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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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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4>

늦게 달리기 자전거 경주

인도의 홀리(Holi) 축제는 물풍선 세례로 유명하다. 길거리에 나가면 시도 때도 없이 물풍선이 날아와 얼굴이고 어깨고 무차별 공격을 당하기 일쑤다. 심지어는 이웃 사람들이 집에 찾아와 거실에 물풍선을 던지고 달아나기도 한다. 물에 여러 가지 색깔의 물감을 타기 때문에 얼굴이고 옷이 엉망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근감의 표시라 하니 화를 낼 수도 없다. 따라서 만일 물풍선 세례가 싫다면 밖에 나가지 않는 게 상책이다. 누가 초인종을 누를 땐 일단 의심해야 한다. 문을 여는 순간 물풍선이 날아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진1> 차창 밖으로 내다 본 깔꼬따(Kalkota, 舊 캘커타) 거리풍경, 지하에는 최첨단 시설의 지하철이 다니는가 하면 지상에는 지금도 사람이 끄는 인력거가 자연스럽게 다닌다.

이 축제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침부터 옆집 아이들이 난리다.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으니,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고 뭐라고 고함도 질러댄다. 가만히 들어보니 절대로 물풍선은 아니란다. 지금 아파트 옆 큰길에서 자전거 경주가 있으니 함께 구경가자는 것이었다. 인도 사람들이 자전거 경주라니? 호기심이 일었다. 인도에 몇 년을 살면서도 자전거 경주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물풍선이 아니냐고 몇 번이나 다짐한 후에, 한 번 더 속는 셈치고 문을 열었다.

정말 물풍선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사람들이 이미 횟가루로 그어놓은 출발선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경기장에 전혀 긴장감이 보이지 않는다. 웃고 떠들고, 그야말로 희희낙락이다. 출발선에서 골인 지점까지는 길어야 50m, 최단거리 경주라 할 수 있는데 출발선에 선 사람들에게 전혀 긴장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거리 경주의 경우에는 누가 빨리 출발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한다. 따라서 출발 장면에는 긴장감이 있기 마련이다. 경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복장 또한 전혀 뜻밖이었다. 우리가 자전거 경주에서 흔히 보는 헬멧이나 착 달라붙는 운동복은 고사하고 모두가 평상복 차림에 더러는 슬리퍼를 신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물론 자전거도 경기용 자전거가 아니다. 털털거리는 보통 자전거다.

참가한 사람들의 복장이나 장비도 문제려니와, 우선 자전거로 저렇게 짧은 거리를 달려서 우열을 가린다는 게 과연 가능한가 하는 점이 의심스러웠다. 부상 위험도 불을 보는 듯이 뻔하고, 한마디로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자전거 경주가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출발 신호와 함께 나의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것은 빨리 달리기 경주가 아니라, 늦게 달리기 경주였다. 자전거를 타고 50m를 넘어지지 않고 가장 늦게 골인하는 사람이 일등이다. 자전거는 멈추어 서 있을 수 없다. 가만히 서 있으면 넘어진다. 달려야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달리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늦게 가는 게 요구되는, 참으로 재미있는 자전거 경주였다.

이 자전거 경주 하나를 놓고 인도 사람들은 느린 것을 최고로 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적어도 이 자전거 경주는 이들의 사고방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고 말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빠른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때로는 느린 놈도 일등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2> 나르마다(Narmada) 강가 콘크리트 벽에 광고를 그리고 있는 화공들, 대나무 버팀목 위에선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사실 인도의 교육이나 문화 혹은 경제 정책을 들여다보면 이 자전거 경주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 많다. 무슨 일이든 빠르게 몰아치기보다는 가능한 한 천천히 진행시킨다. 설사 빨리 할 수 있는 일이라도 가능한 한 시간을 끌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지난 1990년대 초기에 있었던 인도의 경제개방 정책만 해도 그렇다. 경제개방은 세계적인 추세이며, 인도의 국익을 위해서 가능한 한 빠른 것이 좋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서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인도는 오늘날 세계적인 IT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내가 보기에 인도사람들은 오히려 느린 게 자연스러운 사람들이다. 느려도 보통 느린 게 아니라 무지무지 느리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아침 열 시 반은 되어야 모든 게 움직인다. 관공서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다. 그러고도 열 한 시가 되면 어김없이 티타임을 갖는다. 일하면서 차를 마시는 게 아니라, 아예 한 30분은 손을 놓고 차를 마시며 노닥거린다. 분명히 오늘 해 줄 수 있는 일도 내일로 미루고, 내일 가면 다시 그 다음 날로 미룬다. 우리 같으면 두어 달 안에 지을 수 있는 집도, 금년에 기초 공사, 내년에 1층, 그리고 돈 벌면 2층을 올린다. 도무지 바쁜 게 없는 사람들이다.

