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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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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2>

여자, 위험한 도구

우리가 보통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 속성을 지닌 대상에 대한 느낌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속에 우리를 유혹하는 어떤 속성이 들어있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도종교,, 특히 사문(沙門)전통에서는 이런 차원에서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참다운 실재를 추구하는 길에 장애가 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불교나 자이나교 전통에서는 아름다움이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현저했다. 붓다는 자신의 법이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글귀로 표현되는 것을 금했다. 일생 동안 사원에 살면서도 자신의 눈이 감각적인 아름다움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설사 붓다의 일생을 그린 것이라도 아름다운 물감으로 채색된 그림을 피했다는 칫타굿타(Chitagutta) 비구 이야기도 있다.

흔히 아름다운 여자가 위험한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여자는 아름답기 때문에 위험하며 두려운 대상이다. 아름다운 여자는 우리의 마음을 헛갈리게 만들고 결국에는 샛길로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특히 기원전 6세기경의 인도에서 성행했던 금욕적인 관념들은 여성에 의하여 야기되는 유혹을 강조하였으며, 여성은 모든 죄악의 원천이며 해탈에 가장 중대한 장애로 간주되었다. 푸라나(Purana) 경전에서는 말한다.

“세 가지 술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독한 술은 여자다. 일곱 가지 독약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해로운 독약은 여자다.”

<사진1>사원에서 뿌자를 드리기 위하여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힌두교 여성들. 일생 동안 긴 머리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자가 아름다움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은 인도 신화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신들은 아름다움과 공포라는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두르가(Durga) 여신은 적(敵)인 악신도 매혹될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는가 하면, 인간의 생피를 요구하는 짜문다(Camunda) 여신은 피골이 상접한 추악한 모습으로 섬뜩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

인도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섬겨지는 칼리(Kali) 여신의 외모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한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람의 머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그 머리에서 떨어지는 피를 받는 두개골 잔을 들고 있다. 목에는 잘라낸 사람의 머리를 꿰서 만든 목걸이를 걸고, 허리에는 잘라낸 손들을 엮어서 만든 치마를 입고 있다. 입가에는 붉은 피가 묻어있고 길고 붉은 혀를 내밀고 있다. 도무지 우리가 여성, 혹은 여신에 대하여 갖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두렵고 섬뜩한 모습이다.

인도사상에서 여자에 대한 기본 개념은 쁘라끄리띠(Prakrti)이다. 쁘라끄리띠는 모든 세계가 전개되어 나오는 근본 물질이며, 모든 변화와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러나 쁘라끄리띠는 의식이 없다. 이에 비하여 남자는 뿌루샤(Purusa)이다. 순수 정신을 의미하는 뿌루샤는 의식적이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자체로는 움직임이 없다. 조용히 관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푸루샤는 앉은뱅이다. 앉은뱅이는 혼자 힘으로 걸을 수는 없지만 어떤 길이 바른 길이고 어떤 길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에 비하여 쁘라끄리띠는 성한 다리를 가진 소경처럼, 어디든 갈 수 있는 힘을 지니지만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혼자 길을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자칫하면 벼랑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고, 엉뚱한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여자가 위험한 존재로 인식될 때, 있을 수 있는 반응은 세 가지다. 하나는 무조건 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통제하여 복종시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자이나교나 불교와 같은 인도 종교에서는 피하고 금지하는 경향이 강하다면, 바라문교 입장은 여자는 철저하게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이에 비하여 후기 탄트라 전통에서는 피하거나 복종시키는 대신에 여자는 남자의 해탈에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입장이다.

<사진2>갠지스 강가의 두 소녀. 신세대의 눈에 비친 힌두교는 어떤 것일까? 갠지스강의 목욕장면을 바라보는 눈빛이 진지하다.

붓다는 한동안 여자가 승단에 가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아난다의 간청으로 여자의 출가가 인정되었지만, 그때 붓다는 “천년 간 이어질 정법이 5백년밖에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당시의 인도에서 여성의 출가를 인정했던 것은 상당한 혁신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기본 입장은 여자란 위험한 존재이며 따라서 멀리해야 한다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붓다와 그의 제자 아난다의 대화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다.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보지도 말아라.”

“부득이 보아야 할 경우에는요?”

“말을 걸지 말아라.”

“말을 꼭 해야 할 경우가 있지 않겠습니까?”

“꼭 그래야 한다면 마음을 다잡고 흔들리지 않게 하여라.”

정통 힌두교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다. 뿌루샤의 통제를 받지 않는 쁘라끄리띠는 위험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통제 밖에 있는 여자는 위험하다. 여자는 어려서 아버지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따르며, 늙어서는 자식을 따른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이미 2천년 전 인도의 종교 문헌에서 볼 수 있다. 여자는 결코 독립에 적합하지 않으며,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언제나 남자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거듭 강조된다.

