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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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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7>

못다 이룬 사랑과 윤회

업과 윤회는 인도사상의 두 기둥입니다. 이 두 개념은 인도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묶는 공통분모라 할 수 있지요. 불교가 넓은 의미의 힌두교에 포함될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습니다. 업과 윤회를 중심 교의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는 인도종교에 속합니다. 물론 불교는 무아설(無我說)을 전제로 무아윤회(無我輪廻)를 주장하고, 이에 비하여 힌두교는 유아윤회(有我輪廻)를 주장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아무튼 업과 윤회를 믿는다는 점은 같습니다.

업과 윤회는 하나의 믿음이 지니는 두 측면이라 할 수 있지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닙니다. 업은 윤회로 설명될 수 있고, 윤회는 업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업의 다른 말이 윤회라면, 윤회의 다른 말은 업입니다.

우선 업이라는 말에 대해 알아봅시다. 흔히 업보(業報)라고도 하지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이고 어두운 뉘앙스를 주는 말입니다.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인도의 고대 경전 언어인 범어로 업은 까르마(karma)라고 합니다. 까르마는 `행위'라는 말이지만, 우리가 윤회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그것은 대개 `행위의 잠재력'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은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결과를 나타내는 잠재력 혹은 여력을 남기게 되는데, 이 힘을 업 혹은 업력(業力)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행위란 반드시 우리가 신체(身)를 움직여서 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말(口)로 하는 행위와 생각(意)으로 하는 행위 모두를 포함합니다.

<사진1> 꼬나락사원 기단부에 설치된 짜끄라(cakra,수레바퀴), 사원은 우리를 윤회의 세계로부터 피안으로 실어나르는 수레와 같은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짜끄라는 흔히 진리의 상징으로 쓰인다.

업설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업의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행위든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에 따르는 결과를 나타내고야 맙니다. 이것을 카르마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카르마의 법칙은 말하자면 윤리세계에 적용되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에너지는 다만 형태가 바뀔 뿐 그 총량에는 변화가 없다고 합니다. 카르마의 법칙도 이와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선한 원인이 있으면 선한 결과가 있기 마련이고, 나쁜 원인이 있으면 나쁜 결과가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자업자득이라는 말도 업의 필연성과 관련됩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겁니다.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내 자신의 삶이든,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삶이든 살펴보면, 착하게 사는 사람이 꼭 좋은 결과만 받는 것 같아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죠? 때로는 착한 사람이 바보 되고 비참해지는 거 얼마든지 보잖아요? 어떤 사람은 누가 보아도 악질이지만, 잘 먹고 잘 살잖아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영 맞지 않은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창문에다 대고 돌을 던지면 금방 쨍하고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원인과 결과가 너무나 선명하고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경우(同時因果)도 있지만, 십 년 전에 어떤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지금에야 그 결과를 나타내는 경우에는, 그 결과가 아주 천천히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異時因果).

지금 선한 사람이 행복하지 못하거나, 지금 악한 사람이 불행한 결과를 맞이하지 않는 것은 이시인과를 토대로 설명됩니다. 비록 지금은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전생에 지은 악업이 많기 때문에 지금 불행할 수도 있고, 지금의 선한 행위가 현생이 아니라 내생에서 그 결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악행을 일삼으면서도 불행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카르마의 법칙은 윤회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으며, 윤회에 대한 믿음은 업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할 때만 의미를 지닙니다. 윤회와 업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지닙니다. 업을 믿지 않는다면 윤회에 대한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도사람들에게 업과 윤회에 대한 믿음은 삶이 고통이라는 자각이 일어나면서 확고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낙천적이고 현세 지향적이던 베다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업이나 윤회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이 일회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세에 대한 관심도 없으며, 다만 이 세상에서 백 살쯤 살다가 조상들이 있는 천계(天界)로 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천계는 매우 아름답고 행복한 곳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 사는 세상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나 천계의 행복을 선망하지도 않습니다. 여기가 즐거운 것과 마찬가지로 저 세상도 즐겁다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차츰 지옥에 대한 개념이 생겨납니다. 베다시대에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매우 중요하지요. 이들의 종교는 흔히 공희종교(供犧宗敎)라고 합니다. 신에게 기원하는 내용이 있을 때, 제단을 쌓고 동물을 잡아서 바치고 찬가를 낭송하는 제사를 드립니다. 물론 처음에는 신에게 바치는 공희가 선택적이었겠지만, 제사가 의무의 개념과 맞물리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누구나 죽어서 천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규정된 제사를 잘 드려야 천계로 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를 제대로 바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당연히 지옥에 대한 개념이 생겨납니다. 물론 인도종교에서 지옥은 끝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연옥(煉獄), 즉 잘못된 영혼이 보다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하여 스스로를 단련하는 곳이라는 정도의 의미를 지닐 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볼만한 대목은, 천계에 대한 묘사가 아름답고 화려해질수록, 지옥은 더욱더 끔찍하고 혹독한 곳으로 묘사된다는 겁니다. 이 점은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계가 살만한 곳이 될수록, 지옥은 더욱더 못살 곳이 된다는 것, 의미심장하잖아요? 천국에 매달릴수록 현실은 떠나고 싶은 곳이 됩니다. 저 세상에 집착한다는 것은 지금 나의 선자리가 그다지 신통치 않다는 증거입니다.

