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아름다워지고 있다. 여자처럼 아름다워지고 있다. 귀고리를 하고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는 여자 같은 남자도 심심찮게 본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거나 징그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눈치다. 이에 비하여 여자들은 점점 거세진다. 남자처럼 거세지고 있다. 축구나 권투는 물론 심지어는 레슬링도 이제는 남자들만의 운동이 아니다. 이 방면에 유독 보수적인 우리나라에서도 여자 씨름 대회가 열리는 판이다.
얼마 전에는 이인영이라는 여자 권투선수가 세계 챔피언이 되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언론은 그녀의 성공을 '인간승리'라 했다. 이전 같았으면 "여자가 무슨 권투냐?"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 파괴라는 말이 많지만, 가장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파괴는 역시 성(性) 파괴가 아닌가 싶다. 무섭게 허물어지고 있다.
이제는 금남의 집도 없고 금녀의 집도 없다. 사관학교에 여자 생도가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미용실이나 얼굴 맛사지 숍에 남자가 자연스레 드나드는 세상이다. 여자대학이 남녀 공학으로 바뀌는 경우도 더러 본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없다.
얼굴이나 차림새로 보아 여자인지 남자인지 얼른 구분이 가지 않는 젊은이들이 많다. 소년처럼 밋밋한 가슴과 짧은 머리의 여자 모델이 텔레비전 광고에 등장하는가 하면, 헐렁한 블라우스에 손가방을 들고 여자처럼 걸어가는 남자들도 많다. 하는 일에도 남녀의 구분이 없어졌다. 남자 보모도 당당한 직업이고 여자 버스 기사는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아이 낳는 일 말고는 남자가 못할 일이 없으며, 아이 낳게 하는 일 말고는 여자가 못할 일이 없다.
동성애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고 있다. 동성연애자들의 모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텔레비전에 나와서도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옛날 같으면 음화처럼 모자이크 화면 처리될 일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서구에서는 동성연애자들끼리의 결혼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지 말아야 이유도 없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계보다 동성연애가 오히려 자연스럽고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의 통념은 다르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라는 것이다. 남자는 연속극을 보면서 슬픈 장면이 나와도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남자답지 못한 꼬락서니가 된다. 남자가 큰 소리로 웃는 것은 호탕한 것이 되지만, 여자가 그렇게 하는 것은 방정맞은 것이 된다.
동성애에 대한 반감은 더 심하다. 남자 같은 여장부는 그래도 봐줄 만하지만,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인륜에 어긋난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윤리 기준이다. 남녀가 뒤엉키는, 거의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영화는 문제없이 상영되면서도, 어떤 영화는 단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 같은 장면이 보인다는 이유로 불가 판정을 받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첸카이거의 ‘패왕별희’는 예외 중의 예외였다.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이라는 백그라운드가 작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동성애는 기성세대의 보수적인 가치관과 가장 극단적인 대척점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서구에서도 동성애는 사회의 자유 정도와 소수 집단에 대한 포용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정도로 아직은 물밑에 있다.
여자는 남자와 다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남녀의 차이가 매우 분명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남자 같은 여자들도 많이 있고, 여자 같은 남자들도 많다. 생물학적으로 본다 해도 임신 3개월까지는 남녀 간에 큰 차이가 없으며, 적어도 4개월이 되어야 차이가 분명해진다고 한다. 또한 남녀의 차이는 생물학적인 차이가 전부인 것도 아니다.
남녀의 차이는 오히려 문화상대적인 측면도 많다. 예를 들어 인도의 어떤 지역의 경우 밖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 여성적이고, 집에서 아이 보는 것이 남자가 할 일이다. 따라서 남성적이다 혹은 여성적이라는 구분은 칼로 두부 자르듯이 분명한 절대 기준에 따른 것이 아니다. 성의 차이는 남녀의 구분에 단지 한 요소일 뿐이다. 여자의 성기와 유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순도 100% 여성일 수 없으며, 남자의 성기와 후골이 있다고 해서 순도 100% 남성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인도의 종교 전통들은 남녀의 구분을 단지 상대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탄트라에서는 이 점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 전통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기 속에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담고 있다. 남자가 남자인 것은 단지 자기 속에 남성으로서의 속성이 현저하기 때문이며, 여자가 여자인 것은 자기 속에 여성적인 속성이 현저하다는 것뿐이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라는 절대적인 구분은 있을 수 없다. 남자는 '남성적인 인간'이며 여자는 '여성적인 인간'이다.
탄트라에 의하면 신(神)은 자신 안에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지니는 하나의 복합적인 성(性)을 지닌다. 이와 같은 신을 아르다나리(ardhanari)라고 부른다. 사원의 부조나 회화에서 쉬바(Siva)는 자신의 배우자 빠르와티(Parvati) 여신과 한 몸으로 나타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오른쪽 반은 남자고 왼쪽 반은 여자의 형상이다. 인도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 가운데 하나인 비슈누(Visnu)나 크리슈나(Krsna)는 남신이지만 얼핏 보기에 여자의 얼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까주라호(Kajuraho)나 꼬나락(Konarak) 사원에서 보는 남녀 교합상 또한 이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남녀 동체의 이상을 표현한 것이다.
