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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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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5>

다양성 속의 통일

유행에 젖어 사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인도 사회에서는 유행이라는 말이 거의 무의미하다. 어떤 현상이 일시적으로 번졌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은 보기 드물다. 유행에 가장 민감하다는 옷차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길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의 옷차림이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반소매 셔츠에서부터 한겨울에나 입는 두꺼운 외투차림까지 온갖 옷차림의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길에 다니는 탈것들도 도무지 유행을 타는 것 같지 않다.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이 끄는 인력거가 지금도 그대로 지나다니고, 자전거, 스쿠터, 오토릭샤, 택시, 버스 등 온갖 바퀴달린 탈것들이 복잡한 길거리를 누빈다.

물론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전에는 없던 새로운 모델의 자동차도 보이고, 사리(saree) 대신에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신세대 여성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것을 일시에 그리고 전면적으로 대체한다는 의미에서의 유행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 같으면 1년이 멀다 하고 신형 차를 개발하고 사람들은 덩달아서 멀쩡한 차를 버리고 별 차이도 없는 새 모델을 타지 못해 안달이다. 인도에는 이미 수십 년 전에 개발된 앰배서더(Ambassador) 승용차가 지금도 여전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행의 개념과는 확실히 다르다. 인도사회에서는 붉은색 립스틱이 일시에 검은색으로 바뀐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불가능한 일다.

<사진1> 타고르(R. Tagore)하우스(깔꼬따) 앞의 고색창연한 건물들, 거의 영국 식민지시절 그대로다. 도로 한복판에 전차가 다니는 레일이 깔려있고, 사람이 끄는 인력거, 자전거릭샤, 오토릭샤, 자동차가 함께 다닌다.

이와 같이 인도사람들이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것은 남과 다른 것을 크게 개의치 않는 이들의 사고방식과 관련을 지닌다. 나는 네가 아니므로 너와 내가 다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 너는 내가 아니므로 다른 옷차림일 수 있으며, 나는 네가 아니므로 너와는 다른 신을 섬길 수 있다. 심지어 너는 나와 똑같은 인도사람이지만, 너는 힌디(Hindi)어를 쓰고 나는 타밀(Tamil)어를 쓸 수 있다. 너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인도사람들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하여 유연하다. 적어도 우리처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혼동하지는 않는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인데, 우리는 흔히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나와 다른 것'은 무조건 '틀린 것', 즉 '잘못된 것'이라는 사고방식의 무의식적인 표현이라 해도 무방하다.

인도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화장터의 불타는 장작더미에서 끄집어낸 시체를 먹든, 해골을 목에 걸고 다니든, 남자가 귀를 찢어 주먹만한 귀걸이를 끼우고 다니든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파격은 인간의 조건과 사회의 바깥에서 쟁취한 하나의 완전한 자유에 관한 증거들일 수 있다. 이들에게 이른바 정상이라고 말하는 인간의 조건은 질곡, 무지, 고통에 해당하며, 자유, 지혜, 즐거움은 이와 같은 정상성이 파괴되지 않는 한 얻기 어렵다는 시각이 오히려 현저하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유연한 자세는 인도 사회 전반에 다양성으로 나타난다. 한 나라 안에는 하나의 언어가 당연한 것처럼 알고 자란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현재 인도정부는 16개의 언어를 정부공용어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북인도 사람들의 주요 언어는 힌디(Hindi)이며 남인도 사람들의 주요 언어는 타밀(Tamil)이라 할 수 있지만, 이외에도 수많은 언어가 사용된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인도에는 6백개 이상의 언어가 통용되고 있다. 같은 인도지만 지역에 따라 문화나 풍습도 천차만별이다. 같은 바라문이지만 벵골지방의 바라문은 생선을 먹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마드라스에서는 보통 서민들도 생선 먹는 것을 꺼린다. '생선 먹는 자'로 지칭되는 것은 '후레자식'에 맞먹는 쌍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계가 다양한 만큼 신들의 세계도 복잡하고 다양하다. 수년 동안 인도종교를 공부해왔지만, 지금도 인도 어느 지방에 가면 처음 듣는 신들이 많다. 3억 33신이 거론되는가 하면, 갠지스강가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신들이 있다고도 한다. 인도 종교사를 통하여 여러 유형의 유신론이 발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독교적인 의미의 유일신(the Only God)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신들 중의 신(god of gods)일 뿐이다. 일자(一者)는 언제나 다자(多者)를 통하여 존재한다. 다자가 없다면 일자도 있을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사고방식이다. 모든 신이 각기 최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신들을 배척하지 않는다.

