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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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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3>

힌두교와 가난

현재 인도 사람들의 3할 정도는 절대 빈곤에 놓여있다. 이 사람들은 대개 하루 한 끼의 식사로 연명하며,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다. 거리 곳곳에 집 없는 사람들이 널려있고, 이들은 대개 구걸이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일생 동안 자기의 시체를 불사를 나무 값으로 달랑 은팔찌 하나를 끼고 죽을 수 있다면 그래도 다행이다. 실제로 이런 소망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다. 돈이 없어 충분한 나무를 살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타다 남은 시체가 그냥 강에 던져지기도 한다. 운수 사나우면 들개들의 밥이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인도의 가난이 힌두교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인도의 지식인들 사이에도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인도 안에서도 시크교나 자이나교 같은 소수 종교의 사람들은 대체로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반면에, 가난한 대다수가 힌두교인이라는 결과를 놓고 본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인도 사람들의 가난은 이들이 믿는 힌두교에 그 원인이 있다는 비난은 면하기 어렵다. 원래 사상은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이 잘못 받아들여서 그렇게 되었다는 변명은 통할 수 없다. 삶이 그렇다면 아무튼 사상 속에 이미 그 씨앗이 들어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힌두교의 가르침은 가난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세계의 고등 종교에서 흔히 보는 청빈이 강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물질적인 부(富)를 강조한다. 물론 인도 종교 중에는 불교나 자이나교와 같이 엄격한 무소유를 계율로 하는 종교가 있기는 하지만, 정통 힌두교의 입장은 아니다. 정통 힌두교에서는 오히려 부의 축적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것은 인생에서 이루어야 할 네 가지 목적 중의 하나다. 세속을 떠나 수행에 전념하기 전에 우선 이루어야 할 것은 세속에서의 승리다.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자만이 숲에서 명상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누구나 산야신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속의 삶에서 의무를 다한 자만이 명상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1>모든 것을 포기하고 운수(雲水)의 길에 있는 유행자(遊行者). 유행(遊行)하는 삶은 인도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마지막 단계이다.

힌두교 전통에서는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네 가지 단계를 거치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친다. 첫 단계(學生期, 1-25세)는 금욕과 학습의 기간이다. 이 기간 중에는 각 개인이 속한 카스트의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배우고 경전을 공부한다. 남녀의 성적인 접촉이 엄격히 금지되는 금욕이 강조된다.

두 번째 단계(家住期, 26-50세)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단계다. 남녀가 살을 부대끼며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아 대를 잇는 단계다. 욕망은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진다.

세 번째 단계(林捿期, 51-75세)는 앞의 두 단계를 통하여 이룬 경제적인 기반과 가업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하는 단계다. 아내와 함께 혹은 무리를 이루어서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전념한다.

마지막 단계(遊行期, 76-100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운수의 길을 떠난다. 이때는 탁발이 주요 생계수단이다.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세상을 떠도는 산야신(sannyasin, 遊行者)이 된다. 인생의 마지막 단계는 포기에 바쳐진다. 행위도 가족도 사회도 초월하며, 해탈에 대한 집착도 벗어버린다.

이 네 단계를 통하여 이루어야 할 인생의 목적은 부의 축적(artha), 욕망의 실현(kama), 의무의 실천(dhama), 그리고 해탈(moksa)이다. 종교적인 삶의 목적 가운데 하나로 부의 축적을 들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치 있는 행위는 오직 부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는 통찰이다. 진정으로 세속의 잡다한 것들을 버리고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물질적인 부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리기 위해서 우선 가져야 한다. 가진 자만이 버릴 수 있다. 쥐뿔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나는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재가(在家)와 출가(出家)를 연속적인 관계로 본다는 점에서 힌두교는 불교와 다르다. 불교는 재가와 출가를 병행의 관계로 본다. 다시 말하여, 한 사람의 생을 통하여 재가와 출가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는 일생 동안 재가자일 뿐 출가자의 삶을 살지 않으며, 출가자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출가자일 뿐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가 중요시된다. 이에 비하여 힌두교에서는 개개의 모든 사람들이 재가를 토대로 출가의 삶을 추구하며, 여기서 출가의 의미는 포기라 할 수 있다.

<사진2>꼬나락(Konarak)사원 앞의 거지들. 포기할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포기는 오직 가능한 것에 대한 포기일 때 초월에 이르는 에너지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힌두교인이라면 누구나 산야신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부를 축적하고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지나치기 쉽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오늘날 인도의 가난은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에 집착한 결과다. 힌두교는 철저하게 길의 종교다. 길의 종교여야 한다. 길이 목적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힌두교는 목적보다는 길 자체에 충실할 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종교다.

당장의 끼니가 걱정인 사람들에게 명상과 요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굳이 인간 욕구의 단계에 대한 심리학의 이론을 빌어 설명하지 않는다 해도, 정신적인 추구는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성취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근자에 들어 인도사상에 대한 관심이 가난한 인도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물질의 풍요를 체험한 서구 사람들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물질의 한계를 본 사람만이 내면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다. 그 한계를 직접 체험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당장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걸하는 거지와 탁발 수행자의 차이도 그것이다. 거지의 구걸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산야신의 탁발은 이와 다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육교 위에서 구걸하는 거지의 무소유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가능한 것에 대한 포기’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소유일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물질에 대한 갈급함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정신적인 추구는 어렵다. 물론 물질적인 성취가 정신적인 추구의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물질의 풍요가 오히려 정신의 황폐함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없이는 정신적인 추구가 불가능하다.

요기(yogi, 요가 수행자)는 가난할 수 있지만, 가난한 자가 요기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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