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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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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8>

술과 명상

동국대학교 후문 부근에 '酒토피아'라는 술집이 있었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 술집 이름은 술과 유토피아의 합성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테크놀로지와 유토피아가 서로 어울려 테크노피아라는 말이 된 것과 같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쓰이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하여 酒토피아라는 상호는 다소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술말고 다른 음식 이름과 유토피아를 합성하여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말은 없다. 예를 들어 '밥토피아', '사이다피아', '불고기피아'는 영 썰렁하게 들린다. 이에 비하여 酒토피아는 꼭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럴듯하게 들린다. 언뜻 보아도 이 말 속에는 '취중천국(醉中天國)'이 보인다. 이렇듯 酒토피아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은 술과 유토피아 간에 어떤 내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酒토피아든 테크노피아든 결합되는 두 말이 서로 통하지 않고는 의미 있는 합성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 1> 가야-18/ 시골 강가의 火葬 장면, 고대 인도인들은 死者의 영혼이 화장불의 연기를 타고 달로 올라간다고 믿었다. 자신이 쌓은 공덕에 해당하는 만큼의 햇수 동안 달에서 머물다가 다시 빗물을 타고 지상으로 환생한다.

그러면 술과 천국 혹은 이상향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인도 고대 신화를 보면 원래 술은 속세의 음료가 아니었다. 흔히 소마(Soma)라고 불렸던 이 술은 시장 바닥이나 어둠침침한 술집에서 마시는 속된 물건이 아니라, 신(神)의 거룩한 음료였다. 소마가 지닌 가장 중요한 효능은 불멸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들이 소마를 마셔야 불멸을 얻듯이, 마찬가지로 인간도 소마를 통하여 불멸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사람들은 신성한 제사 의식에서 소마를 마셨다.

마침내 소마는 신격화되어 섬겨지게 되었으며, 소마제(祭)는 고대 힌두교의 제의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리매김했다. 소마풀을 채집하여 즙을 짜내고 채로 걸러 신에게 바친 후에,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마시는 행위는 힌두교 제의식의 핵심이었다.

소마풀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들판이 아니라 산에 자라는 식물이라는 정도가 알려진 전부다. 넝쿨식물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버섯의 일종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일치된 의견은 이 식물의 즙으로 만든 음료, 즉 소마가 일종의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점이다. 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이런 형태의 음료가 주술이나 종교 의식에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다. 하여간 소마는 오늘날 우리가 먹는 음식 가운데는 술과 가장 근접한 음료였던 것이 분명하다.

<사진 2> 깔리다사-2/ 아침나절 길가 나무 아래 안치된 작은 신상 앞에서 뿌자(예배)를 드리고 있는 힌두교도. 풀잎처럼 가볍디가벼운 인간과 무상한 돌덩이의 만남이지만, 그 만남은 장엄하다.

소마가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신격화된 것은, 그것이 지니는 일상성에 대한 파괴력 때문이었다. 소마는 사람의 영혼을 고무시키고, 일상적인 능력 밖에 있는 일들을 행하도록 부추기며, 또한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마시는 것은 결국 영적인 직관 혹은 깨달음으로 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타났다. 소마는 유한한 인간이 초월을 실현하는 강력한 매개 수단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신과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제의식에 항상 소마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대 인도에서는 술이 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었음에 비하여, 요즘 우리는 대개 종교와 무관하게 술을 마신다. 뿐만 아니라 술은 종교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불음주(不飮酒)를 오계(五戒)의 하나로 규정되고 있으며, 기독교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다만 가톨릭의 미사에서 혹은 우리의 전통 제례에서 약간의 술을 볼 수 있지만, 알다시피 그것은 취하자고 마시는 술이 아니다. 제사를 지내고 난 뒤의 음복(飮福)으로 마시는 술이나 미사에서 마시는 포도주는 단지 상징적인 행위일 뿐, 통상적인 의미에서 술을 마시는 것과는 다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음주, 혹은 음주를 통한 도취는 철저하게 속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속의 영역에서도 가장 밑바닥, 다시 말하여 퇴폐와 일탈의 행위로 취급되며, 이른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삶의 양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술이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단지 취하지 않을 정도의 음주뿐이다. 취하도록 마시는 술은 이미 '약주'(藥酒)가 아니다. 음주 운전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는 요즘에는, 비단 술에 취하지는 않더라도 혈중 알코올 농도가 일정 기준치를 초과하기만 하면 단속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술은 거룩한 영역에서 속된 영역으로 밀려나고, 술에 취하는 것은 속된 삶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놓이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술을 마신다. 술에 취하고 싶어한다.