우파니샤드 시대에 들면서 업과 윤회에 대한 믿음이 구체화되고 확고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파니샤드는 인도의 여러 경전들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경전으로 꼽힙니다. 대개 기원전 800년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그 후 수 세기 동안 이어지는 중요한 문헌입니다. 칼 야스퍼스가 말하는 인류정신사에서 `축의 시대'에 인도에서 만들어진 경전들이 바로 우파니샤드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간의 관심이 외부세계에서 내면으로 옮겨간다는 것입니다. 타자(他者)로 만나던 신을 나의 내면에서 발견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은 경향은 한편으로 삶이 고통이라는 자각과 맞물려 있습니다.

삶이 고통이라는 자각은 당연히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의 삶을 윤회라고 합니다. `인생은 고해'라고 그러지요? 그러면 윤회는 왜 있는가? 이미 말한 것처럼, 윤회는 전생의 업 때문에 있습니다. 우파니샤드에는 어떤 경로를 통하여 윤회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심의 요점은 결국 `죽은 자'와 `다시 태어난 자'사이의 연속성입니다. 윤회라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사람으로 혹은 동물로 태어난다는 믿음 아닙니까?

<사진2> 진리의 상징 짜끄라, 불교의 만(卍)자도 짜끄라의 변형이다.

윤회에 대한 믿음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죽은 자'와 `다시 태어나는 자' 사이의 연속성 혹은 자기 동일성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게 여의치 못하면 윤회설은 그야말로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아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윤회가 다만 감상적인 믿음 정도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전생에 김유신 장군이었다'고 말할 때, 김유신과 그 사람 사이의 자기 동일성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주장은 다만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대 인도 사회에서 장례는 기본적으로 화장(火葬)으로 치러졌습니다. 죽은 시체를 화장하고 나면 재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하여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화장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 같잖아요? 초등학교 다니는 우리 큰 아이가 할머니 장례식을 보고 나서 내게 물었습니다. “아빠, 할머니가 나무 상자(棺)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는 어디로 가는거야?” 아마 고대 인도인들도 그렇게 물었을 겁니다. “죽은 자를 화장을 하고 나면 재만 남는데, 그는 어디로 갔다가 다시 오는 걸까?”

이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화장할 때 피어나는 연기를 타고 조상들이 머무는 세계, 즉 달(月)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증기로 볼 수도 있지요. 물은 고대 인도인들이 최초로 생각해낸 우주의 원질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지, 수, 화, 풍, 공의 5요소로 확립되기도 하지만, 베다시대만 해도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 생각했던 흔적이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윤회는 물의 순환과 관련지어 생각될 수도 있지요. 아무튼 죽은 자는 연기를 타고 달로 올라간다고 보았습니다. 보름이 가까와오면서 달이 점점 차는 것은 그곳에 영혼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며, 다시 달이 기우는 것은 그곳에 있던 영혼들이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시 돌아오는가? 빗물을 타고 내려온다고 믿었습니다. 왜 웃어요? 너무 나이브합니까? 사실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와 다시 태어나는 자 사이의 연속성을 입증해 보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형태로든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매커니즘을 설명해보고 싶었던 겁니다. 물론 설명은 이미 한 다리 건너 있습니다. 믿음이 먼저죠.