사실 느리다 빠르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내가 보기에는 느린 것이라도 상대방이 생각할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마드라스대학에 입학원서를 넣으면서 담당 직원에게 언제쯤 결과가 나오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조만간에”였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길어야 2주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입학 허가를 받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 그 사이에 수없이 찾아가 당신네 나라 사람들은 도무지 시간관념이 없다고 불평하며 속을 끓였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시간관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생각보다 그들의 행동이 느린 것이었으며, 더 정확하게 말하여 그와 나 사이에 시간관념에 대한 이해의 차이일 뿐이었다.

흔히 느린 것이 시간관념이 없는 것으로 오해되는 것도 이러한 차이에서 기인한다. 인도 사람들은 8시간 기차 여행을 금방이라고 한다. 적어도 기차로 2박 3일은 가야 긴 여행 축에 낀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개념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며, 이러한 차이는 시간에 대한 스케일의 차이와 관련된다. 인도사람들의 사유 속에 뿌리 깊은 신화적인 시간 혹은 우주적인 시간은 보통 수십억 년이다. 예를 들어 브라흐마(Brahma)신의 1주야를 의미하는 1깔빠(kalpa,劫)는 인간의 시간으로 86억 4천만 년이다. 그야말로 겁나게 긴 시간이다. 이 긴 시간이 신에게는 단지 하루 밤낮이다. 브라흐마의 한 잠 속에 수억 년의 인간의 삶이 있는 셈이다.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는 황당한 이야기들이지만 인도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이와 같은 우주적인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인도 사람들의 우주적인 시간 개념에 감이 잡히지 않기는 중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중국인들은 1겁(劫)을 둘레 40리 되는 성중에 개자(芥子)를 가득 채워놓고, 천녀(天女)하늘 선녀가 3년마다 한 알씩 가지고 가서 죄다 없어질 때까지, 혹은 둘레 40리 되는 돌을 천녀가 비단옷을 입고 3년마다 한번씩 스쳐 그 돌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숫자로 나타내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은, 단지 무지무지 긴 시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수십억 년을 한 단위로 잘라 생각하는 사람들이니 인간 개개인이 겪는 시간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다. 우주적인 시간 개념으로 볼 때, 고작해야 1백년을 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무시되어도 그만인 짧은 찰나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인도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경험적인 시간에 대하여 무관심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순환 반복하는 영원한 세계 과정의 지극히 짧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현저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로 침입하기 전까지 인도의 역사에서 정확한 연대나 인물이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후대의 학자들이 어떤 문헌이나 사상의 연대를 추정함에 있어서도 천년 정도의 차이는 그냥 눈감아 준다. 예를 들어 힌두교의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믿어지는 베다의 성립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천 년 이상의 차이를 보일 정도로 들쭉날쭉이지만, 이 정도의 시간 차이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간다.

시간개념이란 어떤 하나의 전통과 문명의 울타리 안에서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다. 시간은 우리에게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비판을 비껴가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 속에 담겨 있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어떤 하나의 전통 속에서 통하는 시간 개념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통한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문화상대적인 어떤 요소들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중국 사람들을 무조건 만만디라고 밀어붙이는 것이나, 인도 사람들이 시간관념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유독 남의 느린 것이 잘 보인다. 중국 사람들을 말하면서, 혹은 인도 사람들을 말하면서 대개는 그 나라 사람들 무지무지 느리더라는 것이다. 어떤 나라 사람들이 무지무지 빠르더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은 없다. 대개는 지독스럽게 느리다고 흉을 본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우리가 너무 급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가 급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느린 것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급하다는 것을 잘 모른다. 오히려 상대방이 느리다고 불평한다. 인도에 살면서 느끼는 것도 그것이다. 때로는 과연 우리가 과연 은근과 끈기를 자랑하는 민족의 후손들인가 하는 점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미가 급하다.

느린 것은 무조건 무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사회, 모든 것은 목적을 향하여 빨리 빨리 돌아야 하는 사회에 길들여진 탓이다. 물론 빠르다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장점일 수 있다. 문제는 빠르기 때문에 여유를 잃어버리기 쉽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무언가로 꽉 차있지 않으면 괜히 불안하고, 따라서 ‘많이많이’ ‘빨리빨리’를 좇아간다.

인도인들의 사유방식으로 본다면, 시간은 결코 금도 아니고 돈도 아니다. 시간은 마야(maya, 幻影)이다. 시간이 마야라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존재를 물질 속에 한정시키는 힘이라는 의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덧없는 것, 허망한 것이라는 의미도 강하게 내포한다. 따라서 우리가 현상 세계에서 경험하는 1분 2분, 1시간 2시간 혹은 1년 2년으로 나누는 그런 의미의 시간은 믿을 게 못된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햇살이 눈부신 바닷가에서 반짝이는 조개껍질을 은 조각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으며, 어두컴컴한 헛간에서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힘이다.

