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성이 강조되는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인도 사람들이 삶 속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은 목적 없는 행위이다. 역사를 통하여 인도의 스승들은 한결같이 목적 없는 행위를 강조했다. 인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경전 ‘바가바드기따'(Bhagavadgita)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목적 없는 행위,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라 해도 무방하다. 목적 없는 행위야말로 '행위 속에서 행위를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는 것이다.
무목적의 이상은 신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놀이(lila)일 뿐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아무런 목적 없이 골목에서 공놀이를 하듯, 신은 세계를 그렇게 만들었다. 신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만일 신의 세계 창조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곧 신의 완전을 부정하는 자기모순이다. 목적이 있다는 것은 이루어야 할 무엇이 있다는 것이며, 이루어야 할 무엇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족한 게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무목적은 신성의 표현이며 완전의 상징이다.
목적은 사람을 얽어맨다. 기대는 나를 구속한다. 기대가 있으면 마음은 긴장하기 마련이며, 긴장된 마음은 나를 속박한다. 목적은 시공간을 필요로 하며, 우리에게 시공간은 본질적으로 유한성 곧 속박을 의미한다. 추억을 먹고 사는 사람이 자기를 과거에 가두는 것처럼,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은 미래에 자기를 가둔다. 목적은 사람을 뻣뻣하게 마비시킨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체념처럼,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이 없다면 차라리 편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완전한 신이 아닌 사람인 이상, 목적이 없다면 살아야 할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목적을 잊지 않고서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목적을 잊어야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인도사상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다. 우리가 참으로 희구하는 것은, 그것을 잊어버릴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해탈을 잊어야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말도 그런 의미다. '나'를 잊어야 참된 '나'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사진1> 사원 앞에서 꽃을 파는 남자들, 힌두교 사원은 대개 도시 한 가운데 있다. 이것은 사원이 삶의 중심이라는 말이다.
우선 목적을 잊어야 한다. 그러나 목적을 잃어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목적 없는 행위는 행위 속에서 목적을 잊어버리지만,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잊어버리되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춤을 배우는 사람이 처음에는 춤을 추기 위하여 동작 하나 하나를 외우고 익혀야 하지만, 차츰 익숙해지고 마침내 춤의 달인이 되면 무대에서 자기의 춤사위를 잊어버리지만, 그렇다고 하여 춤을 잃어버리지는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행위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행위 속에서 행위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행위를 하되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포기이며 체념이다. 목적 없는 행위,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가 강조되는 것은, 오직 그런 행위만이 업을 쌓지 않을 수 있는 이상적인 행위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잊어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취하면 잊을 수 있다. 사랑에 취하든 술에 취하든 취하면 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깊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그 순간만으로 충분하다는 느낌이 있다. 거기에는 과거나 미래로 이어지는 생각이 전혀 없다. 여한이 없다. 사실 취한 사랑은 일종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욕망은 시공간 속의 사건이며, 취한다는 것은 시공간을 잊는 것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무한에 맞먹는 시간의 질을 획득한다. 무한에 대한 체험은 무지무지하게 길게 늘어지는 시간을 통하여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순간, 취하는 순간 속에서 언뜻 맛보는 황홀함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삶에 충실한 사람은 삶을 묻지 않는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다.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발의 존재를 잊는 것처럼, 삶을 잊어버린다. 취해 살아야 삶을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술 취한 사람이 스스로 취한 줄을 모르는 것처럼, 삶에 취해 사는 사람도 취한 줄을 모른다. 취한다는 것은 본질에 다가간다는 것이다. 시간을 잊어버리고 공간을 잊어버리는, 말하자면 본질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취한다고 하여, 잊어버린다고 하여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취하면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사람이다. 술에 취했을 때, 필름이 끊어질 때, 나를 잊어버린다. 문제는 나를 잃어버린다는 데 있다. 잊어버리면 잃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인도의 길거리에서 만나는 숱한 체념들이 초월일 수 없는 것은, 그것은 목적을 잃어버린 체념, 나를 잃어버린 포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잊으면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사람이지만, 또한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 도리어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사실 목적은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잊어야 할 것은 도리어 집착하며 괴로워하고, 그런 것이 사람이다. 만일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에 집착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더 큰 집착일 뿐이며,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목적 없는 행위 혹은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가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결과일 뿐 의도적인 결과는 아니다. 결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행위 자체에 충실할 뿐이다.
목적 없는 행위는 맹목적이다. 맹목적인 행위만이 순수할 수 있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목적이 들면 이미 그게 아니다.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우정도 아니며,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비즈니스일 뿐이다. 사고 파는 거래가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진2> 장발 유행자(遊行者), 보통 인도 남자들은 머리를 짧게 깎는 편이다. 장발인 경우는 거지 중에 상거지거나 특수한 종교 전통에 속한 수행자들이다.
사랑은 맹목적이다. 그래야 한다. 특히 남녀간의 사랑은 그렇다. 눈 멀고 귀 먹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다만 맹목적일 때 이해를 따지지 않는 불가사의를 만든다. 어머니의 사랑이 고귀하다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것은 이해 득실을 따지지 않는 맹목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맹목적인 행위란 너무 위험한 것이라고 말한다. 금지한다. 맹목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지니는 일차적인 의미는 무모하다는 것이다. 맹목적인 행위란 생각 없이 덮어놓고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부정적이다. 맹목적인 사랑, 맹목적인 우정은 순수하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왜 맹목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왜 맹목은 터부시되는가?
