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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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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9>

性으로 聖에 이른다

전통적으로 인도 사람들은 섹스를 속(俗)의 영역이 아니라, 성(聖)의 영역에 두려는 경향이 현저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섹스는 추한 것이고 은밀한 곳에 감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힌두교 사원 건축에서 섹스가 끊임없이 중심 모티프로 나타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사실 인도에서 섹스가 가장 자유롭게 표현되는 곳은 사원이다. 사원의 은밀한 곳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외벽에 남녀의 섹스 장면이 적나라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흔히 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도 여행 코스에서 빠지지 않는 카주라호(Kajuraho) 사원은 상상을 초월하는 남녀교합상(男女交合像, maithuna)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다. 남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한 여자와 여러 남자, 한 남자와 여러 여자, 여러 남자와 여러 여자의 난교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동물과의 수간도 노골적이고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원 에로티시즘은 심지어 불교 건축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어 불교탑파의 산실로 일컬어지는 산치(Sanchi) 마하스투파(Mahastupa, 大塔)의 탑문(torana)에는 관능미 넘치는 여체가 조각되어 있다. 우리나라 불교사찰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다.

<사진1> 북인도 까주라호 사원 외벽에 부조된 미투나상들. 대개 하나의 사원에 5백체(體) 이상의 미투나상들이 부조되어 있다.

이와 같이 힌두교 사원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적나라한 에로티시즘은 우리의 통념으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알다시피 어떤 종교에서든 사원은 가장 거룩한 곳으로 통한다. 사원은 이른바 신의 집이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곳, 피안과 차안이 만나는 곳이 사원이다. 이 성스런 곳에 에로틱한 여인상과 남녀의 교합이 이토록 대담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원 에로티시즘에는 단순히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포르노그라피와는 분명히 다른 차원이 있다. 남녀의 성행위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에서 오는 저속한 거부감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다. 설사 인도 종교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카주라호 사원의 미투나상(像)을 대한다 해도 천박이나 저속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미투나상에는 격정이나 허무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편안함이 있다.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사원의 에로티시즘에서 느끼는 편안함은 자연스러움과 어떤 관련을 지니는 것이다. 미투나상은 묘한 쾌감과 함께 도식적이며 권위적인 틀로부터의 해방감을 느끼게 해준다. 모든 욕망과 충동을 자연스럽게 들판 위에 부려놓고 그 충동의 이면을 반추하는 듯한 편안함과 휴식이 있다.

힌두교, 특히 후기의 탄트라 전통에서 이해되는 남녀의 성교는 단순한 육체적인 결합 이상이며, 우주와의 합일을 의미한다. 여성은 우주의 물질적인 근본원리인 프라크리티(prakriti)이며, 우주적 창조 에너지 샥띠(sakti)의 인격화이다. 남성은 대자재신(大自在神) 쉬바(Siva)와 동일시된다. 여성과의 성적인 결합은 우주적 여성 원리와의 합일을 의미하며, 합일은 곧 완성이다.

<사진2> 미투나상. 인도에서 성이 가장 자유롭게 표현된 곳은 사원이다.

남성과 여성은 쉬바와 샥띠, 끄리슈나(Krisna)와 라다(Radha)와 같은 절대자 속에 존재하는 이원성을 상징한다. 성적인 결합을 통하여 차별이 해소되고 대우주와 소우주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진다. 또한 남녀의 성교는 대우주의 생식을 나타낸다. 세계 창조의 과정은 남신과 여신의 결합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다시 남성과 여성의 성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합일에서 오는 환희는 남녀의 섹스에서 구체성을 띤다. 따라서 남녀의 성교는 단순한 육체적 결합의 차원을 넘어 거룩한 존재와의 합일을 가능케 하는 신성한 제사 행위로 인식된다.

탄트라의 성행과 함께 성교는 해탈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잡는다. 꼬나락 사원이나 카주라호 사원이 조성된 것은 바로 인도에서 탄트리즘의 르네상스 시기이다. 탄트라 전통에서 성교는 최고 차원의 영적 체험을 위한 채널이며, 깨달음을 위한 거룩한 제의식이다. 육체는 진리로 가는 제1관문으로 부각된다. 성교를 통하여 우주의 신비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것은 이른바 저속한 것 속에서 거룩한 것을 찾아가는 방법이며, 번뇌를 끌어안음으로써 해탈을 완성하는 길이다.

사실 인도 종교 전반에는 쾌락을 통하여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현저하다. 어떤 경우에는 제사의식에서 남녀 수행자들이 정기적으로 성교를 행하기도 하고, 성적인 결합 상태에서 신에 대한 명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지금도 힌두교 제의는 성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상징을 지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제의에서 녹인 버터와 쌀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성교에 비유된다. 녹인 버터는 여자의 분비물이며 쌀은 남자의 정액이다. 제단을 여자의 신체 구조로 쌓기도 한다.

심지어 신화적인 시간관을 나타내는 이들의 유가(yuga)설에 의하면 우리는 지금 깔리(kali)유가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의 중심된 해탈 수단은 섹스이다. 정신이 육체의 장막에 가려지고 사람들의 본래적인 힘이 현저하게 감소하는 깔리유가, 이 시대의 사람들은 태초에 향유했던 정신적인 자발성과 원기를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적인 행위, 즉 섹스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섹스가 탄트라 교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섹스가 해탈의 수단이라면, 그것보다 쉽고 즐거운 일이 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탄트라 경전에서는 섹스로 해탈을 얻으려 하는 것은 "마치 작두날 위를 걷거나 성난 호랑이와 어울려 노는 것보다 더 어렵고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무엇이든 우리에게 귀중한 것일수록 그것은 도리어 우리를 파멸시킬 위험도 크다는 얘기다. 섹스는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매우 위험한 길이라는 것이다.