<사진3> 사리 차림에 파파야를 이고 가는 시골 아낙, 인도사람들만큼 자신들의 전통의상을 즐겨 입는 민족은 드물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 다시 말하여 유한 존재가 시간성을 축적해 간다는 것은 전혀 발전의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 있다. 역사의 흐름은 당연히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에서 멀어져 가는 퇴보의 측면을 지닐 수 있다. 한 처음으로부터 세계가 전개되어 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본래의 순수한 상태에서 차츰 이탈하는 과정이며 그 끝에 대(大)파괴가 있다. 말하자면 세계 전개의 시작은 건강한 피부에 종기가 생겨나는 것이라면, 대파괴는 그 종기가 차츰 농익어 마침내 곪아 터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종기가 농익는 중에 새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이러한 세계 전개와 파괴의 주기적인 반복 속에는 발전적인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 방향은 환부가 차츰 넓어지고 통증도 심해지는, 퇴보의 측면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이들의 유가(yuga)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네 유가 가운데 최초의 단계에 해당하는 끄리따(krita)유가 시대가 가장 정의롭고 순수한 시대인 반면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깔리(kali)유가, 즉 마지막 유가는 그 이전의 유가들에 비하여 훨씬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다. 한 마디로 이 시대는 말법기(末法期), 최악의 상태다. 놀랍게도 1천여 년 전의 ‘비슈누 뿌라나’(Visnu Purana)에서는 이미 이 시대의 타락상을 “재산이 직위를 부여하고, 부(富)가 미덕의 유일한 원천이며, 성교가 부부 사이의 유일한 결합 원인이며, 어리석음이 성공의 원천이 되며, 섹스가 유일한 향락 수단이 되는 단계”로 묘사하고 있다.

유가가 진행되는 과정의 특징은 모든 것이 시간적으로 짧아진다는 것이다. 최초의 끄리따유가 시대에 인간의 수명은 4천 년이던 것이 차츰 줄어 현재의 깔리 유가에서는 1백년을 넘기 어렵게 되었다. 끄리따유가의 기간은 1백72만8천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칼리 유가는 43만2천년 동안 지속될 뿐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고 유가의 지속 기간이 짧아지는 것과 동시에 사회의 정의도 같은 비율로 줄어든다. 즉 끄리따유가 시대에는 완전하던 정의가 차츰 줄어들어 칼리 유가에 와서는 끄리따유가의 1/4만 남게 되었다. 정의가 줄어드는 것은 시간적으로 짧아지는 것과 관련을 지닌다. 다시 말하여 빨라지는 것은 퇴보의 표시다.

이에 비하여 오늘날 현대인의 개념에서는 시간적으로 짧아진다는 것, 즉 빨라진다는 것은 발전을 의미한다. 시간의 단축, 즉 속도의 증가는 대개 발전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열흘이나 걸리던 거리를 비행기로 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게 된 것, 초기 화면이 뜨기까지 5초 이상 걸리던 286 컴퓨터가 순식간에 화면이 뜨는 펜티엄급 컴퓨터로 바뀐 것, 한 시간에 다섯 개 밖에 만들지 못하던 제품을 같은 시간에 열 개를 만들 수 있게 된 것, 혹은 한 마지기의 벼를 베는 데 한 나절이 걸리던 것을 콤바인으로 30분 안에 벨 수 있게 된 것을 발전이라고 한다. 즉 걸리는 시간이 짧아지고 빨라진 것을 발전이라고 말한다.

빨라진 결과 우리에게 피부로 와 닿는 효과는 편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편해졌다. 상대적으로 모든 게 느리던 십년 전보다는 분명히 요즘이 편하고, 이십 년 삼십 년 전보다는 엄청나게 편해졌다. 앞으로도 더욱 빨라질 것이며, 따라서 더욱 편해질 것이다.

그러나 빨라지고 편해진 만큼 행복해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정의가 쇠퇴하고 인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징후의 가장 단적인 예는 인간관계가 임시적이고 가변적인 관계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관계의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관계가 일시적이고 일회용이다. 너무 쉽게 만나고 너무 쉽게 헤어진다. 부부관계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다. 심지어는 가족이라는 것도 그렇다. 나이 든 부모를 몰래 내다버리는 현대판 고려장을 보면, 이제는 한 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의 임시성과 가변성, 그것은 빨리빨리를 추구해 온 현대인들의 뿌리 깊은 치명상이다. 하루 아침에 빌딩을 쌓고 또 허물어버리기도 하는 싸구려 콘크리트 문화가 빚어낸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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