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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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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초월의 경계, 인도 <16>

아름다운 파괴

십여 년 전 남산의 외인 아파트를 허물면서 텔레비전으로 중계한 적이 있다. 아름다웠다. 그 큰 덩치를 일시에 폭삭 내려앉게 할 수 있는 파괴공학의 절묘함도 절묘함이려니와, 폭삭 주저앉으면서도 뒤끝이 깨끗하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멀쩡한 건물을 강제로 허물어버리는 것인데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파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는 장면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남산의 본래 경관을 되찾게 되었다는 매스컴의 강조보다는, 무엇보다도 나는 한국 사람이고 그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콧대 세우고 사는 외인들의 아파트라는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구경 중에 불구경이 재미있고 싸움구경이 재미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파괴도 멋질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소중한 기억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 파괴라는 말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통념으로는 도저히 파괴라는 말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들이 이 말과 서로 어울려 그럴싸하게 통한다. 가격파괴니 체중파괴니 하는 말들이 그렇다.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다. 그러나 요새는 어디서든 접하는 말이다. 대개는 튀어야 산다는 심리와 얄팍한 장삿속이 합작하여 이루어낸 작품이다. 바겐세일이라는 말로는 사람들이 꼬여들지 않으니까, 보다 강도 높게 가격 파괴를 외치고, 체중 조절 혹은 다이어트라는 말로는 어필하지 못하니까 체중 파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다.

<사진1> 나르마다(Narmada) 강가에 위치한 옴까레슈와르(Omkaresvar)의 쉬바사원

원래 파괴라는 말은 어둡고 침침하고, 무시무시하고 괴기스런 그림자를 달고 다니는 말이었다. 창조 혹은 건설이라는 말이 지니는 신선함과 건설적인 어감에 주눅이 들어 온 것이 파괴라는 말이다. 지금껏 우리에게 파괴라는 말은 무지막지하고 난폭하게 와 닿았던 것이 사실이다. 창조는 좋은 것이고 파괴는 나쁜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뿌리 깊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갑자기 파괴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가격 파괴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체중 파괴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대단한 파괴력을 보였던 게 사실이다. 이에 편승하여 학력이나 학벌에 연연하지 말자는 의미로 학력 파괴니 학벌 파괴니 하는 말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정말 그랬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무튼 요즘처럼 파괴라는 말이 대우받는 시대도 없었을 것이다.

가격 파괴에서 당하는 것처럼, 거의가 혹시나 하는 기대를 역시나 하고 돌아서게 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게 보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괴라는 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파괴란 무조건 나쁜 것이며 피해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창조라는 것은 언제나 파괴에 뒤따르는 것이며, 파괴는 이미 그 속에 창조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씨앗이 싹을 틔울 때는 반드시 껍질이 터지는 파괴가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개 잊고 살아온 것이다. 산업화와 개발이 최우선 과제였던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의 관심은 오직 창조와 건설에 있었다. 부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며, 부술 것도 없었는지 모른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미 파괴의 시대로 건너가고 있다. 확실히 지금은 파괴와 해체의 시기다. 우리 주변에 파괴라는 말이 많은 것도 이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파괴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무조건 쌓아올리는 것만이 미덕이 아니라, 쌓아 올리기 전에 우선 어떻게 잘 부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이제 도시 사회에서 건축은 새로 짓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기존의 건물을 저비용으로 해체할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다. 파괴 공학은 건설 공학 못지않게 중요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인도 사람들의 사고방식 속에서는 언제나 파괴가 창조보다 우선이었다. 세계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파괴로부터 시작한다. 이를 가리켜 흔히 ‘끝에서 시작하는 역사’라고 말한다. 힌두교의 삼신 가운데 최고의 신으로 꼽히는 쉬바(Siva)는 파괴를 주관하는 신이다. 아니 신이 뭐 할 일이 없어서 파괴를 일삼는가?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룩한 신이 파괴를 일삼다니?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쉬바의 파괴는 창조를 위한 파괴이다.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다. 쉬바의 파괴가 없다면 브라흐마의 창조 또한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창조적인 파괴이다.

<사진2> 링가(Linga, 男根)의 표면에 부조된 쉬바. 우주의 파괴와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는 쉬바는 흔히 마헤슈와라(Mahesvara,大自在神)로 일컬어진다.

쉬바의 파괴가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것이 창조적인 파괴이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파괴는 과거 혹은 미래와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에서 가능해진다. 이것은 파괴에 우위를 두는 인도 사람들이 오히려 전통과의 단절을 죽기보다 무서워한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철학에서 인과 법칙을 설명할 때도 원인 중에 결과가 있다고 보는 인중유과설(因中有果說)이 정설로 인정된다. 어떤 사상을 평가할 때 독창성보다는 오히려 그 사상이 얼마나 전통적인 경전에 충실한 해석을 내리고 있는가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파괴가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연속이다. 단절은 죽음이다. 파괴가 우리에게 무시무시하고 난폭하게 와 닿는 것은, 그것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을 때, 단절을 의도할 때 일어난다. 체중파괴의 위험은 여기에 있다. 60킬로그램의 체중을 급작스럽게 40킬로그램으로 줄인다는 것은 단절이며 일종의 죽음이다. 군살을 빼는 것이 아니라 생살까지 빼려드는 것이니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격 파괴도 마찬가지다. 만일 그것이 시장 경제의 원리를 벗어나 물가 체계의 파괴를 의도하는 것이라면, 처음에는 값싼 물건을 제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사기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파괴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순리에 따른다는 말이다. 자연스런 파괴만이 창조적일 수 있으며, 아름다울 수 있다.

