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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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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3>

접속과 접촉

힌두교 사원을 다녀보면 신상(神像)의 코와 이마, 손끝과 발 언저리가 새까맣게 손때로 절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손으로 주물러댄 인도 사람들의 구체적인 신앙 현장이다. 이들은 사원에서 신에게 예배할 때, 멀리서 신상을 향하여 합장하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우선 손으로 닿아야 한다. 신과 인간의 교감은 단지 눈을 감고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접촉이 필수적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신상을 손으로 만진다는 것은 불경스런 행동이며, 따라서 금지되는 게 보통이지만, 힌두교인들은 우선 신상에 자기의 손이 닿고 그 손을 다시 자기의 이마에 대는 것이 예배의 기본이다. 오히려 접촉을 강조한다. 신과 사람의 관계를 손으로 만져서 확인하는 셈이다. 확실히 이들의 삶 속에서 신과 사람의 관계는 상당히 가깝고 구체적이다.

<사진1> 오차르의 쉬바교 사원. 힌두교도들에게 사원은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이 만나는 곳, 신과 인간이 접촉하는 장소이다.

이와 같이 사람과 신의 관계는 아주 친밀하며, 그것은 직접적인 접촉을 통하여 확인되는 반면에 사람과 사람간의 피부 접촉에 대해서는 전혀 딴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피부 접촉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촉각을 곤두세운다. 가장 천한 계층의 사람들을 불가촉천민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런 사고방식의 단적인 예다. 서로 접촉해서는 안 될 인간이라는 말로 가장 천한 계급을 나타낸다.

이들이 피부 접촉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는 신체적인 접촉이 곧 정신적인 접촉과 관련을 지닌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결한 것 혹은 불길한 것을 만져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몸으로 닿는다는 것은 곧 몸이 더러워질 뿐 아니라, 영혼 또한 오염된다고 본다. 몸이 닿으면 마음도 닿는다는 것이다. 영혼의 오염이 신체적인 접촉을 통하여 일어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으로 영혼의 정화 또한 신체적인 정화를 통하여 가능하다고 본다. 갠지스강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바로 이런 사고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인도의 사회와 종교의 근간이 되는 카스트 제도 또한 접촉의 차단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그것은 접촉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접촉을 피하기 위한 제도이다. 카스트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은 자기와는 다른, 불결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한다는 것이다. 카스트의 금지 규정이 결혼과 식사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다른 카스트의 사람과 결혼이 금지되는 것은 피를 섞지 않겠다는 것이며, 하위 계급의 사람과 식사하지 않는 것 역시 이들과의 접촉을 통한 오염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남녀간의 신체적인 접촉에 대해서도 엄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남인도에서는 시내버스에 남녀의 좌석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왼편은 여자석, 오른편은 남자석이다. 설사 여자석이 비어있다 해도 남자는 앉을 수 없다. 남자석에 여자가 앉는 것은 경우에 따라 허용된다. 버스 안을 좌우로 갈라놓는 철망을 설치해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복잡한 버스라 해도 여자가 올라오면 금방 지나갈 길이 열린다.

사람의 오관 중에서 촉각은 좀 특별하다. 특히 시각과 정면으로 대비된다. 시각은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많은 정보를 쉽게 받아들이는 감관인 데 비하여 촉각은 가장 굼뜨게 적은 량의 정보를 받아들인다. 1백여 미터 바깥의 사람이라도 눈으로 빠르게 알아볼 수 있지만, 촉각으로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 손으로 만져본다 해도 그가 누군지 정확히 알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지속력이라는 점에서는 그 반대다. 시각의 지속력이 가장 짧은 반면에 촉각의 지속력은 가장 길다. 눈으로 본 것의 느낌은 금방 사라지는 반면에 손으로 만져서 안 것은 마음 속에 오래 지속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봐서 좋다는 생각이 들면, 그 다음에는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일단 마음이 끌리면 만져보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이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박물관이나 전시장에 가보면 괜찮은 물건에는 으레 `손대지 말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문이 붙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부분은 어김없이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마음에 드는 것과의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고 싶다는 것이다.