이와 같이 처음에는 단순히 화장시의 연기와 강우현상을 결합하여 윤회를 설명하려던 시도는 우파니샤드의 오화설(五火說)과 이도설(二道說)에 의하여 보다 구체화됩니다. 오화설은 사람이 죽은 후에 다시 지상 세계에 태어나는 경로를 제사의 다섯 불(火)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도설은 우리가 저 세상으로 가는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장 오래된 우파니샤드 중의 하나로 분류되는 ‘브리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에 이와 관련된 대화가 나옵니다. 먼저 프라바하나(Pravāhaṇa)왕이 웃달라카 아루니의 아들 슈웨타케투에게 다섯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 여기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어떻게 갈라서는지 아는가? 둘째, 그들이 어떻게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는지 아는가? 셋째, 계속해서 사람들이 죽는데, 어째서 저 세상은 가득차지 않는가? 넷째, 얼마나 어떻게 공물을 드려야 물이 사람의 목소리가 되어 말을 하는지 아는가? 다섯째, 신도와 조도로 나누어진 것을 아는가?

슈웨타케투는 대답할 수 없었지요. 참으로 민망한 일 아닙니까? 슈에타케투는 바라문입니다. 바라문이 크샤트리야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물어보지만, 아버지 또한 이에 대하여 답을 내릴 수 없게 되자, 아버지가 직접 프라바하나왕에게 가르침을 청합니다.

이에 대한 가르침이 프라바하나왕의 오화설입니다. 첫째, 천계를 제화(祭火)로 하여 믿음을 바칠 때, 소마(Soma)왕이 생긴다. 둘째, 공계를 제화로 하여 믿음을 바칠 때, 비가 내린다. 셋째, 지계를 제화로 하여 믿음을 바칠 때, 음식물이 생긴다. 넷째, 남자를 제화로 하여 믿음을 바칠 때, 정자가 생긴다. 다섯째, 여자를 제화로 믿음을 바칠 때, 태아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프라바하나왕은 윤회의 다섯 단계를 제사의 다섯 불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우선 선악에 대한 구분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여 업설과 관련하여 볼 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가는 길이 달라야 하는데, 이에 대한 언급이 없죠?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응보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이도설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길이 그 사람의 업에 따라 조도(祖道)와 신도(神道)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화설의 진리를 알고 숲에서 고행을 닦은 사람은 사후에 화장의 불꽃을 따라 범계로 인도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블랙홀을 완전히 빠져나가버리는 거지요. 이 길이 바로 신도입니다. 이에 비하여 오화설의 진리는 몰랐지만 숲에서 고행을 닦고 선행을 한 사람은 조도를 따라 달로 갑니다. 이들은 조상들이 머무는 달에서 스스로의 공덕이 다할 때까지 머물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윤회하는 자들이지요. 신도나 조도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3의 세계로 떨어집니다.

고전 육파철학의 베단타 학파에서는 윤회설이 보다 상세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우리의 몸을 조대신, 미세신, 원인신로 나누고 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은 바로 심체라고 합니다. 심체는 마치 비행기의 블랙박스와 같은 겁니다.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블랙박스에는 사고 당시 비행기의 고도와 방향과 속도 등을 상세하게 기록되고 있는 것처럼, 미세신은 우리의 삶 속에서 받는 온갖 잠재인상들을 낱낱이 기록합니다. 미세신은 심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람이 죽어서 화장될 때, 조대신은 불타 없어지지만, 미세신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것은 다시 육신을 받아 지상으로 환생하는 주체가 됩니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 학파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윤회의 핵심이 되는 죽은 자와 다시 태어나는 자 사이의 연속성을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미 말했지만, 업설이나 윤회설은 논리적인 설명이기 전에 하나의 믿음입니다.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으면 이미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오히려 철저하게 비논리적으로 혹은 초이성적으로 작동합니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지요. 예를 들어 여러분, 일본에서 유행하던 옴 진리교 알죠? 나처럼 머리 길고 수염 긴 아사하라 교주도 텔레비젼이나 잡지에서 보았을 겁니다. 동경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뿌려 여러 사람을 상하게 했던 종교집단으로 많은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아사하라의 제자들 중에는 일본의 최고 학부라 할 수 있는 동경대 출신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어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몰라서 아사하라를 따르겠어요? 누구보다도 논리적인 훈련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하라 교주를 따릅니다. 초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하여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무조건 없다고 부정할 필요도 없지요. 전생을 기억할 수 없다 하여 무조건 전생을 부정하는 것도 그래요. 여러분은 한 살적 기억을 합니까? 어머니 뱃속에 있던 시절을 기억합니까? 기억 못하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한 살적에는 없었어요? 그건 아니잖아요? 물론 나는 기억할 수 없지만, 그걸 본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전생의 문제와는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큰 차이가 없습니다.