여자는 일방적으로 종속되고 천한 신분을 지닌다. 여자의 의존성과 순종은 결혼한 여자가 부모의 집을 떠나 남편의 집으로 간다는 사실에서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해진다. 사실 여자는 종교적으로 슈드라에 해당한다. 정통 힌두교에서 여자는 죄인, 슈드라, 아웃카스트와 마찬가지로 베다를 들을 자격이 없으며, 따라서 해탈할 수 없는 존재다. 여자는 남자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해탈할 수 없다고 명시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도 정통 힌두교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와 함께 식사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설사 아내가 바라문 태생이라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남긴 밥을 먹는 것은 특히 아름다운 미덕으로 간주된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나란히 걸어갈 수 없으며, 반드시 한 두 걸음 뒤따라가야 한다. ‘마누법전’에서는 여자를 죽이는 것은 마치 술을 마시는 것처럼 경미한 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여자가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은 탐탁치 않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죄악으로 여겼다. 여자가 손에 책을 잡으면 가정에 재앙이 든다는 믿음도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슈드라를 카스트 제도로 꼭꼭 묶어두듯이, 여자는 옥죄고 또 옥죄는 대상이었다.

<사진3>까주라호사원 외벽에 부조된 여인상. 가슴과 힙이 강조되고 있다.

후기 힌두교에서 탄트라 전통이 성행하면서 여성의 중요성을 부각된다. 여자는 단지 눈 먼 쁘라끄리띠가 아니라, 여성적인 활동원리 샥띠(Sakti)의 화신이다. 샥띠는 만유가 생겨나게 하는 힘, 성력, 신적인 창조력으로 간주되며, 남성적인 원리와 동등한 지위 혹은 그 이상의 지위를 지닌다. 샥띠는 남신의 여성적인 배우자로 간주되며, 샥띠 여신에 대한 숭배가 중요한 신앙 형태로 자리잡는다.

탄트라의 기본 입장은 '내 자신을 넘어뜨리는 상대를 이용하여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적나라한 삶으로부터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느낌, 인간으로서의 상황 그대로의 전부를 될 수 있는 한 전면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로 돌아선 것이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욕망 또한 해탈에 이르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자연스런 성적인 욕구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몸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우파니샤드의 고행관은 탄트리즘에 이르러 수정된다. 탄트라 전통은 인도정신사에서 일찍이 유래가 없는 인체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신성은 육체에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육체는 고통의 근원이 아니라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도구다. 여자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탈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떠오른다.

이와 같이 탄트라 전통에서 여신 샥띠가 숭배되고 여성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사실이지만, 육체를 지닌 여성 자체에 대한 지위 상승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다시 말하여 여자가 중요한 것은 육체가 중요하기 때문일 뿐이다. 여자는 육체와 동일시되며, 단지 도구일 뿐이다. 여자가 단지 하나의 도구로 전락됨으로써, 오히려 남자가 여자의 육체를 탐하는 것이 보다 노골적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자가 기본적으로 도구성에서 이해된다는 사실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풍만한 가슴과 힙이 여성의 이상적인 몸매의 핵심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고대인도 경전에서 여성의 이상적인 몸매는 굵고 튼튼한 허벅지, 펑퍼짐한 둔부, 가는 허리, 큰 유방이었다. 후기 힌두교 사원의 부조에서 보는 여신상은 하나같이 풍만한 가슴과 둔부가 강조된다.

<사진4>순례자들이 강에 띄울 꽃 그릇을 준비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인도여성들은 장신구가 많기로 유명하다.

여자의 가슴과 힙이 지니는 도구성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서 다소 변했다. 고대에는 주로 그것이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반면에 탄트라 전통이 성행하면서부터 그것은 단지 에로티시즘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하나의 도구로 이해되었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이것은 여성의 본질이 지나치게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파악된 결과다.

물건이라면 또 모를까, 적어도 사람은 기능만으로 파악될 수는 없다. 쟁기는 밭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쟁기일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아이를 낳기 때문에 혹은 남자의 성적인 대상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에 여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도구는 주인일 수 없다. 다만 누구의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종속적이며 이용될 뿐이다.

이제 시대가 달라져서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지만, 여자들은 여전히 볼륨 있는 가슴과 힙에 매달려있다. 심지어는 밑으로 아이를 낳는 여성들이 드물어지고 모유를 먹고 자라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진 것이 요즘 세태인데도 여전히 가슴과 힙의 크기에 집착한다.

체중을 파괴하자고 야단들이면서도 이와 함께 늘 따라붙는 단서 조항은 볼륨 있는 가슴과 힙이다.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것이 체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과 힙은 오히려 커져야 한다는 것이 요즘 여성들의 몸매 관리의 기본 개념인 셈이다.

이것은 여성 자신들이 자기의 도구성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노예이기를 자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 자신들이 스스로 도구성에 매달리는 한, 여성으로서 자기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여성들의 화장이 짙어지고 몸치장이 요란해질수록, 그럴수록 여성들은 '남자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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