흔히 인도종교의 특징으로 관용성을 든다.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이종혐오(異種嫌惡)가 현저한 영역으로 꼽히는 종교에서 다른 종교에 반감을 지니지 않는다는 건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인도종교가 지니고 있는 관용성이라는 것은 적극적인 의미의 포용과는 다르다. 오히려 가만히 내버려둔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너는 내가 아니므로 나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하나지만 여기에 이르는 길은 여럿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인도사람들의 뿌리 깊은 사고방식이다. 물론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나의 영역 안에 나와는 다른 이질적인 요소가 들어와서 알짱거리는데,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배짱이 필요하다.

<사진2> 최근에 등장한 옷가게의 마네킹이 이색적이다. 이것은 인도 여성들의 의상에 서구적인 경향이 반영되고 있다는 증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의상인 사리(saree)나 빤자비(panjabi)와 단절된 스타일은 아니다.

다양하다는 것은 흔히 무질서로 비쳐지기 쉽다. 확실히 겉으로 보는 인도는 무질서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인 아니다. 사실 인도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무질서였다. 어디를 가나 온갖 잡동사니가 뒤엉켜있는 것이 도무지 절도가 없어 보이고, 차를 탈 때면 온갖 종류의 탈것들이 뒤섞여 다니는 길거리가 늘 아슬아슬했다. 지금도 대도시의 중심가가 아니면 차선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선조차도 그어져 있지 않은 도로가 태반이다. 적당히 알아서 가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들이 별 무리 없이 지나다닌다. 신호등이 생기고 나서 길이 훨씬 복잡해지고 도무지 불편해서 죽겠다고 불평하는 택시 운전사들도 있다.

인도 사회가 다양한 만큼 다소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온갖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무질서를 통제하려는 의도적인 노력도 크게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인도 사회는 다수 대중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그냥 굴러간다. 오히려 이 무질서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자유를 느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나 할까, 그래도 큰 사고 없이 잘 굴러간다. 사실 장발 단속을 몸으로 체험했던 나로서는 인도가 여간 자유로운 게 아니었다. 자기와 다른 꼴을 못 봐주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어떤 편안함이 있었다. 자유는 다양성에 있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자유는 무수한 형식을 지닐 수 있으며, 그 중에는 반(反)사회적인 것도 있을 수 있다.

요즘 우리 주변을 보면 과연 유행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새삼스럽게 일어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주 비슷한 복사판이다. 마치 유니폼을 입은 것 같다. 등에 지고 다니는 가방도 비슷하기는 마찬가지다. 남과 비슷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한다. 자신의 개성을 시험하고 창조해야 할 신세대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분명히 외모의 획일화를 강요받던 지난 시대와는 다르다. 교복이 유일한 외출복이고 날씨에 관계없이 한날한시에 동복 하복을 갈아입어야 하던 그때는, 착하다는 말은 곧 개성이 없다는 말과 같았다. 이제는 그런 것도 아닌데 신세대들은 왜 무차별 베끼기식 차림 일색인가?

유행이라는 덫에 걸린 것이다. 획일화를 부추기는 매스컴의 광고 그리고 대량생산, 유행이라는 그럴듯한 단어 하나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른 많은 사람들을 비슷비슷하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 사회에서 유행에 뒤진다는 것은 낙오를 의미한다. 신형차가 나왔는데도 여전히 구형차를 타고 다닌다는 것은 곧 무능의 표시다. 낙오와 무능의 기준은 유행을 따라갈 수 있느냐, 다시 말하여 남과 비슷해질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유행은 일종의 구속이며 병이다. 사람들은 유행이라는 옷을 입고 얼른 대중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리고는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을 즐긴다. 그러나 유행이란 으레 문득 왔다가 문득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익명성에 의지한 편안함이라는 것도 당연히 잠깐일 수밖에 없다. 대중 속에 숨는가 싶으면, 이미 그들은 또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저만큼 가고 있다. 나의 익명성은 금방 사라지고 만다. 다시 허겁지겁 따라갈 수밖에 없다. 따라가기의 악순환이다. 유행은 확실히 일종의 병이다. 따라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편집증이다. 그것은 남과 다른 것이 두려운 공포증이다.