터부(taboo)라는 말은 서로 반대되는 두 방향에서 이해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신성한 무엇이며, 다른 한편으로 위험하고 부정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 맹목은 터부다. 다시 말하여 그것은 순수하고 성스러운 동시에 무시무시하고 두려운, 따라서 금기시되는 것이다. 맹목은 금지되고 있지만, 그 이유는 모르는 채, 아니 이유를 물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내지 않는다. 다만 맹목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이유 불문의 금지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터부시해 온 맹목은 느낌 혹은 감정에 대한 맹목이며, 그 이면에는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 숨어 있다. 다시 말하여 흔히 우리가 맹목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정작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을 맹목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사람에게 이성이 전부일 수는 없다. 알다시피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인 동시에 감성적인 동물이다. 서양적인 사고가 아니라 직관을 중시하는 인도적인 사고에서 본다면, 이성보다는 오히려 느낌이나 감성이 훨씬 중요할 수도 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그토록 추앙해마지 않던 이성의 시대는 몰락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보편적인 사건이다. 지능지수보다는 감성지수가 중시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무게 중심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만일 느낌에 대한 맹목이 위험을 내포한다면, 그것은 순수와 통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것은 이미 더럽혀진 것보다 오염되기 쉽다. 이용당하기 쉬운 것이 순수다. 이런 점에서 느낌에 대한 맹목은 위험한 것이지만, 맹목 그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무조건 느낌에 맹목이 비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것이 교묘히 이용되고 악용되는 사회가 오히려 문제다. 가슴을 열고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자, 반드시 심장을 잃게 되고 마는 부조리가 있다.
이제 우리 주변에는 진정한 맹목을 찾아보기 어렵다. 맹목적인 사랑은 없다. 너무 쉽게 사랑하고 너무 쉽게 떠나는 것이 요즘 세태의 사랑이다. 적당히 사랑해야 적당히 아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우정도 보기 드물다. 어쩌다 소설 속에서나 보는 천연기념물이다. 이제는 대중적인 드라마나 영화도 맹목적인 사랑, 맹목적인 우정은 꺼려하는 눈치다. 느낌에 충실하고 감정에 솔직한, 맹목적인 사랑은 고리타분한 신파에나 어울리는 것이라 여기는 모양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맹목적이어야 하는 것처럼, 종교도 맹목적이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다. 대개의 종교, 보다 정확히 말하여 종교 집단은 인간의 구원과 고통을 걱정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까를 걱정하고, 이것은 결국 많은 돈을 거두어들이는 일과 직결된다.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하나의 종교 단체에 속한다는 것은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사람들로부터 이득을 보자는 계산도 깔려있는 것 같다. 물론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많이많이'를 추구하기는 성과 속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드는 게 요즘 우리 주변의 현실이다.
맹목적인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맹목적으로 무엇인가에 푹 빠져 있는 매니아들이 있다. 낡은 군복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급 오디오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것에 대한 강한 애착이 병으로 치부되는 우리 사회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미친 듯이 열중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지닌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느 정도의 깊이를 가지는지는 의문이다. 우루루 몰려다니는 유행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아직 이에 대한 판단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 혹 혼자만의 세계에 자기를 가두고 세상과 타인들에 대한 혐오의 싹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목적을 잊어버리는 가운데 목적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가능한 것에 대한 체념이 가치 있는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맹목은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 가치 있는 맹목일 수 있다. 목적을 잊어야 맹목적일 수 있는 반면에 목적을 잃어버린다면 이미 그것은 가치 있는 맹목이 아니다.
목적을 잃어버린 맹목, 나를 잃어버린 맹목의 가장 분명한 징후는, 내가 그것을 그만두고자 했을 때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다. 나를 잃어버린 맹목은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이다. 빠져든다는 징후는 후회가 일어나는 것, 후회가 점점 깊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주객이 뒤바뀐 것이다.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것이다.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불가항력적으로 끌려가고 있다면, 이미 그것은 나를 잃어버린 것이며, 나를 잃어버린 맹목의 깊이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본질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3> 갠지스 강가의 이발사. 가위 하나, 면도칼 하나면 족하다.
맹목은 깊이에의 추구다. 우리의 삶에 종교가 중요하고 사랑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사랑이 혹은 맹목적인 종교가 우리를 내면의 깊이로 침잠하게 하기 때문이다. 종교를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종교보다 강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종교나 사랑은 일상사의 표면에 부유하는 이런저런 사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깊이로 침잠하는 것이다. 폭보다는 깊이가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흔히 종교나 사랑은 배타성을 띠기 쉽다. 한 사람이 여러 종교에 기웃거리는 것은 이단자로 낙인찍히며,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혹은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불륜으로 비난된다. 사랑이든 종교든 깊이로 추구하는 맹목적인 행위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맹목적인 것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만큼 얕고 허전해졌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애인의 변신에 목을 매는 순애보가 드문 세상은 각박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목적을 지니는 것이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인 현실 세계에서, 잠시라도 목적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맹목적인 게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든 종교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우리의 삶 속에는 목적을 잊어버리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맹목적인 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 맹목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그래도 사람은 순수하다는, 순수할 수 있다는 최후의 흔적이다. 만일 우리에게 맹목의 불씨가 꺼지고 없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참으로 희구하는 목적지에 이를 가능성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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