인도 사람들이 접촉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촉각의 지속력이 다른 오관에 비하여 현저하게 길다는 것과 관련된다. 어떤 의미에서 촉각은 오관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최후의 확인일 수 있다. 피부가 닿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따라서 관계를 맺어야 할 대상은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 직접 닿아서 확실하게 끈을 연결하고, 피해야 된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피부가 닿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몸이 닿아도 마음만 닿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몸이 닿으면 마음도 닿으며, 마음은 몸을 따라 가기 마련이라는 것이 인도 사람들의 생각이다.

<사진2> 신에게 뿌자(puja, 예배)를 드리고 있는 힌두교의 여인들. 멀리서 합장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신상에 손이 닿아야 한다.

예수가 부활했을 때, 한 제자가 그것을 믿지 못하여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 역시 보이지만 실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손으로 닿아 아는 것은 구체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촉각은 경험 세계에서 최후의 확인인 셈이다. 이른바 경험한다는 것의 가장 구체적인 담보는 피부로 닿아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존재하는 것이 어떤 형태와 색깔로 존재하는가 하는 분별에 있어서는 촉각보다 시각이 앞설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경험 세계에서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의 여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확인은 촉각이다.

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하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 손끝이 닿아야 하고, 입술이 닿아야 하고, 그리고는 몸 전체가 닿아야 한다. 산 사람과 영혼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두 연인이 끊임없이 갈구하는 것은 결국 접촉이다. 이 영화의 주제가에서 반복되는 `I am hunger for your touch!'는 몸을 지닌 사람과 몸이 없는 영혼 사이의 사랑이 지니는 한계를 말한다. 영혼과 인간의 사랑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부로 닿는 사랑은 불가능하다. 피부로 닿지 못하는 사랑은 허전할 수밖에 없다. 최후의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컴퓨터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이버 문화가 유행이다. 몸으로 닿는 접촉이 아니라 가상공간을 통한 접속을 통하여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과 사랑도 하고 유사 성 관계도 가진다. 사람들은 가상공간 속의 행위를 통해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간적으로 대륙을 뛰어넘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마음대로 들여다 볼 수도 있다. 실제 상황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일들이 가상공간 속에서는 어려움 없이 이루어진다. 심지어는 사이버 공간을 통한 종교의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들도 있다. 해방감이나 만족감을 준다는 점에서 가상현실은 우리의 삶에 획기적인 차원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공간을 통해서는 끝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접촉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결코 사이버 세계의 접속으로 완전한 관계로 완성될 수 없다. 가상공간을 통한 접속은 결코 접촉일 수 없다. 이것이 사이버 세계의 한계다. 접속은 접촉에 대한 갈급함을 키울 뿐이다. 사람의 욕망은 결국 컴퓨터가 제공하는 가상현실 속에만 머무를 수 없다. 사이버 섹스가 현실화되지 않은 현실 속에선 욕망을 해소할 방법이라고는 현실적으로 욕망을 해소할 길을 찾는 일밖에 없다. 적어도 사람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사는 한, 접속은 접촉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다. 수년 전에 유행했던 영화 ‘접속’에서도 가상공간을 통하여 만난 두 주인공의 결말은 결국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었다.

사이버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의 가장 큰 특징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한 마음 내킬 때 쉽게 물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이 심할수록 사랑이 진할 수 있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현실 세계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지금 세태가 아무리 팔랑개비처럼 가벼운 삶을 추구한다 해도 그래도 어느 정도의 고뇌와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며 온갖 시련이 있다. 어떤 계기로 갈라서야 하는 경우에도 이들의 마음 속에는 온갖 감정이 교차할 것이다. 이에 비하여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남녀의 접속은 어떤 경우에도 실제 몸으로 접촉할 때 얻어지는 감정의 깊이에 닿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는 상대방의 실체조차도 가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접속 중이라는 단서 하나만으로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손으로 만져지는 그는 없다. 떠도는 명령어와 엔터키 치기가 접속을 접촉으로 바꾸어놓지는 못한다.

