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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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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4>

의무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인도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의무 개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본래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자기가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의 기준에 대한 엄격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집안을 청소하는 하인은 절대로 바깥 청소에 손대지 않는다. 인정머리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남의 의무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바깥 청소하는 하인도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진설명> 곡물가게-1/ 바라나시의 곡물가게, 무게단위로 거래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사소한 일에까지도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는 말이 오가지만, 남의 의무를 침해하지 말라는 말은 들어보기 어렵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남의 의무를 침해한다는 것은 권리를 침해하는 것 못지않게 큰 실례가 될 수 있다.

이들의 의무 개념은 카스트와 맞물려 있다. 카스트의 속성상 의무는 당연히 지상 과제일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여 의무 개념이 충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카스트는 무의미하다. 카스트는 각자 사람마다 본래의 의무가 있으니 그 의무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의 의무는 자기가 전생에 쌓은 업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본다. 다시 말하여 어떤 사람은 부유한 가문의 바라문으로 태어나 제관(祭官)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은 길거리의 수드라로 태어나서 하수구 청소를 하는 것은 모두 전생의 업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업자득이라는 업의 논리에서 보면, 카스트에 따른 의무의 차별은 전혀 불평등이 아니다. 오히려 평등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하여 전생에 아주 못된 짓을 많이 한 사람이나 선한 행위를 많이 한 사람이나 이생에서 마찬가지로 잘 먹고 잘 산다면 오히려 그것이 불평등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역설적이게도 불평등이 평등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생과 내생에 대한 믿음이 전제된다.

‘법 앞에 평등’ 혹은 ‘신 앞에 평등’은 ‘업 앞에 평등’이라는 말로 대체되는 셈이다. 나아가서는 업 앞에 평등이 곧 신 앞에 평등으로 받아들여진다. 신은 각 개인의 업을 기억했다가 정확하게 다시 나누어주는, 다시 말하여 업의 법칙을 집행하는 자다. 그러나 업의 법칙은 신과 별개가 아니다. 신을 떠나서는 업의 법칙이 있을 수 없다. 업의 법칙은 신의 의지의 표현이며, 신은 업의 법칙에 따라 악업을 지은 사람에게는 고통스런 벌을 내리고 선업을 지은 사람에게는 행복한 결과를 나누어 준다. 따라서 업의 법칙은 오히려 신의 정의가 세상에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수 있다.

불평등이 평등이라는 업설의 논리는 엄격히 말하여 사람의 출생이 각자의 업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며,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각자 업이 같지 않으므로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삶도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할 뿐이며, 인간의 삶은 당연히 불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숙명론이 아니다.

<사진> 스낵가게-1/ 이른 아침 스낵가게 앞의 사람들, 스팀으로 찐 ‘이들리’, 기름에 튀긴 ‘와다이’ 등이 보인다.

인도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본래의 의무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의무의 실천을 아주 중요시한다. 힌두교의 가장 대중적인 경전인 「바가바드기따」(Bhagavadgita)에서 끊임없이 강조되는 것도 의무의 실천이다. 아르쥬나(Arjuna)가 친척과 옛 동료들을 죽이는 전쟁에 나아가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끄샤뜨야로서 자기 본래의 의무를 져버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의무의 실천이 강조되는 것은 그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해탈과 직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힌두교인이 인생에서 이루어야 할 목표는 의무의 실천, 부(富), 욕망의 실현, 해탈의 네 가지다. 앞의 세 가지 중에서도 의무의 실천은 부와 욕망의 실현에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며, 해탈과 직결된다. 따라서 의무의 실천은 자기의 해탈을 위하여 필수적인 권리이며, 나아가서는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인도 사람들에게 의무는 기피하고 싶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존재 자체의 해방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본다. 나아가서 각자에게 어떤 의무가 주어지는 것은 냉엄한 업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자기에게 의무로 주어진 일은 천직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의무를 잘 하는 것보다는, 서툴더라도 자기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업에 따른 의무 개념은 삶을 다분히 숙명적으로 규정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현재 나에게 주어지는 의무가 과거의 업 때문이라고 측면에서 본다면 다분히 업의 법칙과 이에 따른 의무는 다분히 숙명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의무에 대한 애착은 때로는 꽉 막힌 융통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델리에서 살던 때의 일이다. 학교 부근에 살다가 근교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면서 학교에 갈 일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복잡한 학교 부근보다는 공기 좋고 집세도 싼 외곽지역이 여러 모로 편했다. 그때까지는 학교 부근의 개인주택 3층에 월세로 살고 있었는데, 학교가 가깝다는 것 외에는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공기가 말이 아니었다. 겨울철에 스모그가 심할 때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코밑이 시커멓게 될 지경이었다. 저녁 10시가 되면 주인집 대문이 닫히고 바깥출입이 불가능해진다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

<사진> 사탕과자-33/ 인도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사탕을 만들고 있다.