사실 취하고자 마시는 술은, 그것이 종교와 관련을 지니든 그렇지 않든 그 동기에 있어서는 똑같다. 고대 인도인들이 소마를 마시든 요즘 우리가 소주를 마시든 그것은 결국 일상성을 깨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술이 원수라고 말하면서도 마시고 또 마시는 것은 일상적인 의식의 흐름에서 벗어나고픈 잠재 욕구 때문이다. 술은 필름이 끊어지는 순간을 체험하기 위하여 마신다. 술은 일탈을 통한 자유의 갈망이며, 단지 잊어버리자고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생을 통하여 참으로 희구하는 것은 일상적인 삶의 뒤편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밤새 술에 취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후회하고, 그러면서도 이런 과정의 반복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술이 주는 무한의 느낌 때문이다. 필름이 끊기는 순간 무시간 무공간의 황홀을 체험한다. 필름이 끊어지는 상태까지는 아니라도, 일단 술에 취하면 평소에 마음속에 꽁하니 지니고 있던 말도 스스럼없이 나오고 허풍도 떨고 온 세상이 모두 내 것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체험한다. 왜소한 내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져 태산만해지기도 한다. 술에 취하고 싶은 것은 결국 현실적으로 유한한 자기의 무한 확장을 원하는 마음이다. 술꾼들이 황홀과 허무의 양극단을 오가면서도 이의 반복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느낌 때문이다.

이 점에서 술은 섹스와 통한다. 욕망의 일렁임, 두 육체의 교합, 그 끄트머리에 한 순간 일었다 스러지는 절정, 환희, 그리고 허무가 있다. 다시 집착한다. 섹스는 집착, 절정, 허무의 반복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반복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비록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무한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섹스를 통하여 술을 통하여 섬광처럼 열렸다 다시 닫히는 영원의 틈새를 슬쩍 보게 된다. 아득한 순간에 언뜻 문이 열린다. 그리고는 이내 닫히고 만다. 문이 열리는 순간 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한의 틈새를 본 찰나의 경험은 또 다시 집착하게 만든다. 술에 집착한다. 여자에 집착한다. 술이, 저 여자가 나를 무한으로 통하는 틈새를 알게 했다. 다음에도 술이 없으면, 저 여자가 없으면 그 틈새를 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집착한다. 집착, 절정, 허무의 반복이다.

<사진 3> 바라문-22/ 아침 단장 중의 힌두교 司祭, 이마의 V자 상징은 그가 비슈누교 사제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레 비해 쉬바교도들은 이마에 세 줄의 수평선(三)을 긋는다.

만취 상태, 다시 말하여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상태는 심리학적으로 가장 편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술에 취한다는 것 혹은 남녀의 섹스는 어쩌면 보통 사람들이 잠시나마 시간의 무게를, 시시각각으로 내리누르는 삶의 무게를 덜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술은 이상향,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술이 깨고 나면 취중천국은 사라진다. 그야말로 유토피아의 본래 의미, '실재하지 않는 나라'로 돌아간다.

이 점에서 술의 유토피아는 명상의 유토피아와 다르다. 명상은 술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의식의 차원을 꿰뚫는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그 끄트머리에 허무가 일지 않는다. 나를 잊되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무한의 틈새가 열리는 순간에도 깨어있기 때문이다. 술은 취할수록 흐릿해진다. 명상은 취할수록 선명해진다. 술은 취할수록 분주해진다. 명상은 취할수록 잠잠해진다.

고대 인도에서 소마를 마시던 사람들의 취함이 오늘날 우리의 술 취함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혹은 과연 그것이 유한한 인간의 일탈을 통한 자유를 가능케 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마가 인간에게 불멸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이 수 세기 동안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며, 적어도 그것은 오늘날처럼 인간의 삶에 부정적이고 유해한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차이가 어디에 기인하는가에 대한 문제 또한 추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를 지적하자면, 고대 인도에서 소마를 마시던 사람들은 일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가장 경건하고 신성한 제의식을 통하여 마셨지만, 이에 비하여 요즘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데서나 마신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목욕재계 후에 청결한 몸과 마음으로 소마를 마셨지만, 우리는 대개 몸 마음이 피곤에 찌든 상태에서 술을 마신다. 이것이 우선 그들과 우리의 음주 문화의 차이다.

아무튼 술 취함이 우리의 삶에 의미를 지니려면, 우선 경건하게 취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술 취함에서 오는 일상성의 파괴와 일탈은 사실 매우 위험한 것이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따라잡기 어려운 파격과 무질서를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술꾼은 "위험이 있는 곳엔 구원도 따라 자란다"는 말의 의미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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