이른바 문명화 과정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피부로 닿는 직접적인 체험을 차단하는 과정이었다. 옷이라는 것이 그렇고 신발이라는 것이 그렇다. 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명인의 기준은 얼마만큼 적나라한 인간의 몸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차단하고 감싸는가 하는 데 있다.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움집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단단한 시멘트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보다 문명화된 사람들이며, 중요한 부분만 나뭇잎으로 가리고 사는 사람들보다는 전신을 옷으로 가리고 사는 사람들이 문명인이다. 가능한 한 외부 환경과 피부가 직접 닿는 것을 피한다.

고작해야 피부 접촉은 입고 있는 옷에 닿는 것, 양말이나 신발에 닿는 것이 전부다. 손을 제외한 다른 부분이 외부 대상에 닿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손에 닿는 것도 한 쪽에만 집중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손으로 만지는 것은 매끈한 것 일색이다. 옷감이 그렇고 가전제품이 그렇고 우리 주변에 만져지는 것은 온통 매끈한 것뿐이다, 거칠고 성긴 것은 없다. 터실터실한 나무껍질의 질감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 덩달아서 사람도 매끈해지려고 기를 쓴다. 가능하면 매끈해지려고 하는 것은 여자든 남자든 마찬가지다. 경박하고 매끈한 플라스틱 문화의 비극이다.

<사진3> 쉬바교 사원 지성소 앞에 안치된 난디(쉬바의 탈 것). 순례자들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난디의 등을 쓰다듬거나 뿔을 만진다.

우리의 눈은 이런 저런 여러 가지를 본다. 입도 마찬가지다. 미식가들은 이 집 저 집 골라 다니면서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는다. 귀도 자유롭게 이런 저런 소리를 듣는다. 집안에서 음악을 듣다가도 싫증이 나면, 차를 몰아 조금만 나가면 새소리도 들을 수 있고 바람에 낙엽이 서걱거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코도 그런대로 자유롭다. ‘푸세식’ 변소가 아니라서 이제는 도시 사람들이 똥냄새를 맡기 어려워지긴 했지만, 이런 저런 냄새를 맡으며 산다.

이에 비하여 우리의 오관 가운데 유독 피부만 옷 속에 갇혀 있고 신발 속에 갇혀 있다. 뿐만 아니라 피부에 직접 닿는 옷감이라는 것은 매끈하고 부드러운 것 일색이다. 눈이 한 가지 색깔만 보고 살 수 없는 것처럼, 피부도 한 가지 감촉만으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입이 매일 한 가지 맛의 음식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부도 매일 한 가지 감촉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촉각이 지나치게 억눌리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피부를 통한 촉각에도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것에 걸맞는 정도의 다양한 대상이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눈은 여전히 열려 있고 귀와 코와 입은 여전히 뚫려 있는데 유독 피부만 갇혀 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한 가지 촉감에 갇힌 현대인의 피부는 미칠 지경인지도 모른다.

피부 접촉이 차단된 현대인은 눈으로 보는 것에 목을 맨다. 철저하게 볼거리에 집착한다. 현대 문화는 몸으로 닿아 체험하는 문화라기보다는 보는 문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텔레비전이다. 그러나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보는 것이 피부로 닿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접촉을 갈구하는 것이 사람이며, 내가 눈으로 보는 대상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불안하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촉각의 억눌림에서 오는 불안은 대단하다. 경험 세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오관 가운데 가장 확실한 접촉이 거세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하면 흉포해지는 게 사람이다.