우리는 청자연적의 파격을 알고 있다. 자연스러운 파격은 멋의 핵심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처한 상황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아무리 파격이라지만 그것이 처한 상황에 맞지 않으면 멋이 나지 않는다. 처한 상황에 맞다는 것은 주변과의 단절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적인 배경과 어울려야 한다. 말하자면 조화 속의 파괴 혹은 조화를 통한 파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만일 청자연적의 꽃잎을 한 개가 아니라 대여섯 개를 마구잡이로 구부려 놓는다면 어떨까? 그것은 파격의 멋이 아니라 주책이다. 그것은 마치 야구장에서 유리잔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같은 주책이다. 야구장에서는 종이컵에 소주가 제격이다. 청자연적의 파격이 지니는 멋은 단지 튀는 멋이 아니라, 튀되 그것이 처한 환경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가능한 멋이다. 겉멋이 아니다.

억지로 하는 파격은 파격이 아니다. 억지로 하자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파격이 자연스러울수록 멋이 난다. 멋은 공간적인 조화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길들여질 짬을 필요로 한다. 옛 것과 새 것 간의 긴장이 있기 마련이며, 멋은 이러한 긴장을 완화하는 가운데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병(新兵)은 아무리 군복을 다려 입고 멋을 부려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고참은 허술하게 입어도 군복에 멋이 난다. 다 같은 옷이지만, 옷과 그것을 입는 사람 사이의 조화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급격한 변화에는 반드시 문제가 따른다. 사람의 몸이든 사회든 마찬가지다. 설사 좋은 방향이라고 보이는 변화라도 급격한 변화는 결국 문제를 부른다. 이 시대가 겪고 있는 온갖 몸살은 지난 시대의 급격한 변화가 낳은 부산물임을 우리는 안다. 일전에 어느 일간지에서 본 소아과 전문의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아이들에게 어느 병원이 가장 좋은가?” “감기가 가장 천천히 낫게 처방하는 병원이 최고다.” 일리 있는 말이다.

<사진3> 마깔리(Makali)사원(Ujjain) 지하 지성소에서 뿌자를 드리고 있는 쉬바교도들.

수 세기 동안 지배해 온 가치 기준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 전통이 대우받지 못하는 무서운 세상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찢어진 청바지와 배꼽티를 앞세운 이른바 엑스 세대의 에너지가 충만한 무질서가 기성세대의 안정과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파괴를, 이들의 공허와 혼돈을 꼭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당연한 몸부림이다. 문제는 신세대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성세대에 있다. 기성세대는 신세대들의 파괴를 두려워하고 있다. 이것이 문제다. 아이들은 당연히 그런 줄 알면서도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야 하는 것이 어른이다. 아이들이란 으레 까불고 떠들고 장난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해라, 까불지 마라 머리를 쥐어박고 윽박지르고 타일러야 하는 것이 어른의 의무다. 문제는 기성세대가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그런 것이니까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과 당연히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르고 간섭하는 것은 다르다. 자연이 아닌 한, ‘조화’는 ‘투쟁’ 속에 있다. 싸운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 이해의 지평을 맞추자는 노력’이다.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것이다.

신세대의 파괴적인 행태는 기성세대의 관심 속에서 창조적일 수 있다. 기성세대의 간섭이라는 것, 쥐어박는 과정에서 전통이 스며들어 신세대 속에 살아나는 것이다.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는 것 같아도 간섭하는 것과 무관심한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신세대가 고분고분 따른다면 문제가 있다. 창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신세대가 되려면 우선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콩나물시루에 물이 설렁설렁 다 지나가는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콩나물이 자라나 있는 것을 본다. 만일 콩나물이 지나가는 물이 아깝다고 모조리 다 안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콩나물은 썩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세대가 기성세대의 가르침에 그냥 길들여진다면 아무런 발전도 없고 미래도 없다. 신세대는 애늙은이로 썩어버릴 것이다. 반대로 콩나물시루에 물을 붓고 또 부어도 모두 그냥 흘러가버린다고 하여 아예 물을 주지 않는다면, 콩나물은 말라죽어버릴 것이다. 기성세대의 간섭과 신세대의 반발을 통하여 연속이 있다. 기성세대는 간섭해야 할 의무가 있고 신세대의 도전은 정당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청자연적의 파격처럼 자연스런 파괴, 멋있는 파괴다. 한꺼번에 몸무게의 절반을 빼려고 덤비는 체중파괴가 아니라 차근차근 주변과의 조화를 생각하는 맛깔 나는 파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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