<사진3> 진리의 상징 짜끄라, 불교의 만(卍)자도 짜끄리의 변형이다.

업설과 윤회설이 지니는 의미에 대하여 간단히 생각해봅시다. 흔히 업보라고 하면 숙명론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런 점이 없는건 아니지요. 한숨을 쉬면서 “다 자업자득이지요”라고 말합니다. 업의 자기 책임성이라는 문제를 놓고 본다면, 우리의 삶은 이미 꼼짝없이 결정지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는 과거 나의 어떤 행위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업의 순환을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업이란 행위 혹은 행위의 잠재력이라고 할 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곧 업을 쌓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한, 한 순간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몸이나 입 혹은 마음이 움직이는 한, 업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업이 남아있는 한 끝없이 윤회의 순환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나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업설이나 윤회설은 숙명론이 아닙니다. 업의 자기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그 이면에는 항상 업의 초월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힌두교는 `구제(救濟)의 도(道)'라 할 수 없어요. 모든 행위는 업을 남긴다고 가르치지만, 또한 어떤 행위는 이미 쌓은 업을 삭감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오히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가바드기타’에서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는 바로 그겁니다. 그것은 업을 멸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행위로 강조됩니다. 신애(信愛)를 실천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행위가 모두 신에게 바쳐지는 것이기 때문에 업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들은 신의 은총이 개개인의 업을 멸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업이 양도 가능하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어떤 사람이 선행을 많이 하여 좋은 업을 많이 쌓았을 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미 오래전에 타계한 증조할아버지의 덕을 보는 것은 이런 경우지요. 대승불교에서 중요해지는 회향(回向)사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회향사상에서는 선업(善業)만 회향의 대상이 되지만, 힌두교의 경우에는 악업(惡業)도 마찬가지로 양도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중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업을 쌓는 과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업을 멸해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업의 결과인 동시에 업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입니다. 삶이 업의 결과라는 점에 중점을 둔다면 끝없이 숙명론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지만, 또한 오늘 우리의 삶은 현재와 미래의 삶을 결정하는 원인이 된다는 쪽에 무게중심을 둔다면, 업설만큼 인간의 자기책임성을 강조하는 가르침도 없다할 것입니다.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업설이 형성되는 당시의 상황을 보면, 그것은 숙명론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우파니샤드시대는 그 이전의 제사지상주의에 대한 반발이 현저해지는 시기로 특징지울 수 있습니다. 업과 윤회에 대한 생각이 거의 보이지 않는 베다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신에게 의지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운명은 신이 좌지우지 하는 것이었지요. 길흉화복은 모두 신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브라흐마나시대에 접어들면서 제사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믿음으로 대체됩니다. 신은 다만 제사에 필요한 도구 정도로 여겨지고, 제사를 주관하는 바라문들이 최고의 지위를 점합니다. 힌두교가 극도로 썩어버리지요. 우파니샤드는 이와 같은 제사지상주의를 과감하게 떠납니다. 인간의 모든 운명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입장으로 전환합니다. 중요한 전환이지요. 업설이 확고해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신이나 제사가 죄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겁니다. 이런 점은 우파니샤드와 불교가 상통하는 일면이기도 합니다. 우파니샤드나 불교는 신으로부터 인간해방이며, 업설은 그 핵심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대 인도인들에게 달은 땅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한 사람들이 죽은 뒤에 가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제 몸을 태운 화장(火葬)불의 연기를 타고 허공을 날아 달로 갑니다. 달이 찬다는 것은 지상을 떠난 망자들이 차츰 불어난다는 것이며, 달이 기운다는 것은 이들이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자의 업에 따라 일정 기간 달에 머물렀다가 비를 타고 다시 땅 위로 내려옵니다. 달은 죽음이 쉬는 곳인 동시에 생명이 일어나는 원천입니다. 무상한 인간의 죽음을 감싸 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실어 다시 땅위로 내려보냅니다. 누구는 훌륭한 가문에, 또 누구는 딱정벌레 같은 미물로, 또 누구는 소나 돼지만 못한 천민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완전하게 되어 범계(梵界)로 간 자들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언제 누구에 의하여 이런 믿음이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요는 우리와 같은 시대 같은 별에 사는 수억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살아왔으며, 지금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럴싸한 이론도 설명도 무의미합니다. 다만 그렇게 믿고 사는 삶이 있을 뿐입니다. 알다시피, 종교의 핵심은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이며 체험입니다. 종교에 대한 지식이든, 신에 대한 지식이든, 그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종교도 아니고 신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종교 혹은 신에 대한 설명일 뿐이며, 설명은 이미 한 다리 건너 있는 이차적인 것입니다. 종교에 대한 지식은 그 껍데기일 뿐 알맹이는 아닙니다. 과연 국외자로서 다른 종교를 알 수 있는가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라도, 만일 힌두교에 대한 일별의 식견이라도 얻어 챙기려 한다면, 이에 관한 백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갠지스 강가로 가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뜬금없이 환생 이야기가 유행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환생 이야기에 사랑, 그 중에서도 못다 이룬 사랑 이야기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8월의 신부’는 억울하게 죽은 사랑하는 두 남녀가 얼마 지나지 않은 그 세대에서 다시 환생하여, 전생의 사랑을 찾아 헤매게 되고 사랑을 맺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양귀자의 소설 ‘천년의 사랑’도 남녀의 못다 이룬 사랑과 윤회가 주제입니다. 그 외에도 이런 류의 소설이나 드라마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과 윤회, 못 다 이룬 사랑과 환생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요. 내가 보기에는 이런 류의 드라마나 소설들이 이 둘 사이의 어떤 끈을 생각하고 전개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사랑과 윤회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윤회는 사랑을 한층 더 심도있게 설명해주는 면이 있습니다.

