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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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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0>

깨달음에 이르는 길, 요가

넓은 의미에서 요가는 길(道)을 의미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해탈 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요가라고 한다. 해탈은 업을 끊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요가다. 요가라는 말의 어원을 따지자면, 이 말은 원래 '결합하다' '멍에를 매다'라는 의미의 범어(梵語) 동사 '유즈'(yuj)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가는 몸과 마음을 결합하여 하나 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몸과 마음이 하나 된 개체가 궁극적 실재와 하나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 즉 합일은 완성이며 자유이다.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있어야 할 두 부분이 따로 노는 것, 그것은 갈등이며 구속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지 않을 때, 하나로 결합되어 합일될 때 자유가 있으며, 자유는 기쁨이다. 해탈은 다른 말로 자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자유라는 건 늘 피냄새를 풍기는, 인내를 요구하는 구석이 있다. 요가도 마찬가지다. 요가를 통한 해탈 혹은 자유는 그냥 이론으로 이해하는 차원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오랜 기간의 힘든 수련과정이 필요한 것도 이런 이유다.

우빠니샤드(Upanisad)에서는 우리의 몸을 마음에 잡아매고 궁극적으로는 절대자와 합일하여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마차로 목적지까지 노정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마차의 주인은 아트만, 즉 우리의 자아(ātman)이다. 마차는 우리의 몸이며, 마차를 몰고 가는 마부는 우리의 지성이다. 고삐는 우리의 의근(意根)에 해당하며, 말은 우리의 감관 혹은 욕망이라 할 수 있다. 길은 감각의 대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가는 몸(마차) 안에 있는 우리의 자아가 지성(마부)으로 하여금 의근(고삐)을 잘 조절하여 여러 말(욕망)들이 엉뚱한 샛길로 빠지지 않고 힘을 모아서 한 방향으로 달리게 하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사진1> 결가부좌의 붓다. 결가부좌는 요가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좌법 중 하나다.

여기서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은, 우리의 욕망이 말에 비유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요가라는 것이 결코 인간의 욕망을 꺾어버리거나 죽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자 할 때, 만일 말을 죽여버리면 어떻게 될까. 마차는 움직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욕망은 해탈이라는 목적지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것은 제어되고 한 곳으로 집중될 필요가 있을 뿐, 결코 부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은 인도종교의 가장 특징적인 측면 가운데 하나이며, 이 점에서 힌두교는 불교와 갈라진다. 아무튼 우빠니샤드의 이 비유는 요가의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다.

인도에서 요가의 역사는 길다. 심지어 기원전 30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서 출토되는 테라콧타에서도 요가 자세를 취한 수행자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적어도 5천년 이상 되는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힌두교의 각 종파는 각기 제 나름대로 다양한 요가 전통을 발전시켜왔다. 따라서 수많은 형태의 요가가 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신체수련 중심의 하타(hatha)요가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는 라자(raja)요가, 만뜨라(mantra)요가, 라야(raya)요가, 박띠(bhakti)요가, 까르마(karma)요가, 갸나요가 등 다양한 종류의 요가가 행해지고 있다.

그러던 중에 기원전 2세기 경의 인물로 알려지는 빠딴잘리(Patanjali)라는 사람이 요가를 일목요연한 체계로 정리하고 ‘요가수뜨라’(Yoga-sutra)라는 문헌을 남겼다. 이 책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소개된 적이 있다. 인도의 요가에 대한 여러 종류의 책들이 나와 있지만, ‘요가수뜨라’야말로 요가에 대한 가장 정통적이고 기본적인 안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가수뜨라’에서 요가는 '심작용(心作用)의 지멸'로 정의된다. 분주하게 대상을 옮겨 다니는 우리의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고 마침내는 전혀 아무런 작용도 없는 단계, 그것이 요가이며, 그곳에 이르게 하는 방법 또한 요가라고 했다.

<사진2> 깐치뿌람의 사원 외벽 기둥에 부조된 요가행자. 요가는 넓은 의미에서 길(道)을 의미하며, 그 역사는 기원전 2500년경의 인더스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요가는 다리를 꼬고 앉는 게 전부가 아니다. 빠딴잘리의 ‘요가수뜨라’에서는 요가 수행의 8단계가 언급된다. 우선 첫 번째 단계로 윤리적인 준비단계(禁戒)가 요구된다. 윤리적으로 되먹지 못한 사람은 요가를 닦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금해야 할 다섯 가지, 즉 살생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남의 것을 훔치지 말 것, 음란에 빠지지 말 것, 음주를 금할 것 등이 강조된다.

요가의 두 번째 단계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신에게 헌신 등이 적극적으로 권장되는 단계(勸戒)이다. 이 단계 역시 윤리적인 준비단계라 할 수 있지만, 첫 번째 단계가 주로 금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두 번째 단계는 주로 권장사항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요가 수행자로서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덕목들이다. 물론 요가는 윤리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결국에는 윤리의 틀을 깨고 그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초윤리적이라 할 수 있지만, 초윤리는 결코 윤리를 무시하라는 게 아니다. 윤리적인 단계를 딛고 넘어서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어떤 요가 자세를 취할 것인가를 익히는 좌법(坐法)의 단계이다. 여기서부터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요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요가하면 흔히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수행자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 요가의 여러 단계 중에서 신체적으로 가장 힘들고 중요한 단계가 바로 이 좌법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긴 시간을 투자해서 익혀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수많은 좌법들이 소개된다. 심지어 어떤 경전에서는 원래 8만 4천 가지의 좌법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84가지 정도가 전해질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빠딴잘리는 이상적인 요가의 자세로 적합할 수 있는 기준으로 두 가지 들고 있다. 우선 요가 자세는 편안해야 하며, 또한 오래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 이 기준에 부합되는 가장 대표적인 자세가 바로 결가부좌이다.