인도 사람들의 삶 속에는 아직도 원초적인 피부접촉이 많이 남아 있다. 지금은 많이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식사는 손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명인이 보기에는 도무지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지만,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손으로 식사하는 것이 수저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위생적이라고 본다. 이들은 손으로 식사를 하면서 손끝에 와 닿는 음식물의 감촉을 즐긴다. 눈에 와 닿는 시각과 코에 들어오는 후각과 혀끝에서 느끼는 미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손끝에 와 닿는 촉각을 즐기는 것이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찰흙을 만지면서 놀듯이, 손끝에 와 닿는 여러 가지 음식의 제각기 다른 온도와 감촉을 즐기면서 식사한다. 손으로 식사를 하면 음식에 대한 친밀감이랄까, 수저로 식사를 할 때와는 다른 어떤 느낌이 분명히 있다. 편안함이 있다.

오른손으로 식사를 하는 한편, 왼손으로는 똥을 눈 후에 밑을 닦는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손으로 만질 뿐만 아니라, 항문으로 나오는 똥을 손으로 만진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대개 맨발이다. 심지어는 학교에 오는 학생들도 맨발이고, 교수도 맨발로 강의실에 온다. 요즘도 마드라스에서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맨발의 인도 사람들을 심심찮게 본다. 맨발로 흙길을 걸으면 홀가분함, 편안함이 있다. 맨발은 해방감을 준다.

인도 사람들이 가난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순박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들의 삶이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오관에 나름대로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될 것이다. 특히 여러 형태의 원초적인 피부 접촉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 우리의 경우에는 촉각 이외의 다른 감각의 경우에도 불균형이 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의 혀끝에 와 닿는 것은 단 것, 신 것, 고소한 것, 구수한 것, 이른바 맛있는 것뿐이다. `맛있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쓴 맛이 난다거나 톡 쏘는 맛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한방에서는 쓴 맛이 감정과 관련을 지닌다고 한다. 요새 사람들이 감정이 메마른 것은 쓴 맛 나는 먹거리를 꺼리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쓴 맛을 취하지 않는데서 오는 병이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귀는 어떤가? 매끄러운 멜로디, 조작된 기계음에 탐닉한다. 인공의 소리 말고도 우리가 들을 만하고 꼭 들어야 하는 소리는 얼마든지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접속'이 많을수록 `접촉'은 오히려 줄어드는 희한한 세상에 살고 있다. 휴대전화다 컴퓨터 통신이다 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리얼 타임으로 접속이 가능하지만, 접속 수단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을 유폐시킨다. 익명의 섬이 된다. 시멘트벽으로 둘러쳐진 삭막한 섬이 된다. 다른 섬으로 가는 배는 드물고 단지 디지털 신호를 실어 나르는 선 한 가닥이 외부와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사진4> 사원 앞에서 뿌자에 필요한 물건들을 팔고 있는 여인. 대개 힌두교도들은 꽃이나 코코넛을 신에게 바친다.

인터넷을 통한 접속, 공중을 떠도는 전파를 통한 접속, 이러한 우회적인 만남은 우리의 삶을 삭막하게 만들고 있다. 문명은 인간을 편하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 감각의 퇴화를 가져왔다. 이제 상대방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편지는 아련한 추억으로 사라지고, 맨발로 논두렁을 달리면서 느꼈던 흙의 부드러움도 잊은 지 오래다. 피부로 닿고 느끼면서 얻어지는 원초적인 감정과 인간다움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세련이라는 이름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살다가 아파트에서 죽는 우리가 오히려 길거리에서 태어나 길거리에서 살다가 길거리에서 죽는 인도 사람들보다 더 불쌍할 수도 있다.

감각에 있어서의 불균형이 심각해질수록, 피부를 통한 직접적인 접촉이 억제될수록 심리적인 불안은 가중될 것이다. 고도로 다기능화 된 현대사회에서 맨발로 땅을 밟고, 손으로 음식을 만지며, 맨몸으로 풀밭에 눕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형태로든 차단되고 퇴화된 원초적인 접촉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옷을 입지 않고 맨발로 살던 고대인들이 본다면, 온몸을 천으로 칭칭 감고 얼굴과 손만 삐죽 드러난 우스꽝스럽게 되어버린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균형 잡힌 생각을 지닌 조화로운 삶이라는 것은 결국 감각 세계에서의 균형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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