이사하기 며칠 전부터 이사할 아파트에 드나들면서 청소도 하고 페인트칠도 했다. 인도의 집들은 개인주택이든 아파트든 벽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벽은 예외 없이 페인트칠로 끝이다. 그것도 유성페인트가 아니라 수성페인트를 사용하는 게 보통이며, 등을 기대고 앉았다가 일어나면 등에 횟가루가 허옇게 묻어나기 일쑤다.

이사하는 날 하필이면 비가 쏟아졌다. 트럭에 짐을 싣고 아파트 정문에 도착하자 수위 아저씨가 차를 가로막았다. 통행증을 내라는 것이다. “주인과 계약도 했고 열쇠도 받았는데 무슨 소리냐?”고 따졌지만 막무가내였다. 사람이 드나드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자동차가 정문을 통과하려면 어떤 경우든 아파트 자치회장이 발급하는 통행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자치회장을 만나려 했으나 그는 외출 중이었다. 잠시 비라도 피하자고 수위 아저씨에게 사정해보았으나 대답은 한결같이 “노”였다.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비에 책이 젖고 가재도구가 젖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그는 이삿짐 트럭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 일은 좀 거창하게 말하여 인도사람의 꼬장꼬장한 의무 개념과 한국 사람의 두루뭉술한 융통성이 맞부딪친 사건으로 두고두고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아마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십중팔구 통과다. 통행증이고 뭐고 우선 책이 비에 젖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차를 통과시켰을 것이다. 통행증은 나중에 받아도 되는 것이고 우선 당장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다르다. 이들의 머리 속에 뿌리 깊은 의무 개념은 이런 융통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의무 개념은 원칙의 고수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때로는 안쓰러울 정도로 원칙에 집착한다. 안쓰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존경스럽고, 화가 나지만 또한 내가 화를 내는 이유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이들의 꽉 막힌 융통성이다. 내가 그날 이사를 포기하고 돌아서면서 생각한 것도 그것이다. “그래, 당신은 훌륭한 수위다. 당신은 자기의 의무에 충실한 것이다.”

사실 의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꽉 막힌 융통성을 담고 있다. 인도말로 의무는 다르마(dharma)라고 한다. 알다시피 다르마는 법이며 진리다. 따라서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과는 무관하게 일관된 것이며, 무정하고 쌀쌀맞은 것이 법이다.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정확하고 에누리 없는 것이 다르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애원하고 매달린다 해도 지는 해를 잡을 수는 없다. 사람들의 바람이나 생각과는 무관하게 저녁이면 에누리 없이 해가 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정확한 법을, 이미 있는 법을 알고 이를 따르는 것뿐이다.

인도 사람들의 의무 개념은 이런 것이다. 의무는 사람으로서 응당 해야 할 본분, 혹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반드시 하지 않는 것이다. 의무를 져버리는 것은 자기의 본분을 내팽개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해탈 혹은 자기완성에 역행하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의무는 기피의 대상일 수 없다.

요즘 우리는 어떤가? ‘응당 해야 할 본분’이라는 의미의 의무는 사전에나 있는 개념일 뿐이다. 이제 그것은 갚기 싫은데도 갚아야 하는 채무처럼, 도무지 찜찜하고 싫은 것이 되어버렸다. 의무의 개념이 크게 변질된 것이다. 국방의 의무는 의무인 동시에 곧 권리라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요즘 과연 몇 사람이나 군 입대를 의무인 동시에 권리로 생각하는지는 의문이다. 무슨 핑계로든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해가고 싶어 한다.

의무가 기피의 대상으로 전락할 때, 사람들은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원칙을 깨면서까지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흔히 무원칙은 융통성으로 미화되기 쉽다. 사실 원칙이나 융통성은 모두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율배반적인 측면을 지닌다. 융통성을 보이다 보면 마침내 원칙마저 무너져버리기 쉽고, 그렇다고 원칙만 고수한다면 자칫 원칙이 있게 된 목적이 무의미해 질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사회에서든 이 두 가지 가치 기준 사이에는 늘 어느 정도의 긴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융통성은 어디까지나 ‘원칙의 융통성’일 수밖에 없으며, 융통성에 원칙이 놀아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새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각자 자기의 일에 충실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가 응당 해야 할 일과 응당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서지 않는 한, 사회의 혼란은 당연하다. 사실 의무를 의미하는 다르마의 문자적인 의미는 ‘떠받치는 것’, ‘지탱하는 것’이다. 의무 개념이 희미해지고 변질된다는 것은 곧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다. 인도의 격언처럼, 의무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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