네 번째 단계는 호흡조절(調息)이다. 이 단계는 앞의 좌법과 함께 하타요가(hatha yoga)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요가 수행자가 윤리적인 준비를 하고 좌법을 익히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잠잠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호흡조절이야말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호흡은 마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이 급해지면 저절로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대로 급해진 마음을 진정시키려 할 때, 요가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심호흡을 한다. 숨을 깊이 들이쉬어 아랫배까지 밀어 넣었다가 천천히 뱉으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진정된다.

이와 같이 호흡은 마음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하여 호흡을 연구하고 제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호흡법을 익히는 것도 무척 긴 시간을 요하는 어려운 과정이다. 우리는 대개 요가에서 가르치는 호흡법과 정반대의 호흡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숨을 들이쉴 때는 배가 들어가고 숨을 내쉴 때는 오히려 배가 나오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들숨과 날숨만 있을 뿐, 멎는 숨이 거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진3> 인도의 2대 서사시 중의 하나인 ‘라마야나’(Ramayana)에 나오는 아르주나의 고행 장면을 묘사한 부조이다.

요가의 다섯 번째 단계는 수행자가 자신의 감관을 제어하는 단계(制感)이다. 이미 '마차의 비유'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감관 혹은 욕망은 말과 같다. 길이든 아니든 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내달리는 것이 말이다. 우리의 감관이라는 것도 이와 같다. 대상이 있으면 곧장 쫓아간다. 늘 바깥으로 향해 있는 것이 감관이다. 제감은 이와 같이 바깥으로만 내닫는 감관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이다. 마치 거북이가 사지를 두꺼운 갑 속으로 끌어들이듯이, 바깥을 지향하는 감관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준비 과정이 끝나면, 다음 단계부터는 수행의 중점이 정신적인 영역으로 옮겨간다. 여섯 번째 단계인 집지(執持)는 한정된 심적 영역에 마음을 한정시키는 것이다. 마음은 오관의 배후에 있는 내적 감관이다. 마음이 감관에서 떨어져 있으면, 설사 눈이 보고 있다 해도 보는 것이 아니며, 귀가 듣고 있다 해도 듣는 게 아니다. 마음이 따라가지 않으면 설사 감관이 대상을 향해 있다 해도 인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바로 앞 단계에서 감관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이 감관과 분리될 때 완전해진다고 볼 수 있다.

피상적인 표면을 따라 부유하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나비가 이 꽃 저 꽃을 분주히 옮겨 다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이런 저런 대상들을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집지의 목적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한 대상에 집중하도록 하며,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때는 재빨리 원래의 대상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이동과 방해의 빈도가 낮을수록 집지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일곱 번째 단계는 정려(靜慮)이다. 범어로는 이 단계를 디야나(dhyana)라고 하는데, 흔히 불교에서 사용되는 선(禪) 혹은 선나(禪那)라는 말은 바로 디야나에 대한 한역(漢譯)이다. 정려는 우리의 마음이 선택된 한 대상을 향하여 아무런 장애 없이 흐르는 상태를 가리킨다. 마음을 더욱 내면으로 거두어들여 한 대상에만 유지시킴으로써 집지의 단계에서 정려의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요가의 마지막 단계는 삼매(三昧)이다. 이 말도 우리가 생활 속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원래 범어로는 사마디(samādhi)라는 말인데, 한문으로 음역되는 과정에서 삼매가 된 것이다. ‘요가수뜨라’에서는 이 단계를 “다만 명상의 대상에만 의식이 있고 마음 자체에는 없는 상태”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단계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삼매는 이해의 대상이 되는 지식이 아니라, 깨달아 알아야 하는 언표불가능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요가수뜨라’에서 말하는 요가의 8단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요가는 실천이고 체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가는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드시 스승이 필요하다. 반드시 일정한 자격을 갖춘 스승의 지도하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수행법이다. 요가에서 ‘내면으로의 침잠’은 곧 ‘우주로의 확산’이다.

<사진4> 이른 아침 사원에서 요가를 닦고 있는 사람들, 인도의 사원이나 수행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명상이나 참선 또는 단전호흡과 같은 수련 문화가 어느 때보다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책도 서점에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전에 없던 관심이 부쩍 늘어난 것은 우리가 먹고 살 만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리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어야 마음공부에도 관심이 가는 법이다.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에는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급했다. 마음공부라는 것은 다만 출가한 스님이나 가질 법한 관심사였는데, 이제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성행하고 있는 것이 요가요 명상이다. 일단은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한 면이 있다. 우리 주변에 마음공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마음이 비뚤어지고 황폐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가 육체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눈에 병이 났을 때, 눈이 생각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잘못되고 몸이 병들었기 때문에, 마음공부에 대한 관심이나 육체적인 건강에 대한 욕구가 부쩍 늘어났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요즘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분주하다.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관조할 수 있는 기회란 매우 드물다. 사람은 누구나 `게으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바깥일에 분주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대개 사람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스스로가 그 여유를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바빠도 가끔은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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