<사진1>쉬바(Siva)와 빠르와띠(Parvati)가 일체(一體)를 이룬 형상. 인도사상에서는 각 개인 속에 있는 남성과 여성의 합일을 강조한다.
이런 전통에서는 남녀 양성의 구분이 없는 유니섹스가 오히려 조화로운 인간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남자다운 남자나 여자다운 여자는 한쪽 다리가 짧은 절름발이 인간이다. 양성을 동시에 구유한 사람만이 조화로운 인간일 수 있다. 각 개인은 전체 우주를 축소한 소우주이기 때문에, 갈등의 궁극적인 해소는 오직 각 개인 자신의 존재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하여 두 개체로서의 남자와 여자의 조화가 아니라, 각 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되게 해야 한다. 명상이나 요가를 통해서 혹은 탄트라 수행을 통해서 자기 속에 있는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합일시킬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절대자 속에 존재하는 남녀 양성을 반영하지만, 대개 이 두 가지 측면은 한 개인 속에서 한쪽으로 편향되거나 갈등상태로 남아있다. 자기 안에서 남녀 양성의 벽이 무너지고 하나로 혼융될 때, 그것이 해탈이다. 탄트라 수행에서 남녀의 성교가 강조되는 것은 결국 자기 속에 들어있는 다른 성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안고 있지만, 실은 안고 있는 여자가 목적이 아니라 그 여자와의 성교를 통하여 자기 속에 잠자고 있는 여자를 일깨우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은 남녀 양성이 자기 안에서 조화로운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샥타(Sakta) 같은 탄트라 종파에서는 남자들이 스스로가 여자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는 종교의례를 행한다. 여장을 하고 여자의 몸짓을 흉내 낸다. 심지어는 한달에 한번씩 여자들의 생리를 흉내 내기도 하며, 이 기간 중에는 모든 종교적인 의무에서 제외된다. 영적인 발전의 어떤 단계에서 참된 사랑을 체험하기 위하여 반드시 여자로 전환해서 자신 속에 있는 여성의 본질을 실현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종교의례 뿐 아니라 왕이 즉위식을 할 때, 남녀의 모든 백성들을 조화롭게 통치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에서 왕이 잠시 남성을 잊어버리고 여성의 입장이 되기도 한다. 이상적인 통치자로서의 왕은 남녀 양성을 모두 갖춘 인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요즘 우리 주변에서 보는 유니섹스화의 경향을 무조건 문제 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 속에서 갈등하는 남녀 양성의 갈등을 해소해가는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다. 강한 동시에 눈물도 많은 남자, 부드러운 동시에 배짱 좋은 여장부가 될 수 있는 조화로운 인간을 향하는, 긍정적인 분위기로 해석해도 괜찮을 것이다.
<사진2>까주라호사원 외벽의 남녀교합상. 합일은 완성을 의미한다.
사실 지난 시대는 지나치게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혹은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매달려 온 감이 없지 않다. 좀 삐딱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남녀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은 말세의 병적인 현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고 우려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원래 남녀 양성을 구유한 인간의 자연스런 삶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은 여성 해방일 뿐 아니라 남성 해방이기도 하다. 여자이기 때문에 웃음이 나와도 큰 소리로 웃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이기 때문에 울고 싶어도 눈물을 보일 수 없었던 것이 지난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남녀의 벽이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여성의 남성화 경향보다는 남성의 여성화 경향이 보다 현저하게 눈에 띠는 것을 보면, 어쩌면 유니섹스화의 경향은 남성해방이라는 측면이 더 강한지도 모른다. 앞으로 감성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미래학자들의 말은 남성 속에 억눌려 있었던 여성적인 측면이 물꼬를 터고 풍성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명제는 남성 상위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어떻게 보면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 명제는 결국 남자는 강해야 하고 여자는 강한 남자에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통했다. 여자가 바지를 입고 군화를 신는 것보다는 남자가 귀고리를 하는 것이 훨씬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단지 내가 남자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남성의 여성화가 여성의 남성화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지금까지 남자들이 가부장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만큼 스스로를 가두고 벽을 높이 쌓아왔다는 증거다.
무엇이든 억눌러서 문제가 해결되는 일은 없다. 억누를수록 오히려 복수의 칼을 들이댈 가능성이 높아지는 법이다. 여자가 남자처럼 되고 싶은 감정이나 남자가 여자처럼 애교를 부리고 싶은 감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억눌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억제한다고 해서 억제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꽃이 피어나 저절로 스러지듯이 그렇게 일었다 스러지는 것이다.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감정들이 나에게 후회 없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눈살 찌푸리지 않게 바르게 일어나서 바르게 스러지도록 바른 길을 안내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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