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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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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5>

영화대국 인도

인도가 영화 대국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영화하면 우선 할리우드를 떠올리고, 할리우드의 이미지는 인도같이 가난한 나라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리를 꼬고 앉은 요기, 명상, 길거리의 거지들, 카스트 같은 인도의 이미지는 확실히 할리우드 스타들의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다.

사진1. 뿌자-3/ 사원에서 뿌자(예배)를 드리는 것은 인도사람들에게 생활의 중심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어떤 기준으로 보나 인도는 영화 대국이라 할 만하다. 매일 지구상에서 상영되는 영화 4편 가운데 1편은 인도 영화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영화가 제작되고 있으며, 관객의 수도 엄청나다. 통계에 의하면 인도 사람 10명 중 1명은 매주 극장에 간다. 인도 인구를 대충 10억 정도로 잡는다 해도, 일주일에 천만 명의 관객이 극장으로 몰리는 셈이다. 관객 백만 명을 동원하는 영화는 아무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전국적으로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도 많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는 영화도 많이 만들어지고 관객도 엄청난 것은 결코 이 사람들이 영화광이거나 혹은 경제 사정이 넉넉해서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우선 극장 말고는 달리 갈 만한 곳이 없다. 우리처럼 적당히 풀어질 수 있는 곳이 없다. 포장마차도 없고 노래방도 없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인도 사람들의 유일한 즐길거리다. 심지어는 구걸로 끼니를 해결하는 길거리의 사람들도 극장에 간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극장이 붐비는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러나 단순히 갈 곳이 없기 때문에 혹은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극장으로 몰리는 것만은 아니다. 무엇인가 끌리는 게 있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다면, 강요된 것이 아닌 이상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몰릴 수는 없는 것이다.

영화가 다른 수단에 비하여 특히 재미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도의 사실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여 비록 스크린에 비치는 것은 손에 잡히는 현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영화는 카메라와 영사기를 통하여 사실을 아주 상세하게 재현시킬 수 있으며, 이렇게 재구성되어 탄생되는 현실은 관객에게 친근감을 주고 매력적일 수 있다. 물론 기록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영화 속의 이야기가 현실 그 자체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그려내는 사실성은 다른 어떤 매체보다 더 정교하다.

사진2. 신상-8/ 사원 앞 길거리 노점에 진열된 온갖 신상들, 힌두교에는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신들이 있다.

물론 무조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세밀하게 그려낸다는 것만으로 관객들이 흥미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재미는 관객들의 현실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일치할 때 일어난다. 그때 웃기도 하고 눈물을 짜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허구가 가미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영화는 항상 허구성과 사실성 사이를 오간다.

내가 보기에 인도 영화는 있을 법한 허구가 아니라, 얼핏 보아도 말짱 허구인 영화가 대부분이다. 엉성한 구성과 스토리 전개, 현실성이 결여된 갑작스런 국면 전환 등등,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영화 자체에 전혀 리얼리티가 없다는 것은 우선 사람을 지루하게 만든다. 3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는 영화 한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나 똑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인도 사람들은 다르다. 영화에 열광한다. 몰입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영화를 보러온 사람들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영화에 동참한다. 영화는 마당극도 아니고 굿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화면에 비치는 사람들과 함께 박수치고 노래가 나오면 따라하고 심지어는 춤추는 장면이 나오면 일어서서 몸을 흔들어댄다.

영화의 내용 자체가 관객들이 동참하게 하는 점도 있다. 스토리의 전개에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중간 중간에 그룹 댄스가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도무지 영화라고 해야 할지 무용이라고 해야 할지 또는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이라고 해야 할지 분간이 안 갈 때도 있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특히 이 장면을 좋아한다.

이와 같이 인도 영화에 허구성이 짙은 것은, 인도 사람들이 현실보다는 비현실적인 허구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에 대한 좌절과 체념이 내세에 대한 집착을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면서 숨 막히는 고통의 현실을 되뇌기보다는 차라리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 클수록 비현실적인 영화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지니게 된다.

사진3. 여신-18/ 여신 빠르와띠(Parvati), 쉬바의 배우자신으로 온순하고 난폭한 극단적인 두 측면을 지닌다.

사고방식의 차이도 상당히 작용한다. 사실 허구냐 아니냐 하는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여 내 눈에는 얼토당토 않는 허구로 보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한 허구로 보일 수도 있으며, 반대로 나에게는 지극히 사실적인 것으로 보여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뻔한 허구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인도 사람들의 사고방식 속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 환영(幻影, maya)으로 보는 시각이 뿌리 깊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현실 세계는 참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야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의 이야기가 허구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또한 마야다. 그야말로 오십보백보인 셈이다.
확실히 영화와 마야는 통하는 점이 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 영화 속의 모든 장면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내 자신과 세계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게 되면 세계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야에 지나지 않는다. 화면에 비치는 영화 속의 장면들이 실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또한 허상일 뿐이다. 그러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중에는 영화 속의 세계가 곧 실제적인 현실로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계에서 무지 가운데 있는 한은 세계도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야는 두 가지 기능을 지닌다. 하나는 본래의 진면목을 감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다른 모습으로 투영하는 힘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두컴컴한 헛간에서 새끼줄을 뱀인 줄 알고 화들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이때 새끼줄을 뱀으로 둔갑시켜 보이게 하는 힘이 바로 마야이며, 그 결과로 생겨나는 뱀 역시 마야다. 불을 밝히면 그것은 뱀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므로 금방 보았던 뱀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움찔 뒷걸음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 속의 일들은 비록 허구라 할지라도,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은 허구가 아니다. 영화를 통하여 받은 감명과 느낌은 비록 영화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간다 해도 여전히 남아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허구성은 우리에게 의미를 지닌다. 현실 속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영화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가슴 뭉클한 감명도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의 허구는 현실 이상의 새로운 차원에 대한 비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영화의 허구성은 마야가 그런 것처럼, 본래의 참 모습을 감추고 그것을 왜곡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허구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의 진솔한 면면을 볼 수 있게 하는 매체가 될 수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에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영화의 허구가 지니는 은폐와 왜곡의 위험은 영화 자체의 탁월한 선전성과 관련하여 한층 더 심각해진다. 시각적 영상의 수준 높은 사실성과 음악이나 음향의 청각적 효과까지 동반하는 영화는 관객 대중에게 수동적이고 전면적인 수용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만에 하나 이 가공할 대중 매체에 특정 이데올로기가 실린다면,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고도 쉽게 주입될 수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란 늘 일부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의 가치체계와 지향점이 그대로 영화에 흘러들 수 있으며, 다수 대중은 단지 이들의 문화를 소비하는 피동적인 인간으로 전락할 위험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영화 또한 상품의 형태를 띠고 팔리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은 역시 이익의 극대화일 수밖에 없다. 이익이 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태세다. 영화는 인간의 문화적 산물로서의 가치로 평가되기 이전에 우선 경제적으로 자본가의 이윤 동기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최근에 영화나 드라마에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는 것이나,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문화가 오락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도 문화가 상품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허구는 현실과 비슷한 허구이기 때문에 근사한 것일 수 있는 반면에, 또한 사이비(似而非)일 수도 있는 이중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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