우리 사회가 유행이라는 중병을 앓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유행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획일적인 사고방식에 있다. 판에 박힌 저울대의 눈목으로 모든 사람을 저울질하고, 이런 저울대에 맞지 않으면 낙오자로 소외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도무지 사람이 다양할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조화나 통일이 지니는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다양성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양하다는 것은 늘 통일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진3> 우리나라의 도심가 거리에서 영화 스타들의 사진을 팔고 있는 것처럼, 인도의 거리 곳곳에서는 온갖 신상들이 묘사된 그림이나 액자를 팔고 있다. 쉬바(Siva), 빠르와띠(Parvati), 우마(Uma), 라마끄리슈나(Ramakrishna) 등이 보인다.

그러나 알다시피 다양성이 없는 통일은 통일이 아니라 획일일 뿐이다. 이것은 마치 한 가지의 악기나 색깔로는 조화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방적으로 통일 혹은 조화만을 강조했다.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지만, 튀는 놈은 가차 없이 짓밟아버렸다. 장발을 단속하고, 배꼽티는 금지되었다. 단일 민족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단일민족이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라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말이다. 물론 단일민족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우리 민족 전체가 하나로 뜻을 모아 함께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대단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단일 민족이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자칫 획일을 조장하는 말일 수 있었다. 우리는 단일 민족이므로 하나같이 똑같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부추긴 것이다.

획일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우리는 남과 다른 것이 두려웠다. 표준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곧 낙오를 의미하며, 놀림의 대상이 된다. 표준적인 사이즈가 있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조차도 표준을 정하고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안도한다. 남들이 ‘대장금’ 이야기를 할 때 한 마디 끼어들지 못하면 괜히 바보가 되는 것 같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된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밤늦은 시간까지 꾸벅 꾸벅 졸면서도 ‘개그 콘서트’를 끝까지 보고 자는 것은, 반 친구들이 다 ‘개그 콘서트’를 보기 때문이다. 만일 그걸 보지 않으면 그 다음날 할 얘기가 없고, 바보 취급되기 때문이라니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차원이든 종교적인 차원이든, 어떤 경우든 통일은 붕어빵처럼 똑같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이다. 의미 있는 통일은 다양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하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화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조화란 무엇인가? 빨간색 일색이라면, 노란색 일색이라면 거기에 무슨 조화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겠는가? 파란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고, 하다못해 흰색이라도 섞여야 조화라는 것이 의미를 지니고 아름다움도 생겨나는 법이다. 모두가 똑같다면 조화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다. 변화가 없다면 생명 있는 유기체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차이가 없다면 조화도 아름다움도 있을 수 없다.

인도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하여 자기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고스란히 유지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유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종교와 사상, 정치와 경제가 지니는 저력 또한 여기에 있다. 어떤 문화든 그 구성요소의 다양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미 생명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회의 구성요소가 다양할 때 비로소 느림의 미학을 이야기할 수 있다.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한 '빨리빨리 병'은 치유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다양하다는 것은 공간적인 개념이고 느리다는 것은 시간적인 개념이지만, 이 둘은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지닌다. 다양하기 때문에 느릴 수 있으며, 느리기 때문에 다양할 수 있다. 저간의 세태가 지나치게 빨리 변하고 도무지 여유가 없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우리의 획일적인 사고방식에 그 원인이 있다.

너와 나의 하나됨을 추구하기 이전에, 우선 너는 내가 아니므로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너와 나의 하나됨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다. 다양성을 무시하는 통일 혹은 하나됨은 생명을 상실한 화석에 불과하다. 변화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아름다울 수 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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