환생은 우리의 의식 속에 쌓인 잠재 인상의 찌꺼기를 털어버리기 위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잠재 인상은 미련입니다. 잠재 인상의 강도가 높을수록, 미련이 클수록, 여기에 개입된 감정의 농도가 진할수록, 이에 상응하는 모습으로 환생할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집니다. 이런 점에서 내 운명은 내 손에 달린 것입니다.

알겠지만, 사람에게 사랑보다 더한 감정은 없습니다. 종교보다 강한 것이 사랑이고 죽음을 불사하고 뛰어들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염산이 쇠를 녹인다면, 연산(戀酸)은 사람의 영혼을 녹여버립니다. 감정이 진한 만큼 고통이 배가되는 것도 압니다. 물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은,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사랑, 애증이 교차하고 밀고 당기는 온갖 감정이 섞여 있는 사랑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당신이라면 지옥의 자물쇠를 채우는 것도 바로 당신이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 아내에게 자주 했던 말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미지근한 사이는 절대로 원수가 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내가 체험한 사랑은 그렇습니다.

이루어진 사랑에는 미련이 있을 리 없습니다. 못 다 이룬 사랑은 미련을 남깁니다. 인생에서 그보다 더한 미련은 없을 것입니다. 완성은 끝입니다. 끝은 일종의 죽음입니다. 이루어진 사랑은 잊혀집니다. 그것은 이미 나의 것으로, 나의 현실로 손안에 들어 온 것입니다. 더 이상 미련이 있을 리 없습니다.

못다 이룬 사랑은 이루어진 사랑보다 훨씬 감정의 강도가 높고 절박하지요. 실연은 자살을 불사하게 하는 충격이 있습니다. 못다 이룬 사랑은 오히려 가슴 속에 살아남아 기회 있을 때마다 기억의 표면으로 떠올라 이미 지나간 일들을 곱씹게 만듭니다. 노래방 기계에는 언제나 최고 점수가 기록되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고 점수는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못다 이룬 사랑의 미련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한 가지 길이 있다면, 그것은 최고 점수를 갱신하는 길 뿐입니다. 못다 이룬 사랑에서 체험한 것보다 더 진한 사랑을 체험하지 않는 한, 그 이전의 최고 점수는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못다 이룬 사랑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답게 포장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이루어진 사랑은 자칫 현실 속에서 퇴색되기 쉽습니다. 이루어진 사랑, 다시 말하여 결혼은 현실입니다. 현실은 에누리가 없습니다. 이루어진 사랑이 현실 속에서 갈등하면 할수록, 못다 이룬 사랑은 점점 더 아름답게 채색됩니다. 추억은 언제나 곧이곧대로의 사실보다 몇 곱절 더 아름다운 법입니다.