사실 인도 종교에서 해탈 수단으로서의 섹스에 대한 강조는 인도 사회에 심각한 성적인 문란을 몰고 왔다. 무지한 사람들이 영적인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랬든, 혹은 전달 수단인 상징의 몰이해로 인한 이념의 타락에 기인하는 것이든, 원인이야 어떻든 분명한 것은 그것이 성적인 문란의 빌미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진3> 산치대탑 탑문 횡량 아래 조각된 약쉬니(Yaksini, 天女)상. 사원에 에로티시즘이 표현되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불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거룩해야 할 사원은 오히려 매음굴이 되었다. 인도에서 매음의 시작은 사원이라는 게 정설이며, 역사적으로 매음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도 사원이다. 특히 태양신 수리야(Surya)를 모시는 사원은 매음의 본거지였다. 수리야 사원에 여자 아이를 바치는 사람은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다는 민간 신앙이 널리 성행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사원 중에서 카주라호 사원과 함께 힌두교 사원 에로티시즘의 대명사로 통하는 꼬나락 사원은 대표적인 수리야 사원이다. 한때 이런 사원들은 '참외 같은 젖가슴'에 '산 같은 엉덩이를 흔드는' 창녀들이 우글거리는 사창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도에서 사원 매춘은 지난 세기 말까지도 널리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많은 사람들은 신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사원을 찾는다기보다는 사원에 고용된 여자들과 어울리기 위하여 사원을 찾았다. 남인도의 사원들이 이 점에 있어서 특히 악명이 높았으며, 마두라이, 꼰지베람(Conjiveram), 딴자우르(Tanjavur)의 사원들과 같은 큰 사원들이 마치 사창가처럼 운영되었다.

근세에 들면서 서구의 비판과 힌두교 자체의 반성으로 사원 매춘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해결일 수 없었다. 문제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퇴보의 절정을 의미할 뿐이었다. 대담하고 솔직하게 인간의 성적인 욕구를 인정하고 이것을 바르게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던 고대와는 달리, 섹스에 대한 논의는 철저하게 물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것은 금기시되고, 철저하게 비밀스런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이것은 힌두교가 인간의 욕망과 느낌, 인간이 처한 상황 그대로의 전부를 긍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과 배짱을 잃어버리게 된 것을 의미한다. 서구에서 프로이드가 인간 본능의 해방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책상 아래 숨겨 보던 성을 책상 위로 올려놓은 19세기에도, 인도 사회는 성에 대하여 여전히 성을 터부시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섹스에 관한 담론이 공공연하게 논의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 일반의 역량이 이를 감당할 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섹스에 관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그 사회의 경제력과 함께 간다는 주장도 있으며,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논의되던 성 관련 문제들이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하고 이에 대한 해결 방법이 적극적으로 모색되는 것은 국민 소득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구의 예를 본다면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다.

<사진4> 붓다의 모친 마야 부인의 태몽과 출산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이미 5세기 경에 '까마수뜨라'(Kamasutra, 性經)가 만들어졌다. 이 경전은 남녀의 성교에 관한 상세하고도 정밀한 지식을 담고 있다. 이것은 당시 인도 사회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섹스에 대한 담론이 공개적으로 논의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학문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 섹스에 대한 지식은 적어도 당시 상류층 사람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지식 중의 하나였다. 인간의 욕망은 부(富)와 함께 인생에서 이루어야 할 목적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였으며, 그것은 결코 부정되거나 무시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 속에서 해탈을 추구하는 것은 인도의 오랜 전통이었지만, 십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 인도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욕망과 섹스에 대한 담론이 철저하게 음성적으로 흐르고 뒷걸음질치게 된 것은, 섹스가 상품화된 후유증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성에 관한 온갖 관심과 이슈들이 공공연하게 책으로 영화로 혹은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대학에서는 성(性) 관련 교양 강좌에 학생들이 넘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물질적인 삶이 그만큼 풍요로워졌다는 증거다. 요즘처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명제가 마치 무슨 선언처럼 강조될 수 있게 된 것은, 이제 우리도 먹고 살만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성에 대한 논의가 어둡고 축축한 사적 공간에서 벗어나 공적인 공간으로 나왔다는 것은 분명히 긍정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섹스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 전환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섹스에 대한 논의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는 것과, 섹스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여러 사람들이 강의실에서 섹스를 논의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렇다고 하여 대낮에 교실에서 그룹 섹스를 즐길 수는 없는 것이다. 섹스에 대한 논의는 공공연할 수 있지만, 섹스 자체는 공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적이며 개인적이다. 섹스는 함께 식사하는 것과는 분명히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흔히 "언제 식사나 함께 합시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언제 섹스나 함께 합시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욕은 식욕과는 다른 것이다. 배가 고플 때 돈을 주고 맛있는 음식을 사서 먹는 것이나 여자를 사서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는 없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나'라는 의식이 대상을 소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성적인 관계는 '나' 이외의 인격적 생명체와의 합일, 나아가서는 나의 상실을 통한 무한의 체험을 뜻하기 때문이다.

성욕이 식욕과 동일한 차원으로 오해될 때, 섹스는 상품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섹스가 컵라면일 수는 없다. 식욕이 인간의 본능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욕 또한 본능적인 것이며, 식욕이 무조건 억눌러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욕도 무조건 억제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 접근 방식은 달라야 한다.

섹스는 느닷없이 돌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퍼포먼스가 아니다. 적어도 그것은 누적된 교감의 끝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행위다. 분명히 성욕은 그 깊이와 차원에서 식욕과 다른 것이다. 섹스는 인간 본래의 우주적 생명력을 회복시켜서 본래적인 자기를 찾는, 깊이에로의 침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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