요 왕 중의 왕 제우스가 마지막 용기를 내었다. 나오지도 않는 큰기침을 하였다.

방안에서 기침 소리를 들은 필레몬이 조그만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보아도 허리가 많이 구부러진 노인은 두 나그네를 보자 손을 잡고 초라한 방으로 정중히 안내했다. 두 나그네는 노인이 서성대며 내놓은 해초 방석에 앉았다. 방 한구석의 난로에선 장작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세상이 따뜻했다.

가난한 오두막집에선 한 밤중인데도 불구하고 뒤뜰에서 채소를 캐오고, 있는 반찬을 다시 데우는 소리로 달그락거렸다. 너도밤나무로 만든 그릇에 따뜻하게 데운 세숫물도 내놓았다. 낡은 식탁 위에는 올리브나무 열매와 식초에 절인 산딸기, 무우와 치즈 그리고 재 속에 넣어 약간 익힌 달걀,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스튜가 차려졌다. 오래 된 것은 아니지만 귀한 포도주도 식탁에 올랐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런 환영만찬이었다. 식사 도중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낡은 오두막집에서 가장 귀한 포도주를 담은 주전자가 아무리 마셔도 줄어들기는커녕 가득 차 있었다.

노부부는 두 나그네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무릎을 꿇었다.

“소홀한 대접을 용서해주십시오.” 필레몬이 말하자 바우키스도 따라 머리를 숙였다.

“나와 나의 아들 헤르메스는 하늘의 신이오. 이런 인심이 험한 마을은 불경죄로 벌을 받아야 하오. 당신들만은 예외인 듯 하오.” 제우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우스는 노부부를 일으켜 세우고 그들만을 산꼭대기에 피신시킨 뒤 인심 사나운 작은 마을을 물바다로 휩쓸어 버렸다. 노부부가 살던 오두막집 한 채만이 남았는데 어느덧 네 기둥은 굵은 원주가 되고 지붕은 황금으로 덮이고 마루에는 대리석이 깔려있었다. 문도 조각과 황금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우리 신들을 하룻밤 보살펴준 노부부여, 그대들의 소원을 말해보시오.” 제우스 옆엔 헤르메스가 멀쓱하게 서 있었다. 그는 어제 올림포스 산을 떠날 때 깜빡 잊고 챙겨오지 못한 날개 달린 신발 때문에 지상에서 지난 밤 동안 고생한 아버지를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저희는 사제가 되어 당신의 이 신전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 세상에서 화목하게 생애를 보낸 만큼 죽을 때도 함께 죽기를 원합니다.”

아침 일찍 동이 틀 무렵, 제우스는 노부부의 소원을 허락하고 헤르메스에게 올림포스 산으로 갈 채비를 서둘도록 했다. 헤르메스는 ‘태양의 신’ 아폴론의 안내를 받으며 올림포스 신전으로 출발했다.

먼 훗날 노부부는 약속대로 똑같은 시간에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제우스를 따라 지구를 방문하고 따뜻한 사랑을 체험한 헤르메스는 마이아가 그의 어머니이다. 원래 제우스의 수석 비서인 그는 날개 달린 가죽신을 신고 다니며 날쌔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손에는 두 마리의 뱀이 감겨 있는 지팡이를 들고 다닌 그는 과학 상업 격투기 운동 따위의 숙련과 민첩성을 요구한 모든 분야를 맡고 있으며 거짓말을 해도 탈이 안나 도둑질도 주관하는 신이다.

이러한 헤르메스가 관장하는 곳이 바로 수성이다. 꾀돌이 헤르메스의 성격을 닮은 수성은 태양의 코앞에 자리잡고 있어 새까맣게 그을린 모습이 마치 우주의 깜둥이를 연상케 한다.

약 46억년 전 탄생하자마자 공기 입자가 모두 탈출해 버린 수성은 태양에서 발사한 직사광선을 피할 길이 없어 아예 숯 덩어리처럼 까만 얼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터이다.

수성의 지름은 4천 8백 80㎞이고 태양과 5천 7백 90만 ㎞ 떨어져 있다. 자전 주기는 59일로 우주를 초속 48㎞로 돌고 있다.

수성은 태양과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지구상에서 수성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살펴보기란 영 쉬운 일이 아니다.

수성은 1년에 세 번 정도 해질 무렵 서쪽 하늘 지평선 근처나 해뜨기 바로 전 동쪽 하늘에 나지막이 모습을 드러내 겨우 보일락 말락 할 뿐이다. 때때로 금성의 밝기만큼 빛날 때도 있지만 태양의 빛에 가려 대부분 눈에 띄질 않는다.

수성은 몹시 찌그러진 타원 궤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울 때는 4천 6백 만 ㎞ 까지 접근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심률이 워낙 큰 수성은 태양에 바싹 다가가 살인적인 일광욕을 즐기는가 하면 멀리 도망칠 때는 섭씨 영하 170도로 곤두박질쳐 심한 혹한에 떨기도 한다.

이는 제우스의 수석비서로서 유일하게 이승과 저승을 왔다 갔다 하며 과학과 상업을 관장하는가 하면 도박을 주관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인격을 지닌 헤르메스의 천성을 쏙 빼 닮은 듯 싶다. 아마 빼어난 말솜씨 덕인가 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