추억이 사실보다 아름다운 것은 상상력 때문입니다. 더러는 끊어지고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어 끊어진 틈새를 이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추억입니다. 그 끊어진 기억의 틈새로 상상력이 스며듭니다. 가능한 한 아름답게 잇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못다 이룬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멈추어 선 그 이후가 온통 상상의 세계입니다. 그때 그 여자와 혹은 그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지금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런 저런 상상이 사랑의 추억을 아름답게 하고 못 다 이룬 사랑을 더욱 애틋하게 만듭니다.

나르시스가 자기도취에 빠진 것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아니라 수면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수면에 비친 얼굴은 거울에 비친 얼굴보다 훨씬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일렁이는 파문 위에 더러는 끊어지고 더러는 흐릿하여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며, 이곳을 잇는 것은 상상력입니다. 이 끊어진 틈새로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어서 생각하고 보려는 상상력이 개입됩니다. 매끈한 인화지 위에 있는 그대로 빼다 박은 인물 사진보다 연필로 혹은 물감으로 터실터실한 질감의 화폭에 그린 부정확한 초상화가 훨씬 아름다울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끊어진 선들 사이에 상상력이 낄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정확한 사진 속에는 상상도 없고 신비감, 감추어진 부분이 없습니다. 감추어지지 않으면 신비는 없습니다.

아무튼 못다 이룬 사랑은 이루어진 사랑보다 훨씬 절박하며, 애틋한 아름다움을 지닙니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가 거듭 환생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못 다 이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한물간 소설로 생각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이 최근에 다시 영화로 환생하여 흥행하는 것을 보면, 못다 이룬 사랑 이야기는 생명력이 질긴 게 분명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처럼, 못다 이룬 사랑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절박하고 애틋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녀의 사랑이란 일단 불이 붙으면, 가로막는 것이 많을수록, 길이 험할수록 더욱 강열해지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종교와 통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교는 박해를 받을수록 더욱 깊이 뿌리내리는 묘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녀의 사랑도 고통과 시련이 클수록 더욱 깊어지는 속성을 지닙니다.

이렇듯 못 다 이룬 사랑의 미련이 강한 만큼, 전생에서 사랑했던 사람들이 현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설사 미워했던 사람이라도 그 감정이 강한 것이었다면, 남겨진 잠재 인상이 강한 만큼 맺든 풀든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진한 사랑의 감정이 없었다면, 강한 증오의 감정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생에서 가까운 친구로 만난 두 사람은 전혀 몰랐던 사람보다 다음 생에서 아버지와 자식으로 또는 남매나 부부로 맺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회에, 환생에 못다 이룬 사랑 이야기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도 관성의 법칙 같은 것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자꾸 하고 싶어 하고 싫은 것은 자꾸 멀리합니다. 그러다보면 그것은 타성이 되고 나의 존재를 규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속담대로 인간은 자기가 만든 세계 속으로 태어납니다. 윤회라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이겠지요. 산위에 빗방울이 떨어질 때 이미 패어있는 골을 따라 산 아래로 흘러가는 것처럼,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도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렇게 자기 자신을 몰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혹은 나의 모든 행위는 나에게 흔적을 남깁니다. 비행기가 추락한 후에도 그 지나온 궤적이 블랙박스에 남듯이, 생각을 통하여 말을 통하여 몸을 움직여 하는 모든 행위는 낱낱이 기록됩니다. 힌두교에서는 흔히 이 블랙박스를 미세신이라고 합니다. 이생에서의 모든 행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몸에 박히게 되고, 이 몸은 죽어서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윤회하는 것은 이 미세신입니다. 강렬한 인상일수록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마음 속에 남는 잠재 인상이 남아 있는 한 윤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고대 인도인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보는 것처럼 다시 태어나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입니다. 인도 사람들에게 최고의 이상은 죽은 후에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선행을 쌓아서 좋은 곳에 태어나겠다는 민간 신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최선이 아니라 단지 차선의 바람일 뿐입니다. 현생에서 바른 지혜를 얻은 사람은 죽어서 곧바로 범계(梵界)로 갑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각자 쌓은 공덕의 정도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천계에 머물렀다가 공덕이 다하면 지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인도에서 윤회에 대한 체계적인 사색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이 고통이라는 자각과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현재의 삶이 고통으로 자각될 때, 이 고통의 뿌리는 어디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로 체계화된 것이 업과 윤회의 이론이다. 윤회 환생의 본질은 고통입니다. 따라서 업은 끊어야 하는 것이고 윤회는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요즘 우리 주변에서 보는 윤회에 대한 접근은 지나치게 낭만적입니다. 감상적입니다. 심지어는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합니다. 전생에 집착하고, 이런 집착은 대개 전생을 아름답게 과대 포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람들은 으레 자신이 전생에 유명한 인물이었다고 말합니다. 일전에 텔레비전 방송에서 전생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했을 때, 그들은 모두 클레오파트라 아니면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양귀비 아니면 세종대왕이지요. 전생에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던 흉악 무도한 강도였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전생에 위대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일종의 자아도취적인 믿음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못다 이룬 꿈의 실현을 위하여 윤회를 끌어들이는 점도 없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대개 현실 도피라는 성격을 지닙니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현생의 불가능을 다음 생의 가능성으로 집행유예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환생은 불가능한 현실을 저 세상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합니다. 그것은 못 다 이룬 사랑의 도피처쯤으로 여겨집니다. 결과가 그렇다는 것과 그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요. 지금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내생에 다시 만나 이루자며 동반 자살하는 연인들도 있습니다. 적당히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는 그런 사랑보다는 백 배 낫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는 낭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윤회가 허무맹랑한 허구일 뿐이라는 생각도 현저합니다. 대개는 윤회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지요. 그야말로 소설이 지니는 허구 속에서나 가능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 정도로 여깁니다. 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8월의 신부’를 재미있어 하고 ‘천년의 사랑’을 베스트셀러로 만듭니다.

윤회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서구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윤회론에 대한 서구의 반응은 무덤덤했습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되었을 때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한 서구 사회가 들끓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짐승이나 벌레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윤회설은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한다는 이론보다 훨씬 파격적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론은 진화론이 몰고왔던 어떤 흥분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윤회론이 기존의 가치 체계를 위협할 정도로 현실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이지요.

윤회론은 아직 이른바 냉철한 이성으로 검증받지 못한 가설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비중있는 과학자들이 제공하는 확고한 증거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윤회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돌려버리는 것은 무리입니다. 과학이 전부일 수는 없지요.

하나의 사상 혹은 개념이라는 것이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서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없지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소위 토착화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되는 것이며, 그래야 비로소 나에게 의미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어떤 경우든 윤회는 결코 낭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애틋한 이야기로 미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의 나, 나의 선 자리가 희미해질 때, 전생에 기대고 내생에 기대는 것입니다. 전생에 대한 긍정은 내세의 긍정과 직결됩니다. 전생의 일에 집착하는 것은 곧 내생을 희구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짐짓 내세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척하지만, 따지고 보면 전생에 집착하는 것은 무조건 믿고 천국가자는 것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 주변의 전생 신드롬은 아름답지 못한 현재의 삶에 대한 도피 혹은 부정이라는 성격을 지닙니다. 현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왜곡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며 병든 사회의 우울증입니다. 허영심입니다. 두려움인지도 모릅니다. 거울에 선명하게 비친 얼굴보다 물 위에 흐릿하게 비친 얼굴이 더 아름답듯이, 뚜렷한 현실 속에서 이루지 못한 나의 삶을 전생에 혹은 내생에 투영하여 아름답게 미화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생에 내가 무엇이었거나 어찌되었건 현재의 나는 이미 결정된 것이며, 우리에게 남은 것은 현재의 삶이 미래의 삶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현생이 전생의 결과인 것처럼 내생은 현생의 결과라는 단순한 상식을 잊어버린다면, 윤회의 이론은 절망 뿐입니다. 남는 것은 체념뿐입니다. 오늘날 인도 사람들의 경우도 윤회는 다분히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생의 문제는 우리가 길을 가다가 자기의 현재 위치를 알기 위하여 가끔 뒤를 돌아보는 정도의 관심이면 충분합니다. 이미 잊어버린 사건으로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전생에 대한 관심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단지 현재 나의 장점과 문제점들이 생겨나게 한 뿌리를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초점은 현재에 있는 것이지요.

음란의 도시 소돔을 탈출하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신의 명령을 어겨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사람이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지만, 전생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끌려 다니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윤회론은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일깨워주며, 비록 안개 속 같은 삶이지만 현재 나의 삶이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임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결국 밥 먹고 똥 싸는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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